이홍석(Lee Hong-Seok)

1968년04월05일 출생

서울에서 활동

작가 프로필 이미지

소개말

문자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엔 상징적인 문양이나 단순한 벽화 같은 것들이 논리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설득의 기술이 되기도 했다. 그 중, 몇몇 진보된 인류는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내는 기술을 갖춤으로써 대중을 보다 쉽게 이해시켰고, 또 역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형상화함으로써 논리에 다가서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오컬트적 통치의 장치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림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두 가지다. 사실을 그릴 것인가 사실적이지 않은 것을 그릴 것인가? 그러나 이 두 가지의 태도가 추구하는 목적은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대중을 설득하려 한다는 관점에서 다시 하나로 이어진다. 이는 그림이 문자가 논리의 자리를 대체하기 전까지 대중을 설득할 수 있었던 가장 분명한 방법이었고 포괄적인 정보였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현대의 문자가 다시 과거처럼 단순한 문양이나 그림의 형태로 돌아가 그 안에 많은 정보와 논리를 심어놓는 바코드나 QR코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꽤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다시 말해 그림은 일종의 설득의 기술이고 소통방법이며 더 깊게는 통치의 도구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그림이 왜 대중보다 지배자의 취향에 맞추어 그려졌는지 또는 왜 그의 업적을 빛내는데 소비되어졌는지 그리고 그림이 어떻게 통치의 근거로 활용되어졌는지는 이런 맥락에서 쉽게 납득할 수 있겠다.

그러다보니 그림은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현실을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그려내기 위한 정교함은 사실을 그려내는 것보다도 더 뛰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그림이 신화와 종교, 왕과 귀족사회의 찬양을 그려내던 때에는 지배를 위한 논리와 도구에 가깝지 대중의 감상에 비중을 둘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사진의 출현은 그림을 보다 자유롭게 해방시키는데 일조한다. 이미 프랑스대혁명이라는 격변을 통해 인간본성으로 시선을 돌리며 낭만주의의 경험을 갖춘 화가들이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더 이상 사실화를 그려내지 않아도 되는 시점에 이르러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낸다. 왕실이나 귀족 또는 부유한 상인들이 주문하던 전통적인 초상화시장에서 그들이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19세기 대중은 다게레오타입이라 불리던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사진술의 등장에 감탄하게 된다. 그림이 표현하던 사실주의와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다. 기계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예하게 날이 선 엣지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미지의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그림은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사진은 그동안 그림이 짊어지고 있던 사실주의의 무게를 이어받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실주의라는 이 막중한 무게를 이어받은 사진의 태생은 결국 스스로의 발목을 잡으며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고, 사실과 거짓을 규명해야 하는 윤리적 잣대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이는 사진을 더욱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었을 뿐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원칙을 사수하려던 많은 사진가들의 생명을 현장에서 앗아가기도 했다. 이는 사진이 가장 가깝게 인간의 곁에 머물렀으며 현재에도 가장 인간 가까이에 존재하는 예술임을 증명한다.

그림이 리얼리티를 버리고 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사진은 보다 더 첨예한 리얼리티를 위해 고뇌하고 진보했다. 많은 작업자들이 희생한 숭고한 리얼리티의 영역인 사진을 현대에서 예술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는 이제 좀 진부한 이야기다. 현대의 사진은 다양한 기법과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리얼리티를 표현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진 그 자신의 이야기에 개입하려 한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기계적 메커니즘과 논리적인 엣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설득력을 가지며 사진은 이제 리얼리티를 넘어서 회화조차도 이룰 수 없었던 상상 너머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림과 사진은 서로 마주보는 존재로써 21세기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진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와 사진의 가치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런 사진의 출현배경과 그림이 얽혀있는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보다 손쉬워 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진이 그림과 서로 마주보고 있을 것이라는 이런 통섭의 절묘한 미학을 간과하고 있는 현대의 사진도 다수다. 심지어 카메라 옵스큐라가 화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사진의 유통이 이루어지다 보니 사진은 그림과 완전하게 다른 매체처럼 여겨져 온 것이 현실일 것이다.

애초에 그림이 문자를 대신해 논리의 근거가 되고 설득의 기술이 되었던 것처럼 사진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보편적인 논리와 합리적인 설득의 기술로써 자리 잡고 있다. 그림과 사진이 결국은 이미지의 생산을 통해 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두 가지 형태의 이미지 추구는 이제 더 이상 사실적인 것들을 나열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는다는 것도 같다. 나는 사진이라는 표현방법을 통해 이미지를 드러내고 종종 그 안에서 회화적인 요소들을 발견하는데 큰 기쁨을 느낀다. 사진은 그 자체로써 철저하게 자리 잡은 리얼리티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그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가지고 있다. 또 사진의 무뚝뚝해 보이는 사실주의적 태도는 오히려 이미지를 이해하고 소통하게 하는데 있어서 그림보다도 더 친절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진이 회화적인 느낌을 갖출 때의 감각적 만족감이란 어쩌다 한 번 내뱉는 철학자의 유머 같은 그런 세련된 위트와 감동이 있다.

나는 일부러 사진을 그림처럼 만들지 않았다. 다만 사진과 그림을 함께 이해하고 있는 내 작업의 태도가 우리의 일상을 좀 더 회화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에 나는 이번 전시에서 한 번도 사진에는 입히지 않았던 회화의 액자들을 선택했다. 몇몇 전문가들은 만류했지만 작업이라는 것이 상식의 길로만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도 즐거운 도전이자 보는 이들에게도 신선한 경험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좀 더 사진이 미술을 이해하고 또 미술이 사진을 이해하는 그런 작은 동기가 되었으면 싶다. 어떻게 사진 속에서 마네가 표현되었는지 그리고 렘브란트의 고전이나 달리의 초현실적 느낌을 사진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지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으로 태어나 이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진과 그림, 그 통섭의 즐거움과 감각적 만족감이 채워진 이후에도 잔잔한 감동으로 남겨져 이해와 소통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작업자로서의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