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훈: 숲. 바람-默 The Forest. The Wind-Silence
2023.08.26 ▶ 2023.11.20
2023.08.26 ▶ 2023.11.20
전시 포스터
유병훈
숲. 바람-默 The Forest. The Wind-Silence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acrylic on canvas 97x97cm 2021
유병훈
숲. 바람-默 The Forest. The Wind-Silence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acrylic on canvas 97x145cm 2020
유병훈
숲. 바람-默 The Forest. The Wind-Silence 캔버스에 유화물감 oil on canvas 150x150cm 2023
유병훈
숲. 바람-默 The Fores. The Wind-Silence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acrylic on canvas 130x193cm 2022
이상원미술관에서는 2023년 3번째 기획전으로 유병훈 작가(1949~)의 전시를 준비하였다. 유병훈 작가는 추상화가로서 50여 년에 걸쳐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왔으며 이번 전시는 2019년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전시 제목은 작품 제목과 동일한 <숲. 바람-默 The Forest. The Wind-Silence>이다.
작가는 춘천에서 태어나서 춘천중학교, 춘천고등학교를 거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후 군 제대 후부터 줄곧 춘천에서 거주하며 작업해오고 있다. 강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여 작품 세계를 이어가는 한편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40여 점의 전시작 중에는 500호가 넘는 대작이 포함되어있고 직사각형의 캔버스 작품 이외에도 원형의 캔버스 및 연꽃 형태를 닮은 교자상의 상판에 천을 덧대어 작업한 비정형의 작품도 선보인다.
작가의 작품은 색상이 단순하여 미니멀한 추상작품으로 보이지만 작품을 뒤덮은 색상은 작은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연’이다. 작가는 자연의 외향을 그대로 옮기기 보다는 생동하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존재 자체의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의 출발을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여기서 ‘점’이란 존재하는 것 자체에 대한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미세한 차이를 지닌 다양한 농도의 물감을 붓으로 캔버스에 찍어 빛의 산란과도 같은 표면을 만들어냈다. 녹색, 푸른색, 핫핑크색 등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단순한 표면을 응시하다보면 점들이 만들어내는 음영의 차이로 인한 리듬감과 풍부한 공감각적 느낌으로 인해 말로 옮길 수 없는 깊은 감성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작품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점’이 되어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감각적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특성은 벽에 기대어 놓은 캔버스나 원형의 캔버스, 비정형의 캔버스 작품이 배치된 형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유병훈 작가의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되는 자연의 감성은 강원도 춘천에서 자라고 작업해 온 생활환경에 더해진 작가의 예민하고 서정적인 감수성에 있다. 또한 동시대 현대미술의 치열한 형식적 실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독자적이고 단단한 미학적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상원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유병훈 작가의 예술적 성취를 그가 평생의 삶을 보낸 춘천에서 본격적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된 점에 의미를 부여하며 작가의 예술 활동이 강원도 춘천, 나아가 한국 근현대 미술의 위상을 한층 진일보시키는데 기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작품소개
나에게 자연은 일상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
역시 자연은 그대로이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흔히 자연을 해부한다는 것은
자연을 거역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해부하지 않고도 작업으로 이어지는 풍경과
마음으로 다가 갈 수 있는 풍경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도 내가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큰 왜곡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렵고 벼랑에 서 있는 기분이다.
-유병훈-
유병훈 작가는 <숲. 바람-默 Forest. The Wind-Silence>라는 제목아래
수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시를 열어왔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도 동일한 명제하의 추상 평면 회화 작품이다. 작품은 아크릴 물감 또는 유화 물감으로 캔버스 위에 붓으로 점을 찍어 제작되었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점은 옅은 농도에서 점점 짙은 농도로 변화된다. 작품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점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완성된 작품은 어떤 구체적인 형상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점의 미묘한 변화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는 아크릴물감을 손가락에 묻혀 찍는 방식이었고 이때는 농도 변화 없이 색상 혼합을 통해 작품을 구성하였다. 이후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색상은 더욱 단순해지고 붓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달라졌다. 이번 전시를 통해 발표하는 작품은 거의 대부분 붓을 사용한 작품이며 아크릴 물감의 작품 뿐 아니라 유화물감의 작품도 새롭게 시도하였다. 유화물감은 마르는 시간이 길게 소요되므로 작품 제작 과정에서 시간의 리듬이 달라진다.
단색의 점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사각형 또는 원형, 비정형의 작품이 농담의 변화를 통해 빛이 투과하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표현한다고 해도 전시 제목인 <숲. 바람-默 Forest. The Wind-Silence>, 즉 자연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대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추상작품이라도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미지에 대해 상징과 이야기를 덧붙이는데 추상 작품은 그러한 구체적 해석을 거부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무한한 상상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작가 노트에서 밝힌 것처럼 유병훈 작가는 ‘자연’에 대한 경이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마저 느끼는 것 같다. 그만큼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감동받아왔던 자연 그 자체에 대한 느낌은 구체적인 대상을 훌륭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작품에 대한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작품의 소재로서 자연풍경에 대한 1차원적 설명은 많지 않았다. 자연 자체와 더불어 삶, 특히 춘천에서의 유년시절에 대한 서정적인 이미지들에 대한 기억을 언급했다. 춘천 곰진내 냇가의 빨래터 풍경, 봉의산, 영화관, 노을, 바이런의 시, 음악 등에 대한 경험이다. 작가는 자연 자체의 생명력에서 가장 큰 영감을 받지만 그것은 자연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의 리듬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이며 자연의 속성을 닮은 삶의 국면들 또한 그와 같이 아름답고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연과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의 삶 모두에 내재하는 순수한 핵심에 대한 감각을 ‘존재에 대한 깊은 자각’이라고 한다면 유병훈 작가가 하나의 점으로 시작하여 수 없이 반복하여 수행하듯 작업하는 과정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선명한 색상과 빛이 비쳐오는 것 같은 시각적 효과로 인해 작품은 모던한 장식성을 지니고 있지만 작품의 의미와 지향점은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서구 모더니즘 회화와는 차별화된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상상속의 산, 물, 안개를 그려서 내면의 이상향을 표현하고자 했던 산수화나 한 획 속에 들어있는 기운을 통해 올곧은 정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서예와 같은 동양의 전통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된다. 작가는 ‘미니멀리즘’, ‘단색화’ 또는 ‘모더니즘 추상 회화’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의 형식적 꼬리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경험, 환경, 공감했던 아름다움과 정신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 추상적이고 수행적인 회화작업이었기에 수 십 년간 탐색하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점’은 여전히 그의 작품의 핵심요소이며 그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의 비밀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미세 단위가 되는 것이 점이지만 그는 종종 하나의 점을 커다랗게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는 마치 연꽃을 상기시키는 교자상의 상판에 천을 덧대어 검정색 또는 핫핑크색으로 채색하여 제작하였다. 이 작품들은 전시장 벽에 하나의 점이 되어 설치될 예정이다. 점 하나로 인해 공간에는 긴장감을 비롯해 새로움과 적절한 미적인 쾌감이 생성된다.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때를 무엇이라고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거진 숲에 들어가 햇살과 공기와 흙의 내음을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찬 침묵을 경험한다. 유병훈 작가는 자연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자연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내밀한 경험을 예술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형상과도 닮아 있지 않은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어떤 정신적인 환기, 정서적인 위안, 적어도 감각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면 이성과 논리를 넘어선 감각이 일깨워지는 순간이며 그런 경험이 많이 쌓이게 될 때 좀 더 예술적인 인간, 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존재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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