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정희민
전시전경
정희민
전시전경
두산갤러리는 제13회 두산연강예술상 수상 작가인 정희민 개인전 《수신자들 Receivers》를 2023년 9월 13일(수)부터 10월 21일(토)까지 개최한다. 대표적인 동시대 회화 작가인 정희민은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디지털 환경에 의해 변화된 이미지의 존재 방식과 지각 방식을 탐색하며, 회화를 축으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체적, 정서적 이슈에 다가간다. 이번 전시 《수신자들 Receivers》에서 정희민은 회화의 평면성을 벗어난 이미지를, 얇고 연약하지만 모든 것을 감각하고 껴안을 수 있는 껍질로 환유하고 원초적인 상태의 생식과 창조의 가능태를 호출한다.
아네모네의, 초원의 아침을
서서히 열어주는 꽃잎의 힘(1)이여,
마침내 맑게 트인 하늘의 다채로운 소리의 빛이
꽃의 품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팽팽한 근육을 펴고
끝없이 받아들이는(3) 조용한 별 모양의 중심.
때로 그 충일을 <너무>억누를 수 없어
석양이 보내는 휴식의 눈짓마저도
활짝 펼쳐진 꽃잎을
너에게로 다시 불러 모으지를 못한다.
<얼마나 많은> 세계 결의이며 힘인가, 너는!
우리는 억척스런 존재, 우리는 더 오래 살아남으리라.
그러나 <언제>, 그 모든 삶 가운데 어느 삶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열려 받아들이는 자(2)가 될 것인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제2부 5장, 『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2014, P.365-366
쉽게 짓이겨지고 바스러지는 연약한 잎과 촉수를 가진 꽃은 모든 자극을 수용해 내는 주체가 되기 위해 자신의 여리고 초 민감함을 지켜내며 오랜 시간을 견뎌낸 존재이다. 정희민은 이러한 꽃잎의 힘(1)을 모티프로, 주변의 모든 신호를 예민하게 수신해서 새롭게 추출하는 존재 또는 그러한 끊임없는 수행의 상태로 다가가기 위한 시도로서 이번 전시를 제시한다.
정희민은 2017년경부터 ‘아크릴 미디움’이라는 재료를 수사적 몸으로 상정하고 이것의 투명하고 유연한 물성을 활용해 작업을 확장해 왔다. 아크릴 미디움은 본래 안료에 부피감을 부여하는 재료로 물감의 양을 불리거나 다른 물질의 질감을 모방하기 위해 고안된 대체재인데, 정희민은 이미지와 대상을 투과시키고 동시에 받아들이는 이 물질의 특성을 빌려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우리의 추상적 신체가 정보와 경험을 감각하고 체화하는 양상을 시각화해 오고 있다. 안료와 분리된 투명한 몸(미디엄) 위에는 정희민이 웹에서 채집한 다양한 자연물의 이미지가 아크릴 분사, 잉크젯 전사, UV 프린트 등 인쇄의 기법으로 덧입혀지고, 이제 막 만개하는 꽃의 잎 하나하나가 되어 겹쳐지고 뒤얽히며 가능성을 품은 아무것이 된다. 이는 마치 다른 자연의 형태를 복제, 모방하거나 주변 환경 또는 배경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고 반대로 드러내는 수신자들(receivers)(2)의 전술을 닮은 것이다.
정희민에 의해 평면성을 탈출한 이미지는 또 다른 몸을 부여받아 공간 안에 놓인다(‹살아남은 자들의 평원›, 2023). 웹을 통해 여러 사용자에게 제공받은 자연물의 포토 스캔 모델을 활용한 이 조각은, 나무의 껍질, 갑각류의 꼬리, 광물의 표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생명의 흔적과 같이, 역사를 가늠할 수 없고 존재가 미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식별할 수 없는 형태와 물질, 질감의 불완전한 합성이자 충돌이다. 정희민은 실제로 본적 없는 원본의 표피 질감을 상상하고 손으로 더듬어 떠낸다. 그리고 이 행위를 통해 작업 과정에서 닿지 않는 곳,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주변에 속하지 않는 형태들, 알 수 없는 껍질의 다양한 시공간을 혼합하고 신체적 감각을 증폭시킨다.
숲에서 한 걸음씩 빠져나올수록 개별의 자연은 흐릿해지고 뒤엉킨다. 한편 작은 꽃을 아주 깊숙이 들여다볼 때 그것의 뚜렷한 대상성 또한 희미해지고 하나의 양태로 다가온다. 《수신자들 Receivers》는 원거리의 시선과 근접 시선이 혼재된 풍경으로 규명할 수 없는 생성과 창조, 전이가 이행되는 공간이자 상태 그 자체이다. 정희민을 통해 합성된 실체는 하나의 명확한 대상이나 장면이 되기보다 밀려오는 모든 신호를 받아내어 또 다른 감각으로 전환하고 확장하기 위해, 팽팽한 근육을 펴고 끝없이 받아들이는(3) 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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