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기억공작소Ⅰ 김용익展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 & Carl)
2024.02.14 ▶ 2024.04.21
2024.02.14 ▶ 2024.04.21
전시 포스터
김용익
작가와 큐레이터가 주고 받은 e-mail, 2023, 인화지에 인쇄, 36.4×25.7cm (5ea) 후천개벽: 아나와 칼(Ana & Carl), 2024, 시멘트 벽돌 270개, 우혈(牛血), 81×285×11.4cm
김용익
제목은 아직 고민중인 설치물의 계획도 2023, 방안지에 색연필, 펜, 78.5×54cm
김용익
후천개벽: 아나와 칼(Latter Genesis : Ana & Carl)을 위한 모형 2023, 출력된 사진에 채색, 25.7×34.5cm ed.12/12
김용익
피를 어떻게 뿌릴까(혹은 흘릴까)에 대한 개략적 스케치 2023
2024년 첫 번째 기억공작소는 김용익 작가의 작업을 소개한다. 작가는 그간 현대미술의 어떠한 사조나 운동에 속해있지 않은 독자적인 작업들을 진행해 왔다. 그는 1974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재학시절 발표한 <평면 오브제> 연작으로 국내외 유수 전시에 소개되어 미술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당시 모더니즘 미술의 총아로 조명을 받았으나, 현실과 거리를 둔 모더니즘 미술의 한계와 폐쇄성에 실망하고 모더니즘의 절대성, 완전성, 유일무이성 등에 저항하고 균열을 내는 미술 작업을 시도해 왔다.
작가는 당대의 미술과 사회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는 작업을 진행했지만, 그 이면에는 작가만의 일관된 개념적 접근과 실천의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스스로 ‘모더니즘의 열매를 먹은’ 마지막 세대라 말하는 작가는 작업에 있어서 모더니즘 미술의 양식을 전용하여 편집하는 방식을 통해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기억공작소 김용익展은 그러한 작가의 개념적 접근과 실천들을 전시 기획부터 운영 전반에 대입하고자 했다. 전시에서는 작가가 제안한 「후천개벽: 아나와 칼 (Ana & Carl)」이라는 제목의 설치 작품이 전시된다. 칼 안드레(Carl Andre, 1935~2024)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이자 페미니즘 미술가였던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 1948-1985)의 이야기를 담은 이번 작품을 통해 작가는 남성적인 것(혹은 가치)이 여성적인 것(혹은 가치)을 억압하는 억음존양(抑陰尊陽)의 시대에서 양적인 것(또는 가치)을 조정하고 음적인 것(또는 가치)을 이끌어내는 조양율음(調陽律陰) 시대로의 변화가 필요하며, 성장과 발전보다는 돌봄과 호혜를 더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함을 메시지로 말하고자 한다.
전시실 중앙 바닥에 위치한 벽돌 설치 작품은 총 270개의 벽돌을 2단으로 편평하게 쌓고 그 위에 피(血)를 아주 조금 떨어뜨려 어떤 의문의 사건이 있었음을 암시하게 한다. 한편으로 이 피의 모양은 벽돌 설치물의 한쪽 끝에서 시작해 가운데로 점점 진입하는 모양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피로 상징되는 아나 멘디에타가 점점 중심인 칼 안드레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모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전시실의 한쪽 벽면에는 작업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는 작가노트 텍스트를 관람객이 읽어나갈 수 있게 설치하고, 맞은편 벽면에는 작가와 큐레이터가 함께 주고받은 이메일 출력물들과 작품의 구상을 위해 작가가 그린 드로잉들, 인터뷰 영상을 설치하여 전시의 이해를 돕는다.
전시의 실행은 작가의 제안대로 최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절약하여 진행하였으며, 재료의 구입과 제작, 설치가 큐레이터를 비롯한 최소한의 인력의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전시되는 드로잉과 사진액자는 자원의 절약을 위해 우편으로 회관에 보내져, 전시가 끝나면 같은 방법으로 작가에게 보내진다. 배송에 사용된 박스와 지관 역시 전시물로 알뜰하게 쓰인다. 작품의 제작을 위해 사용된 270개의 벽돌은 전시가 끝나고 나면 원래의 쓰임새를 찾아가도록 하여 저(底) 엔트로피 예술의 실현을 돕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시각에 호소하지 않는’ 미술을 보여 주는 전시이기에 시각을 사로잡는 작품을 기대하고 방문하는 관람객은 조금 허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완성된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시각적으로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뜻과 수수께끼 같은 의문을 풀어나가는 과정과 전시를 완성하기까지의 진행 과정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에 의해 작품이 완성되는 보통의 전시와는 다르게 이번 전시 작품은 텍스트와 드로잉으로 계획된 작품의 개념을 전달받은 큐레이터의 실현으로 완성되었으며, 작가와 큐레이터는 음성언어나 대면 소통이 아닌 이메일 텍스트와 그림 등의 시각언어로만 소통하였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개념뿐만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져 관람객에게 보여지기까지 작가와 큐레이터가 함께 한 개념적 시도의 과정과 결과를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제시해 보고자 한다.
■ 봉산문화회관 큐레이터 안혜정
이번 전시와 관련된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들
첫째, 개념미술은 무엇인가?
- 눈으로 보아서만은 감상 혹은 이해가 쉽지 않고 말과 글을 통한 설명이나 그 작품과 그 탄생에 대한 사전 정보와 지식이 필요한 미술을 말한다.
둘째, 미술이란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인데 눈으로 보아서만은 감상이 어려운 미술이란 모순이 아닌가? 왜 이런 미술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 아마도 너무나 볼거리가 많은 도시문명의 시각 환경이 역으로 이런 시각적 볼거리에 호소하지 않는 미술을 낳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극즉반(物極則反), 다시 말해 사물이 어떤 극에 이르면(자극적 볼거리가 너무 많으면) 반전(아예 볼거리를 추구하지 않는)이 일어난다는 주역의 가르침도 있지 않은가?
셋째, 우리는 개념미술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미술이다”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지적인 호기심과 즐거움을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본다. 마치 퍼즐 놀이나 숫자 맞추기 등 게임을 즐기는 마음 같은 것이다. 그리고 개념미술은 “미술에 대한 미술”이라는 메타-미술적 성격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현대 미술사에 대한 사전 지식 또한 필요하다.
넷째, 이번 작품인 “후천개벽 : 아나와 칼”의 경우 중요한 개념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 “후천개벽(後天開闢)”이라는 말이 우선 중요한 개념적 요소이다. 인류문명은 발생 후 지난 오만년간의 선천개벽(先天開闢) 기간 중 억음존양(抑陰尊陽), 다시 말해 양(陽), 즉 남성(적인 것, 혹은 가치)이 음(陰), 즉 여성(적인 것 혹은 가치)을 누르는 형태로 존속되어 왔다는 것이 정역(正易), 동학(東學), 증산교(甑山敎) 등에서 주장하는 바다. 그러나 그러한 선천개벽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징후를 우리는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문명과 종교의 충돌로 인한 전쟁과 테러, 기후 위기에서 비롯되는 자연재해, 식인(食人)자본주의라고까지 불리우는 산업자본주의 폐해, 방사능 누출 등등 이런 것들이 모두 성장과 진보와 발전이라는 양(陽)적인 가치를 추구해온 선천개벽 시대의 말기적 징후들이라는 것이다.
새로이 도래하고 있는 후천개벽 시대는 이러한 양적인 것에의 쏠림을 좀 조정하는 조양율음(調陽律陰), 다시 말해 양(陽적인 것, 그 가치)을 좀(낮추어) 조정하고 음(陰적인 것, 그 가치)을 좀 돋우어 이끌어내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음적인 가치란 무작정 앞만 보고 나아가 성장과 발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해 가려져 있던 돌봄과 호혜, 파편화된 가정과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쯤에서는 다 아시겠지만 부인인 아나 멘디에타(Ana Mendieta)가 남편인 칼 안드레(Carl Andre)와 미술 동네에서 동등한 예술가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조양율음調陽律陰의 메시지)를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물론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왜 피며 왜 벽돌이 등장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술사의 이면을 조금 들여다봐야 하는 문제이므로(그냥 인터넷 검색만 조금 해 보아도 알 수 있는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피하겠다.
다섯째, 개념미술은 이렇게 글로 표현한 것을 읽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굳이 미술관이나 화랑에 “작품”을 설치해놓아서 가서 보아야만 하는 것인가?
-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아마도 인간은 개념과 정보만으로는 그 존재를 제대로 구현하며 살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다소 모호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미술관이나 화랑에 와서 “직접적”으로 (물질감이 희박할지언정) “작품”을 보는 것이 그냥 정보전달 매체를 통하여 보는 것보다는 그 어떤 다른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그러나 어쨌든 미술이란 것이, 예술이란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자본에 의한 계급이나 인종, 젠더, 등에 의해 파편화되지 않고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고 구현하려는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에 있다면 개념과 정보를 중시하는 개념미술은 그러한 만족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순을 안고 있는 미술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한편 나는 여기서 개념미술이 갖고 있는 그 어떤 미덕(美德)을 한번 얘기해 보고 싶다. 그것은 비용과 에너지가 적게 들고 쓰레기 발생이 최소화되기를 꿈꾸는 저(底) 엔트로피 예술이란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음(陰)의 가치를 따르자는 것인데...아~그러나 이 글은 너무 멀리 왔다. 이쯤에서 그만 그쳐도 좋을듯하다.
■ 작가 김용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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