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주연
Untitled oil on canvas, 162 x112cm, 2010
임주연
Untitled oil on canvas, 130x130cm, 2010
임주연
Untitled oil on canvas, 91x73cm, 2010
임주연
Untitled oil on canvas, 162 x112cm, 2010
당신(의 시간)은 어디에 있나?
1. 그때 당신은
재기발랄한 어휘와 규칙으로 잠시 눈앞에 잡아두는 정도에 그치고 마는 이해와 비평의 무력함을 새삼 확인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손에 쥔 것은 그것뿐이니 최선을 다해 다시 눈여겨보고 휘둘러보고 재어본다. 순간순간 지나치는 것들을 담는 것은 매혹적이다.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것들을 발견했을 때 어떤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작가의 작업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을 결정적 순간이라 부르던 또는 직관이나 영감이 강림하는 것이건 작가는 손에 쥔 붓을 놀리고 카메라를 작동시킨다. 임주연작가는 영상과 회화를 교차시키며 작업한다. 영상작업은 작가가 실제 시간의 흐름이나 심미적 경험의 과정을 몇 개의 동선을 따라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는 동시성을 지니며 심미적 경험의 과정이 작가가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열려있다. 이러한 기술적 구별은 좀 더 심층적인 단계로 들어서면 통합된다. 영상이든 회화든 수용자의 의지와 이해의 비중이 모두 커진다. 어째든 최근 다양한 작업을 동시에 사용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이제는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분위기다. 현대미술의 수용문화가 과거와 달라졌다. 영웅적인 집중과 헌신, 몰입의 양식이 바뀐 것이라고 비약할 수도 있다. 회화든 영상이든 또는 조각이든 그것은 작가가 살아가는 존재의 표현 양식이다. “나는 카메라가 잡아내는 삶의 연속적인 찰나를 회화를 통해 표현한다. 이러한 나의 작업은 일상의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이 찰나 또는 현재로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분명한 인식이 어느 지점에서는 흐릿해지고 모호해지는 경계를 만난다. 그 접촉은 이내 사라진다. 따라서 연속에서 멀어져가는 접촉의 경험을 기록해두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 모호함의 경계에서 어떤 경이나 직관이 강림한다. 임주연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찰나 또는 찰나들의 모음 그리고 ‘탈의’이다. 수많은 탈의의 순간을 수집한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의복을 입고 벗는 과정이 너무도 익숙해져서 이제는 도저히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인지도 이내 망각된다. 그리하여 작가는 망각의 순간들을 끊임없이 모아둔다. 콜랙션이고 아카이브이다. 그녀의 아카이브에서 우리는 그녀 자신의 무수한 탈의 과정을 보게 된다. 작가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듯 우리도 그녀를 바라본다. 우리는 퍼뜩 어떤 에로틱한 감정을 느낄 수 도 있게 된다. 작가는 초기부터 이리저리 접히고 구겨진 벗어 놓은 옷에서 또는 빨래더미에서 탈의과정으로 옮겨왔다. 구체적인 사물에서 보다 유동적인 상태로 이동한 것이다.
탈의과정이 몸과 의복이 만나 과학적 또는 물리적 운동의 과정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운동 또한 보여준다. 탈의는 철저히 문화적이고 사회적이다. 심지어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임주연의 작업은 그것이 카메라이든 또는 작가든 관객이든 필연적으로 시선의 문제가 발생한다. 누구의 눈인가? 현대미술의 새로움이란 반드시 깊은 숙고의 과정이나 창조에 대한 몰입에서만 배양되지 않는다. 우연히 또는 불현듯 나타나기도 한다. 마치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나 홍상수의 영화에서나 본 듯한 여관 속 그녀의 탈의와 착의가 교차한다. 옷을 벗는 모습이 마치 옷을 입는 모습이기도 한다. ‘탈의’라는 것이 마술을 부린다.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린 영상을 보 듯 탈의의 착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양말 신고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고 등등. 그리고 손잡이를 돌려 외출을 한다. 또한 그것은 집에서의 외출이 될 수도 있고 잠시 모텔에 머물다 나오는 그녀의 또는 그의 사생활이 되기도 하다. 그 차이가 창작과 수용의 불일치가 일어난다. 작업노트에는 작업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한 분위기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것은 작가의 시선이 아닌 그나 그녀의 시선에만 포착되기 때문일까? 자기 자신이 아닌 자가 되어야만 볼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마치 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되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그래야만 무언가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그래야 일상의 연속에서 어떤 틈을 내고 생생한 찰나를 보는 것이다. 이미지가 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진동하듯 한 작가의 작업은 일련이 시간의 흐름과 경험과 관계의 쌓임으로 구성된다. 임주연의 이미지는 시간을 이루는 순간순간을 분할하고 정지시킨다. 미술가들이 일상에서 발견해내는 순간들, 우리가 망각한 것들을 다시 드러내는 것은 삶(생활)의 발견과 다르지 않다.
2. 실존의 문턱에서 서성거렸다.
임주연의 작업은 개별자로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재현하는 곳에 잠시 머문다. 작가가 생산한 이미지는 발견 또는 드러냄이다. 그럼으로써 유기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시간, 사건, 이미지들은 분해되고 지연되고 보류된다. 이 과정이 한 컷, 일시 정지된 형태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임주연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회화가 본래 갖는 존재론적 특성이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그녀의 작업방식이다.
임주연의 작업은 전체로서의 시간이 해체되고 부분과 부분으로 물질화되는 과정을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오래된 시간의 문제를 떠올린다. 중세초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면 시간은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안다. 그러나 누군가 질문하는 사람에게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모른다.” 우리는 시간의 밖에 설수 없다. 우리가 언어의 감옥에서 언어(의미)를 사유하듯, 우리는 시간의 감옥에서 시간을 사유한다. 시간의 감옥에 갇혀있는 개별자가 어떻게 그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시간의 감옥 속에서 미리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따르는 삶은 창조적일 수 없다. 관성과 습관에 의해 작동하는 것은 단지 부정적 의미의 일상이며 좀비의 세계일뿐이다. ‘시간의 감옥’이라는 비유는 선험적 차원의 시간이 창조적 차원을 결여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현재가 단지 과거의 결과일 뿐이라면, 현재가 미래에 의해 미리 확정되어 있다면, 시간이란 어떠한 의미도 관계도 사건도 창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은 많은 사상가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비가역적인 운동을 넘어서 해체되고 새롭게 창조되고 은유된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시간은 사건과 사건사이의 거리이거나 개별자와 개별자 사이의 거리라고 말한다. 이 간극, 이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예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과거의 경험을 현재나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의 상(이미지)을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험은 일종의 사건으로서, 이미지로 표현된 경험을 통해 미래의 경험이 현재로 호출되는 시간 여행과 같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비가역적 시간의 운동은 예술을 매개로 가역적인 운동으로 전환된다. 그것이 단지 하나의 가설일 지라도 시간과 이미지의 관계에 흥미로운 지점을 만든다. 어떤 이미지는 분명 절대적인 시간의 운동으로부터 비껴나갈 수도 있다.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서 벗어나 혹 그것인 가상적일지라도 자신의 존재 근거인 시간을 분할하고 관찰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그 지점은 당연히 일상을 벗어난 곳이며 정량화와 산술화의 시간이 아닌 은유와 상징의 시간으로서 ‘실존의 시간’이 머무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은 모든 경험을 비록 의식에 포착되지 않더라도 모든 잠재적 실재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보존한다고 보았다. 현실에서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잠재적인 것, 즉 삶의 존재론적 층위를 말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것을 프로이트식의 심리적 무의식과는 다른 존재론적 무의식이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현실성이란 그 잠재적 실재로부터 파생된 하나의 결과이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적 경험이나 지각 역시 그 잠재적인 것들을 토대로 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잠재적 실재’란 우리의 현재의 지각이 놓쳐버렸지만 여전히 우리 자신 안에 실재하고 있는 ‘과거 일반’이다. 의식화도 현실화도 되지 않은 채 잠재적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실재성’을 갖는다. 임주연이 포착하는 순간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매일 벌어지고 벌어졌던 사건들. 분명 실재하나 감정, 의식 어디에도 기억되지 않는, 그러나 실재하는 것. 들뢰즈는 인간의 활동가운데 예술만이 잠재적인 것에 육체를 부여하고 존재를 시간 속에서 사유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예술은 대상적 관계를 넘어 우리를 지속으로, 잠재적 실재로 도약하게 한다.
여기서 회화는 매우 유리한 지위를 차지한다. 시간의 끝에는 기원이 자리하고 기원은 기원인 까닭에 이름이 없다. 기원은 인식의 문제 너머에 있다. 그것은 그 이름 없음으로 인해 존재론의 차원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경험, 기억, 사건 무엇이 되었건 그것의 기원에 대한 것이라면 회화의 형식을 통한 재현은 존재론적인 운동을 드러내는 데 탁월하다. 이미지는 말하지 않는다. 눈앞에 강림(현현)할 뿐이다. 회화는 그 특유의 능력으로 망각된 기억, 잠재적 실재를 되살린다. 화가는 기원을 따라서 시간을 분석하고 실존한다. 살지(존재의 참여)않고서는 이미지는 구성된 것이고 순수한 허구(무의미)이다. 예술 그 자체는 무의미한 운동이지만 예술을 둘러싼 경계에서는 의미가 발생한다. 그러나 존재의 참여가 부재한 이미지는 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 의미는 안에서 밖으로 또 밖에서 안으로 반복되는 운동과정에 발생한다. 회화는 그러한 있음과 없음의 사이를 왕래하는 이미지의 장이다. 우리는 임주연의 이미지를 보고 임의의 과정을 통해 의미를 생성한다. 그것은 의식적이면서도 동시에 의식과 상관없이 벌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생산한 임주연 자신과도 상관없이 발생한다. 의식적으로 구성된 의미, 습관, 일상은 과거로부터 학습된 관행적인 삶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임주연의 분할된 또는 정지된 찰나는 그것과 반대편에 선다. 임주연은 화가들이 전통적으로 해온 것 이상으로 언어와 시간의 감옥을 벗어나 시간을 분할하거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을 넘어서 시간과 이미지를 살고자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은 의미와 관계의 창조하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실재와 존재의 본질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런 식으로 임주연의 이미지는 실존의 문턱(경계)에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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