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경: 흰 오리는 풀과 바람 사이를 지나며, 겹친 원 속에서 이동하는 태양처럼 싱싱한 딸기를 그린다
2024.10.16 ▶ 2024.11.15
2024.10.16 ▶ 2024.11.15
전시 포스터
청명한 하늘, 단풍의 빛깔, 강렬한 햇살과 선선한 그늘, 상쾌한 바람과 공기... 가을에는 유독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오감이 어느 계절보다 활발하게 작용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과 조형적 감각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기이다. 가을의 기억과 경험은 자연의 점진적인 변화를 기대하게 만들며, 시각은 심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감성을 자극한다. 익숙한 계절의 변화가 왜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을까. 자연의 순환적 질서는 작은 변화와 차이를 가시화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감응시키기 때문이다. 시각은 이렇게 단순한 감각의 차원을 넘어 다른 세상, 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열어줄 수 있다.
시각은 빛과 함께 존재한다. 빛은 색채와 형태를 발견하고 시공간을 경험하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 요소이다. 지선경 작가는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투영되는 빛의 이미지를 심미적으로 응시하고 포착하여, 조형적 색채와 형태를 입히고 양감을 만든다. 빛과 그림자는 조형적 착상의 출발 지점이다. 양면성을 지닌 채 공존하는 이 두 가지의 비물질적 요소는 물질적 대상의 존재와 부재를 정의한다. 이로 인해 양화(positive)와 음화(negative)의 이미지가 동시에 발생한다. 작가에게 빛은 양가적인 가치와 개념을 극명하게 노출시키는 요소가 되기도 하고, 어둠과 밝음, 존재와 부재, 음과 양, 물질과 비물질, 중력과 무중력, 투명과 불투명과 같은 양가적 가치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밝혀준다. 빛과 어둠은 상대적 시선으로 미세한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며, 작고 보잘것없던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명백한 의미를 지닌 것들에 모호함을 덧대기도 한다.
한편, 그림자는 역으로 빛과 대상을 주목하게 만든다. 빛-사물-그림자의 위상을 통해 그림자의 형성 조건과 배경이 되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상정할 수 있다. 채워진 형상과 빈 여백의 공간은 또 다른 조형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비움과 채움 간극 사이에서 상대적인 가치가 발생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낸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사물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속성이 제거된 순수한 추상적 표상이 된다. 물질적인 대상을 떠나 비물질적인 조형요소로 포착된 색채와 형태는 추상적 구성요소로 유기적인 구성과 연계의 지점을 찾아 나간다.
색채는 형태로 드러나고, 형태는 색을 구분한다. 형태와 색채는 여러 관계를 통해 시각적으로 작용한다. 확장과 수축, 전진과 후퇴, 상승과 하강, 상하좌우의 방향성은 형태와 색채의 관계에 의해 조형적으로 증감된다. 선의 모양과 굵기, 길이, 그리고 선이 시작되는 점과 나아가는 각도, 선의 개수와 연속성, 더불어 선에 적용된 색채, 이 모든 조건들은 선의 조형성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변수가 된다. 색채는 각각의 모든 형태가 지닌 조형성을 극대화한다. 스프레이 분사 기법으로 얇게 뿌려진 색채는 대기의 움직임이 가미되어 가볍고 경쾌하며 독자적으로 발광한다. 또한 색채의 단계적 변화(gradation)는 물감의 표면층과 질감을 자연스럽게 밀착시켜 색의 대비와 채도의 충돌을 완화한다.
색채와 형태의 조율은 다양한 물성의 재료와 수집된 오브제와 결합되어 한층 더 구체화된다. 투과되고 반사하는 빛의 정도에 따라 여러 차원의 층위에서 다채로운 색채와 동적인 형태가 만나 조절되고 반응한다. 벽면(바닥), 종이, 나무, 끈, 아크릴, 유리, 파이프, (타공)철판, 거울은 투영되는 빛의 정도를 달리하며 다각도의 입체적 공간감을 형성한다. 각각의 재료가 지닌 고유의 질감, 투과율, 반사율, 경도와 탄성의 차이는 빛을 이용한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연출한다. 거울을 통한 다른 시공간의 반사, 뿌연 레이어의 장막, 색유리, 조명의 색온도, 프레임의 효과는 다양한 시각 환경을 열어주며 능동적인 시점의 변화를 유도한다. 물질과 비물질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중심은 색채와 형태가 조응하는 추상적 조형성을 향하고 있다. 사각 평면의 조형적 요소를 주목하던 우리의 눈은, 평면(바닥 또는 벽면)이 배경이 된 공간 속 입체 구조물을 다면적으로 이동하며 바라보게 된다. 다양한 시선의 높이와 각도로 공간을 가로지르며 떠다니는 색채와 형태들은 물리적인 공간과 회화적 공간을 넘나든다. 이차원과 삼차원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이번 전시에서 형태와 색채는 각기 하나의 표현이자 상호작용하는 시각 언어이다. 모든 형태는 평면과 평면 사이를 구분하며, 추상적인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부여한다. 또한 조형적 요소는 주변과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존재하며 상호 영향을 미치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눈은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감각을 뒤쫓는다. 같은 모양과 크기의 반복,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질서, 위치, 방향. 간격, 모든 요소의 중첩과 반복은 패턴을 형성하며 조형적 율동감을 환기시킨다. 조화로운 균형의 상태뿐만 아니라 상충되는 요소들의 불협화음과 단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역동적인 움직임은 발생한다. '움직이는 시선'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행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창의적인 행위이다.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모든 조형적 요소들은 종합되고 구성되었다. 작가의 조형적 원리에 따라 우리의 눈은 단일 요소들을 주시함과 동시에 주변을 통합하여 관계를 규정하고, 일관된 하나로 전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시각은 시공간적 경험이며, 자연의 빛은 시공간을 역동적이고 가변적으로 변화시키는 요소이다. 이로 인해 시각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와 형태를 포착할 수 있고, 시공간의 생성과 소멸을 경험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각기 다른 시각 언어로 구사된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은 사실 시각 환경(삶의 진리 또는 자연의 질서)의 한 측면일 뿐이다. 시각 예술가들은 작업을 통해 삶을 매개하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의 삶의 태도와 사고가 작업의 내용과 방식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한편, 감상자는 예술작품을 통해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 느끼지 못하는 것, 상상하지 못하는 것,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나에게 없는 내가 몰랐던 감각을 예술작품에서 발견하고 고양시키며 감동한다. 시각예술은 결코 시각의 영역에만 한정할 수 없다. 이미지로 구현된 시각예술은 시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조형적 질서는 작가가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시각 언어가 되며, 조화롭게 순환되는 자연의 질서와 조형예술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질서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은, 예술적 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충분히 온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황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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