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광호
맨드라미 2024, Oil on canvas, 227.3x181.8cm
나광호
숲 2024, Woodcut, Ink on Korean paper mounted on hanging scroll, 110x162cm
나광호
브로콜리, 냉이, 바질, 상추 2023, Silkscreen, Acrylic on arches paper, 105x140cm
나광호
질경이 2023, Plantain silkscreen, Acrylic on arches paper, 80.7x121cm
나광호
천인국 2023, Woodcut, Ink on arches paper, 90x106cm
나광호 작가의 식물도감 시리즈는 2021년, 산청의 경남예술창작센터에서 그 자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작가는 식물을 종류별로 조사하고 담아내는 이 시리즈가 고향인 경기도 부천의 풀숲, 방학 때마다 들리던 강원도 할머니 댁의 풍부한 자연환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의 그는 곤충도감을 보고선 개미를 직접 잡아 손등 위로 기어다니게 올려둔 채로 그 모습을 관찰하거나, 식물의 잎을 손으로 쓰다듬고 만지며 촉감을 느끼는 것을 즐기는 아이였다. 작가의 기억 속에 무의식적으로 편재해있던 유년 시절 자연과의 추억들이 그를 이 작업으로 이끈 것일까.
작가가 이전까지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던 2021-2년은 그 스스로 작업에 있어 변화의 필요성을 필연적으로 느끼던 시기이기도 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팬데믹과 함께 산청의 레지던시에 고립된 작가의 일상은 평소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성실히, 바쁘게 지내오던 그의 나날들에 타의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전례 없던 공포에 숨 죽은 듯 세상이 고요했던 시기 산청을 서성이던 작가의 발아래에는 무성하게 자라난 질경이들이 밟혔다. 산책을 한 뒤엔 옷에 도깨비풀 가시를 한가득 묻혀오기도 했다. 산청의 레지던시에 고립된 채 보낸 느린 시간들은 작가가 평소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바라보게 했다. 그 순간은 마침 나광호 작가를 대표하던 명화를 활용한 작업들을 긴 시간 이어오던 끝에, 그 스스로의 작업에 있어 전환의 순간이 왔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변화가 나타났던 첫 작품은 산청에 널려있던 질경이를 담은 것이었다. 환경의 변화는 그의 시선을 발밑으로 이끌었다. 앞만 바라보며 숨 가쁘게 달려가던 작가의 시선이 느리게 아래로 향한 순간이었다. 시작은 우연히 발견한 주변의 것이었지만, 이후 풀과 산이 있는 곳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대상은 사람의 손길로 가꿔진 것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무성히 자라난 이름 모를 풀과 식물들이었다. 풀더미를 촬영하고 마구 뒤섞여 뭔지 모를 식물의 이름을 일일이 검색하여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과 그것을 발견한 장소를 그림에 함께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식물도감'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작가는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가까웠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림을 그릴 때면 느껴지던 주변인들의 인정과 칭찬에 힘입어 미술대회에 나가 주로 입상을 했던 소재들 역시 식물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담아내는 풍경화를 그릴 때 작가는 스스로 차별화를 노리며 클로즈업 된 대상의 모습을 주로 그리는 것을 통해 수많은 대회에서 입상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처럼 전략적이고 세밀한, 성실한 태도까지 더해진 작가의 성향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유화, 아크릴화, 수채화, 실크스크린, 목판화 등 다양한 기법을 능숙하게 넘나든다. 한 작품 안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기법을 함께 사용하는 일이 허다하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150호 유화 작품은 리넨 위에 유화가 두텁게 올라간 마티에르로 평면의 회화에 깊이를 더하면서도 형태를 잃지 않은 채 무성한 풀숲의 형상을 재현해 내는데,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까이서 보면 뭉게진 팔레트 같아보일 정도로 추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구도나 형태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반면 아르쉬지, 하네뮬레지, 한지 등 각종 종이 위에 잉크와 아크릴로 채색을 더하는 작품들 같은 경우 사진으로 혼동할 만큼 매우 사실적인 이미지에 식물의 질감을 살리고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함으로써 빛이 길어지는 시간대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 집중한다.
주목할만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주목으로 발에 치이는 길가의 식물이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의 손길을 거쳐 계획적으로 가꾸어진 정원이 아니라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자라난 발밑의 풀들을 담아내었기에 작품의 구도나 시점 역시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향해있어 그것을 바라보았던 최초의 작가의 시선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이름 모를 존재, 그저 잡초로 치부했던 낯선 식물의 모습이 작가의 작품에서 전면에 가득 차 그것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작가는 화가를 꿈꾸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현재 그것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나날들이 자신에게는 유토피아와 같다고 말한다. 나광호의 유토피아는 가상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한다. 작가의 작품 속 발아래에 피어난 잡초들의 모습은 일체의 왜곡이나 환상을 담아내지 않은 지극한 현실의 모습이지만 모든 것이 나오고 되돌아가는 흙으로부터 스스로 자라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반복적이고 평이한 그의 나날들 역시 그에게는 성실한 하루들이 모여 굳건히 쌓여진 유토피아의 세계인 것이다.
"상상과 현실이 마주하는 것을 초과 실재라고 하는데, 살아가면서 그 오류의 폭이 사라지는 실험을 하고 있어요. 작업과 삶에서 이 모든 것이 일치되는 순간을 꿈꿔요. 물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늘 노력하고 경험합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2022년 케이옥션과의 인터뷰에서 작가의 말을 빌리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존재감이 없지만 알고 보면 너무도 흔히 존재하는 풀 무더기에 주목하는 작가의 식물도감이 오래도록 지속되어, 발아래 성실히 피어난 그것들의 시간이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한 유토피아로 닿을 수 있길 바라며.
■ 태병은
1979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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