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헌
Alone in the viewer oil on canvas, 146x112cm, 2009
노충현
강당 oil on canvas, 80x80cm, 2010
노충현
꽃 oil on canvas, 72.5x72.5cm, 2010
노충현
untitled oil on canvas, 72.5x72.5cm, 2010
지우는 것, 채우는 것
1. 어느 날이었다. 일을 핑계로 삼아, 삼청동과 인사동을 배회하며, 이곳저곳 갤러리를 탐방했다. 사진도 있었고 설치도 있었고, 섞인 것도 있었다. 전시는 언제 어느 때고 하염없이 열리는구나, 객쩍은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시각적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저기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누구의 어떠한 그림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저기에 그림이 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는 고민에 잠기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그림은 괄호가 쳐진 존재였다. 누구의 그림이고, 어디에 걸린 그림이고, 어느 잡지에 어느 이론에 나오는 그림이고 하는 식이었다. 요즘에는 얼마에 팔리는 그림이라는 말도 넣어야겠다. 이러는 와중에 ‘그림’은 온데 간데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림’ 자체는 생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회화 그 자체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했다. 물론, 안 한 것은 아니다. 비평을 할 때가 많았으니까. 그때마다 예전에 읽었던 미학과 이론을 되새기며, 회화작업을 읽어보고 해석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회화를 정면으로 만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2. 하기야 요즘의 이론과 현대의 역사도 회화를 찬밥으로 다루긴 한다. 옛날에는 사진과 영화의 등쌀에 못 이겼고, 지금에는 매체와 기술의 포격에 못 이긴다고 할까. 물론, 그때마다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내긴 했다. 예전에는 추상표현주의가, 최근에는 신표현주의가 나름의 ‘양식’을 개척하며, 회화의 표현력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지난 일이다. 물론, 키틀러가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다고 과거의 매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아 여전히 자신의 얘기를 한다. 그러나 같은 말이라도 자리가 달라지면 의미는 일변한다. 게다가 지적한 대로 표현의 잠재력은 극히 소모된 상태, 난관에 난관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능전환이고, 자리바꿈이다. 회화가 여러 매체의 주석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장장 이천여년 동안 축적된 시각적 표현의 보고가 아닌가.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물 같다고 하면 심한 표현일까.
3. 게다가, 세상은 점점 급격하게 변해간다. 무엇보다 위에서 지적한 매체가 주범이다. 본말전도라고, 세상을 전달하던 것이, 세상 자체가 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체가 토해내는 기호와 정보는 현실을 밀어내며, 서로가 서로를 뜻하게 되었다. 캔버스 하나로는 이 현실은 너무나 복잡하다. 그리고 복잡한 만큼 지각의 강도도 너무 세다. 눈과 코를 찌르고, 귀와 살을 때린다. 20세기초 짐멜은 현대인이 대도시 때문에 항상적인 마비상태라고 분석했지만, 21세기의 현실은 그 이상이다. 인간이 아예 기술매체에 동화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뭐랄까, 오늘날 신인류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사람들 눈에 장착된 것이다. 그래서 ‘사진적 시각체제’는 상황을 안이하게 진단하는 용어처럼 보인다. 더 큰 게, 더 센 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4. 이제는 그린버그도 제들마이어도 없다. 비평가도 기획자도 예술의 동력을 지원하지 못한다. 예술 내부의 동력은 대부분 상실됐다. 그나마 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던 국제기획전의 위상을 생각해 보라. 그 자리는 페어와 경매로 넘어간지 오래다. 결국 현재는 자본이 동력이다. 그것의 손길은 눈에 보이게 화면 구석구석 손길을 미친다. 페어와 경매의 결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림과 전시를 생각해 보라.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신통한 재주라도 있는 것일까. 재기발랄할 대학생조차 시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실험과 상상을 가격과 매출로 맞바꾼 것이다. 그렇게, ‘포트폴리오’는 ‘프로모션’으로 갈음된다. 아니, 그것들은 동의어로 보는 게 맞겠다.
5. 그래서, 그래도, 묻는 것이다. 오늘날 그림에 의미가 있느냐고,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그림’과 ‘의미’의 짝패라니, 어느 골동품 가게에서나 발견할 것만 같다. “진리는 진부한 것이다.”(초민) 현실을 응시하며, 매체를 의식하고, 방법을 고민하는 것. 달라진 상황을 체념하지 않고, 묵묵히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 있을지 없을지 모르나, 그래도 해 보는 것. 노충현과 이재헌이 그렇다. 물론, 둘의 방식은 다르다.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을 하는 것은 같지만, 그들의 완성된 작업은 차이가 완연하다. 한 쪽이 대상을 밀착해 들어가며 적절한 재현의 방법을 찾아내려 한다면, 한 쪽은 대상에 멀어져가며 형태를 무너트릴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찰한다. 사진을 전제하지만, 포토리얼리즘처럼 사진에 매몰되지 않고, 끝끝내 현실을 부여잡는다. 그것은 역설적인 공통점일 것이다.
김상우(갤러리킹 비평/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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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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