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의 빛∣The light of consciousness
2010.10.14 ▶ 2010.10.31
2010.10.14 ▶ 2010.10.31
허황
가변의식 03330F-2 mixed media on canvas, 90.9x72.7cm, 2003
허황
가변의식 02100M-1 mixed media on canvas, 162.2x97cm, 2002
허황
가변의식 02100M-2 mixed media on canvas, 162.2x97cm, 2002
허황
가변의식 0820F-2 mixed media on canvas, 72.7x60.6cm, 2008
허황
가변의식 05615F-2 mixed media on canvas, 65.1x53cm, 2005
허황
가변의식 05615F-5 mixed media on canvas, 65.1x53cm, 2005
허황
의식의 빛 1050F-1 mixed media on canvas, 116.8x91cm, 2010
허황
의식의 빛 1050F-2 mixed media on canvas, 116.8x91cm, 2010
허황
의식의 빛 1050F-3 mixed media on canvas, 116.8x91cm, 2010
허황
의식의 빛 10100F-1 mixed media on canvas, 162.2x130.3cm, 2010
허황
의식의 빛 10100F-2 mixed media on canvas, 162.2x130.3cm, 2010
허황
의식의 빛 10300F-1 mixed media on canvas, 290.9x218.2cm, 2010
‘텅 빈 충만’과 (의식의 빛)
지난 1972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 가변의식(可變意識)을 출품한 이래 허황은 4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직 한 가지 테마로 작업을 일관해 왔다. ‘가변의식’이란 말 그대로 “세상 만물은 변한다.”는 전제 하에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萬物流轉:Panta Rhei)”는 명제는 잘 알려져 있듯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BC 544?-484)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이다. 그는 또한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하여 ‘만물유전’의 사고를 보다 확실하게 밀고 나갔다. 바로 여기서 1960년대의 저 유명한 플럭서스(Fluxus)란 미술운동의 이름이 유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명제만큼 허황의 작품세계를 잘 대변해 주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는 말은 곧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는 풀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데, 지난 40여 년에 걸친 허황의 작품세계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거기에는 미세한 변화의 흐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미세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허황 작업의 핵심이다. 그의 작품은 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변화가 있고, 변화가 멈춘 것 같으면서도 다시 변화가 시작되는 강물의 흐름과도 같다. 그 변화의 가능성(可變)을 어떤 심적 상태(意識)로 바라보고 이를 포착해내느냐 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관건인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작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작업의 극점(極點)이 존재한다. 재료라고 하는 물질의 존재와 그것을 다루는 작가의 심적 상태가 완전히 합일을 이루었을 때, 그것을 낚아채는 순간이 바로 이 극점인 것이다. 허황은 천연의 돌가루인 석소(石塑)라는 재료를 사용한다. 그는 15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이 재료를 사용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재료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은 이 재료의 성질이 잘 드러났느냐의 여부에 따라 작업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에 재료의 성질은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석소는 물에 푸는데, 물에 담가놓는 시간에 따라 끈기, 곧 점성(黏性)이 달라진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원반의 다양한 모습은 바로 이 점성에 기인한다 하겠다.
허황은 석소가 물에 담가놓은 기간에 따라 녹는 정도가 다르다는 점에 착안하여 작업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석소는 보통 물에 담가놓은 지 3-4일 정도면 거친 상태가 되지만, 10-15일 정도면 곱게 풀린다. 이러한 재료의 가변성은 그의 작품에서 매우 미묘한 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다. 걸쭉한 것과 된 것은 서로 다른 질감과 원반의 모양을 낳는데, 그는 우연에 몸을 맡기듯이 캔버스에 석소 죽을 들이 붓는다. 걸쭉하게 풀린 석소 죽은 캔버스의 표면에 닿는 순간부터 자신의 영역을 찾아 퍼져간다. 이 순간은 작가가 개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지속의 시간이다. 그것은 작가가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으로 ‘사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無爲自然), 즉 자연의 이법(理法)에 인간의 ‘오염된’ 몸을 맡기는 순간인 것이다. 그의 작품의 오랜 명제인 (가변의식)은 곧 그러한 변화를 지켜보는 마음의 상태를 이름이니, 노자의 (道德經)에 나오는 말대로 ‘도법자연(道法自然), 곧 물(物)과 나의 의식이 합일된 상태를 일컬음인 것이다.
이처럼 허황의 작품세계는 사물 곧, 대상을 다루고 조작하는 과학적 시각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동양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의 것이 서양의 근대를 떠받쳐 온 원리라고 한다면, 뒤의 것은 전통적으로 동양인들의 사고를 지배해 온 오랜 관습이다. 불교에서의 방생, 한국의 전통 조원술(造園術)과 취락구조 등은 이런 사고의 소산인 것이다. 허황의 작품세계가 이러한 동양의 사유체계에서 발아된 것임을 알 때, 우리는 그의 작업이 매우 독창적인 것이며 아울러 주체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캔버스의 밑에서 우러나오는 연한 청색, 적색 혹은 녹색의 아련한 기미는 전통 창호에 비친 부드러운 달빛을 닮았고, 그 위에 덮인 유백색의 뽀얀 피부는 백자의 투명한 살갗을 연상시킨다. 일찍이 조셉 러브는 그런 그의 작품을 가리켜 “허황의 흰색은 안료의 색이 아니라 정신의 색”이라 하였으니, 이는 진정으로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수고에 값하는 치하의 말일 것이다.
허황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오랫동안 작품의 명제로 사용해 온 (가변의식)의 시기를 마감하고, 이제부터는 (의식의 빛)이란 명제를 사용하고자 한다. 어떤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세상이 하얗게 보이듯이, 후두암이란 병을 얻은 후 2년간에 걸친 투병생활은 그에게 사물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물질보다는 빛에 착안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게 될 그에게 있어서 이번에 발표하는 (의식의 빛) 시리즈는 후기 (가변의식)을 여는 단초가 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전시가 될 것이다. 허황은 돌아가신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이란 말을 좋아한다. ‘가득 차되 비었다’는 이 말은 어떤 경지를 이름인가. 이 모순. 이 한 올의 터럭조차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초(超) 논리는 둥근 형태들이 유백색의 뽀얀 캔버스 피부를 사이에 두고 뚜렷이 떠오르는가 하면 가라앉기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이름이니, 말하지 말고 그냥 보고 즐기는 편이 차라리 좋지 않겠는가.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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