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발 킴
블랙패세지 Ink on Paper, 100x60cm, 2010
다발 킴
유동 Ink & Color Pencil on Paper, 95x100cm, 2010
다발 킴
화려한 행렬 Ink on Paper, 150x100cm, 2010
다발 킴
자화상 Ink on Paper, Fur, 80x120cm, 2010
다발 킴
21C 대동여지전도 Collage, Ink on Paper, 155x135cm, 2010
다발 킴
21c 말 Color Pencil, Ink on Paper, 140x100cm, 2010
다발 킴
사막의 풍경 Black Pen, Acrylic Color on Canvas, 73x91cm, 2010
다발 킴
21c 수선전도 Leather, Ink on Paper, 105x75cm, 2010
다발 킴
고대유물-양배추의 변이 Ink Pen on Antique Map(100 years old), 50x60cm, 2010
다발 킴
고대유물-뉴바디랜드 Ink on Paper, 78x45cm, 2010
다발 킴
고대유물-닭의 변이 Ink on Paper, 65x55cm, 2010
다발 킴
19c 자화상 Black Pen, Acrylic Color on Canvas, 73x91cm, 2010
무의식의 박제사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방부 처리하여 보존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이(곤충)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은 미세한 모필로 그릴 수 있는 동물, 물 주전자를 깨트리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남미의 환상 리얼리즘 작가 보르헤스가 인용하고(보르헤스는 일종의 괴물 백과사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의 서론에서 재인용한, 고대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 수록된 동물 분류법 항목이다. 여기서 푸코는 지시 대명사, 이를테면 그것에 대한 사고가 절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더 이상 세계, 사물, 대상을 지시할 수도, 명명할 수도, 호명할 수도 없다. 도대체 그것이 어떤 동물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이 동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분명 종강항목으로 나뉘는 생물분류법을, 엄밀하게는 서양의 자연과학의 계보에서 유래한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 체계를 길잡이 삼아 대상을 지시하고 명명하고 호명한다. 그렇다면 서양의 체계와 동양의 체계는 어떻게 다른가. 왜 우리는 동양의 체계 대신 서양의 체계를 물려받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동양에 그런 체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힐 수 있었는가.
이로부터 푸코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류, 체계, 지식은 필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우연적이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토대 위에 축조된 것이며, 불가피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성을 부여받은 모든 체계는 다른 체계를 억압한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며(그래서 동양의 체계는 우리에게 잊힐 수가 있었다), 따라서 여기에는 헤게모니의 문제, 권력의 문제가 끼어든다. 인식의 문제며, 인식지도가 어떻게 그려지는가의 문제며, 인식지도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의 문제다. 만약 이처럼 체계가 우연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나도 나만의 인식지도를 그릴 수가 있게 된다. 그렇다고 거창한 무엇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가 세상을 보는 나만의 프리즘을, 세계관, 자연관, 우주관을 갖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프리즘을 갖게 된다면, 우리 모두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가 가능해질 것이다.
다발킴의 그림은 바로 이런, 인식지도 그리기를 예시해준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려놓은 인식지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인식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식지도 그리기는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닌데, 이전에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왔거나 잊힌 루트들, 이를테면 끊기거나 쓸려나가거나 함몰된 길들을 복원하는, 그동안 무성한 덤불에 가려 잊힌 샛길들을 발굴하는 토목공사에 가깝다. 작가의 그림이 왠지 자연사박물관을 연상시키고, 시계의 침을 과거로 되돌려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작가의 그림에선 심지어 로봇마저도 미래의 비전을 열어놓기보다는, 왠지 폐기된 것 같은, 덜거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깡통로봇을 연상시킨다.
다발킴은 근작의 주제를 잠재된 것들의 귀환이라고 부르는데, 이 주제는 반드시 근작에만 한정된다기보다는 사실상 작가의 전체 작업을 관통하는 전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주제는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프로이트의 전언을 상기시킨다. 그 주제와 전언은 서로 통하는데, 잠재된 것은 곧 억압된 것이다. 잠재된 것은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것이 잠재적인 지층으로 잠수한 것. 그렇다면 그 억압의 계기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관건이다. 이 억압의 계기는 개인과 제도와의 관계로부터 생겨나는데, 거칠게 말하자면 욕망을 실현하려는 개인과 그 욕망을 통어하려는 제도의 기획이 서로 부닥치는 것. 이렇게 해서 잠재의식으로, 무의식으로 숨어들게 된 것이 말하자면 야성, 야생, 본성 등 하나같이 반제도적이고 반문명적인 기질들이며 성향들이다. 그리고 이 욕망과 더불어 그 욕망을 표현하고 표출하게 해주는 언어형식도 함께 억압된다. 말하자면 몸말 같은,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사고 같은, 자연언어 같은, 그리고 상상력 같은.
한편으로 융은 잠재의식의 계기를 억압에서보다는 망각에서 찾는다. 세대를 거듭하는 동안 까마득하게 잊힌 것들, 그렇게 잊혔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으로 침전된 것들, 그래서 왠지 모르게 끌리고 친근한 것들, 바로 집단무의식이며 원형이다. 프로이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도와 문명의 수혜자인 현대인은 원형을 상실하면서 그 원형을 표상하는 언어형식도 덩달아 망실하게 된다. 그리고 예술은 이처럼 억압된 언어, 잊힌 언어, 망실된 언어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과 관련이 깊고, 이 프로젝트를 지상과제로 삼은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이다. 초현실주의자의 프로젝트는 한마디로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지층 속에 잠자고 있던 언어형식을 의식의 층위로 발굴하고 캐내는 일이며, 이로써 이전에는 지시할 수도 명명할 수도 호명할 수도 없었던 것들을 비로소 지시하고 명명하고 호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의 지층으로부터 캐낸(무의식을 의식의 층위로 불러오기 위한) 언어형식이 사물의 전치,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법, 눈속임회화기법, 그리고 의식의 흐름기법(마르셀 프루스트에 연유한)이며, 이 모두는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발킴의 작업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사물의 전치는 이질적인 사물들을 하나로 조합해 예기치 못한 의미를 열어 놓는 방법이다. 머리 따로 몸 따로 인 반인반수, 포유류의 몸통과 새머리와의 결합, 펼쳐진 고지도를 실개천처럼 관통해 흐르는 실핏줄, 인체 해부도를 연상시키는 고지도, 포유류의 몸통을 대신한 고지도, 포유류의 다리를 대신한 카트의 바퀴, 알 수 없는 기계부속으로 이뤄진 동물의 몸통, 산수와 지형으로 변태되는 동물, 산 정상인 양 좌변기를 딛고 선 사슴 등 작가의 그림에는 상식과 합리 그리고 논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위반하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관계와 결합이 이뤄지고 있다. 그 과정에 자동기술법과 자유연상법, 그리고 의식의 흐름기법이 끼어든다. 즉 그 관계와 결합에는 어떠한 논리적 개연성도 없다. 다만 손 가는 대로, 의식이 이끄는 대로 그릴 뿐. 엄밀하게는 그린다기보다는 그려진 것.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고,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인 것. 하나를 그려 넣으면 다른 하나가 덧붙여지고, 하나의 이미지 위에 또 다른 이미지가 포개지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은 무한정 부풀려진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모든 그림은 그 자체 완결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무한정 부풀려지는, 결코 끝날 것 같지가 않은 과정의 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미는? 의미는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가 않다. 다만 의식을 따라 흐르면서, 의식이 정박하는 순간으로부터 매번 새로이 생성되고 수정되고 갱신되는 것. 의식이 흐르는 것처럼 의미도 흐른다.
그렇게 땅 속에 머리가 박혀 허공에 다리를 버둥거리는 사람들(여자들?)을 뒤로 한 채 한 무리의 동물들이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다. 동물들? 그것들은 다만 동물처럼 보일 뿐, 동물이라는 선입견을 겨우 재확인시켜줄 뿐인 알 수 없는 어떤 종족을, 부류를 연상시킨다(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일단 잘려나간 목을 다시 이어 붙인 흔적이 여실한, 무슨 박제 같고 좀비들 같다). 그 일단의 종족들이 아마도 그 무리의 우두머리 격이지 싶은, 자유의 여신이나 잔 다르크를 연상시키는 반인반수의 인도를 받고 있다. 엑소더스? 출애굽? 노아의 방주? 혹성탈출? 인류의 멸망 이후 신대륙을 찾아 나선 살아남은 종족들? 현실에 대한 풍자? 인간의 삶을 동물에 빗댄 우화? 신화? 묵시록적 비전? 문명에 대한 경고?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모두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이 중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혹 의미가 그렇게 중요하거나 결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무의식의 부름을 따라, 의식이 이끄는 대로 그려진 그림이 아닌가.
이 일련의 그림들은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연상시킨다. 아무데서나 시작할 수 있고 아무데서나 끝낼 수 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수한 샛길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샛길들마다 다른 결론으로 이끌지만, 그 다른 결론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허다한 관계들이 있을 뿐, 그 다른 관계들을 한곳으로 수렴해 들이는 소실점, 정점, 전제, 주제에 해당하는 것은 없는. 작가는 이렇듯 있을 법하기도 하고 있을 것 같지 않기도 한, 친숙한 것 같기도 하고(알만한 모티브들) 생소한 것 같기도 한(그 모티브들의 조합과 배열과 관계에 연유한 알 수 없는 서사) 우화(?)를 그린다. 오리무중인 의미와 비현실적인 비전을 마치 현실인 양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정치하게 묘사하고 재현하는 것에서 소위 눈속임 회화기법을 전용하고 있는 것이다.
진작부터 한국현대미술에는 어떤 여백이 남겨져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초현실주의 혹은 환상주의가 그것이다. 삶이 권태롭거나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 흔히 초현실과 환상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되어준다지만, 아마도 그동안 우리네 살림살이가 삶이 권태롭거나 무의미하다고 느낄 만큼 여유롭지가 못했던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생각 속으로 숨는 것, 생각을 공 굴리는 것,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생각의 논리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생각 속에서 또 다른 자기와 만나는 경험은 어쩌면 현실에 밀착된 삶을 통해서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볼 때, 다발킴의 그림은 지금까지 한국미술계의 생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비전을 예시해준다. 그 다른 종류의 비전은 미래를 열어놓고 있다기보다는 과거로부터 캐내진 것이며,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형태로 잠자고 있던, 혹 억압되어졌던 내면의 지층들, 상상력의 지층들로부터 발굴된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발굴된 조각들을 짜깁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식의 인식지도를 그려나간다.
온갖 이질적인 계기들이 하나로 짜깁기된 인체와 동물 그림들, 여기에 털이 여실한 박제동물의 가죽과, 그 표면에 풍경 같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무슨 지도나 되는 양 크랙을 따라 지명을 문자 텍스트로 표기해 놓거나 한 동물의 두개골, 그리고 각종 고지도와 같은 오브제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은 유사 고고학, 유사 박물학, 유사 자연과학을 연상시킨다. 과거와 현재, 자연과 문명을 비롯한 온갖 이질적인 계기들을 하나로 짜깁기해 놓는 것인데, 이처럼 짜깁기한다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방법론을 지시하는 꽤나 적절한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생각의 조각들, 무의식의 편린들을 짜깁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의외의 어떤 비전을 열어놓고 예기치 못한 의미를 생성시키는 작가에 대해선 아마도 일종의 무의식의 박제사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론 마구 흩트려진 퍼즐처럼 뒤죽박죽인 세계의 조각들을 짜 맞추는 어떤 신비주의자와도 무관하지가 않는, 그런.
1975년 출생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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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립월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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