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한
우리시대신화 oil on canvas, 80.3×116.7㎝, 2010
정영한
우리시대신화 oil on canvas, 80.3×116.7㎝, 2010
정영한
우리시대신화 oil on canvas, 72.7×53.0㎝, 2010
정영한
우리시대신화 oil on canvas, 116.7×72.7㎝, 2010
정영한
우리시대신화 oil on canvas, 116.7×80.3㎝, 2010
착시가 만들어낸 기억 속 가상의 풍경
전준엽(화가)
서양 미술이 획기적인 변혁과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것은 ‘보는 것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데 있었다. 대략 14~16세기쯤 일이다. 이 시기를 역사학자들은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서양인의 세계관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면서 생긴 일이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사람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일어나고, ‘어떻게’ 변해가며 ‘무엇’이 생겨나는가 하는 것을 이성적으로 관찰하고 증명해내면서 과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과학의 시대에 미술가들도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보다 실감나게 화폭에 옮길 수는 없을까 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원근법이다. 원근법의 발명으로 화가들은 평면에다 공간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평면 회화 속의 공간 출현은 모든 사물을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발전시키게 된다. 명암에 의한 입체감, 표면의 느낌을 실감나게 하는 질감, 크기의 정도를 가늠하는 양감, 그리고 소실점을 이용한 구도 등이 그것이다.
보이는 세계를 똑같이 재현해보겠다는 욕구를 과학적으로 실현시킨 것이 사진이다. 사진이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감정이라든지 무의식, 이념 또는 과학 같은 것이었다. 서양 미술사에서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의 바다에는 바다가 없다. 회화의 ‘현실 세계 재현’이라는 고유 영역을 통째로 접수해버린 사진은 20세기 들어 회화가 개척해낸 새로운 영토에도 군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회화와 사진이 화합의 장으로 찾아낸 것이 ‘극사실주의’다. 1960년대 말 미국에서의 일이다. 이 중 ‘포토리얼리즘’은 캔버스에 감광제(사진의 감도를 높이기 위해 쓰는 재료)를 발라 이미지를 직접 프린트하고 붓이나 에어스프레이로 다듬는 기법으로 현재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사진과 회화가 타협점을 찾아 절충한 방식이지만 사진에 회화가 종속되는 분위기가 강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실감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사진과 회화는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엇박자를 내는 부분이 있다. 공간감의 표현이 그것이다. 사진은 회화만큼 공간의 깊이를 연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정영한의 회화는 이 지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사진의 평면성과 회화의 입체성을 교묘하게 맞물려서 착시 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것이다. 즉 회화의 기본 방법인 붓을 사용하여 그리되 그린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처리하여 사진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회화 기법으로 찍은 사진’이라고나 할까.
정영한의 회화 배경에 등장하는 것은 풍경이다. 도시 풍경이거나 바다 풍경이다. 최근에는 바다 풍경이 주류를 이루는데, 다양한 표정의 바다를 그리고 있다. 맑은 날의 잔잔한 바다에서부터 태양이 빛나는 찬란한 바다, 또는 폭풍을 예감하는 불안한 바다까지 다양하다. 성난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가 하면 포말로 부서지는 부드러운 파도가 싱그러운 모래 해변을 적시기도 한다. 즉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바다의 일반적인 얼굴이 거의 다 등장하는 셈이다. 그런데 정영한의 바다에는 표정이 없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비릿한 바다 내음도 없으며 요즘 같은 폭염을 씻어줄 만한 시원함도 느낄 수가 없다. 박제된 바다인 것이다. 마치 디지털 화면으로 보는 바다 풍경 같다. 실제로 정영한은 바다를 그리기 위해 바다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그린 바다는 관념의 바다인 셈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머릿속에 담아둔 바다, 그것이다. 그는 인터넷 상에 떠도는 바다의 이미지를 채집해서 자신의 이미지로 활용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진에서 보는 것 같은 바다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린 바다에는 공간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표정도 없다.
정영한은 왜 인화된 사진 효과를 내기 위해 힘들여 전통적인 그리기 기법을 고집하는가. 그것은 서양 회화가 500여 년 동안 구축해온 착시 효과에 대한 자기반성 같은 것이다. 평면 회화가 그동안 연출해낸 공간은 모두가 허구 세계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바다를 실감나게 그려도 그것은 평면에 나타나는 이미지에 지나지 않으며, 허구 세계일뿐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진이 갖는 정직한 평면성을 힘들여 그려내는 것이다. 허구 세계는 아무리 익숙한 이미지라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낯설다. 이러한 낯섦을 정영한은 철저한 회화 기법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사진의 차가운 이미지로 그려낸 평면화된 바다 위에 입체감과 운동감을 극대화시켜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그것이다. 대부분 꽃을 그려내는데, 강렬한 색채와 명암으로 실제감을 살리고 있다.
그 꽃들은 확대됐거나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때로는 분분한 낙화가 되어 바다 위를 날아다니기도 한다. 마치 바다 풍경이 인화된 대형 사진 위에 꽃이 둥둥 떠다니거나 꽃잎이 풀풀 날아다니는 같은 착시 효과를 준다. 이 두 개의 이미지 사이에서 우리는 현실 세계가 아닌 낯선 세상을 보게 된다. 분명히 낯익은 현실의 익숙한 이미지들인데도 말이다. 이를 통해 정영한이 도달하고 싶은 것은, 회화가 연출하는 세계는 착시에 의한 허구의 세계이며,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인터넷 공간과도 같은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1971년 대구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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