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illness is Bliss…
2010.11.04 ▶ 2010.11.28
2010.11.04 ▶ 2010.11.28
박항률
기다림 Acrylic on canvas, 90.9x72.7cm, 2010
박항률
새벽 Acrylic on paper, 39cm, 2010
박항률
새벽 Acrylic on paper, 39cm, 2010
박항률
기다림 Acrylic on canvs, 72.7x60.6cm, 2010
박항률
기다림 Acrylic on canvas, 53x45.4cm, 2010
박항률
기다림 Acrylic on canvas, 72.7x60.6cm, 2010
박항률
기다림 Acrylic on paper, 73.5x43cm, 2010
박항률
기다림 Acrylic on cav, 90.9x72.7cm, 2010
박항률
기다림 Acrylic on canvas, 100x80.3cm, 2010
박항률
꽃 그늘 Acrylic on canvas, 72.7x60.6cm, 2010
박항률
꿈 Acrylic on canvas, 53x45.5cm, 2010
박항률
꿈꾸는 달 Acrylic on paper, 72.8x54.7cm, 2010
고요의 動學 ―박항률의 그림세계
'미'의 역사는 있지만 '추'의 역사는 없다. '추'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추'는 불쾌함과 끔찍함과 역겨움 때문에 반드시 없어져야 할 것으로 시작에서부터 그 존재가 부정되었던 까닭이다. '추'는 오로지 '미'의 부정으로서만 그 존재의 의의를 갖는다. 반면에 '미'는 진리고, 도덕적 착함이고, 숭고한 그 무엇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미'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끊임없이 논의되고 그 새로운 정의가 보태져왔다. 그러나 정작 '미'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은 어렵다. 그것은 미적 환희를 안겨주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반면에 '추'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추'는 '미'가 아닌 것,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이다. '미'는 절대적이고 '추'는 상대적이다. '미'는 내재적 심미성의 척도 안에서 제 규준을 찾는다. '미'와 '추'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미'가 조화와 균형, 대칭성, 그리고 형식의 완결성에서 나온다면 '추'는 그 반대의 것이다. 그러니까 부조화와 불균형, 비대칭성, 형식의 결손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추'는 '미'의 결핍이나 부재가 아니라 '미'의 지옥이다. 비례와 조화라는 미의 규준에서 완전히 벗어난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형체를 갖지 못한 채 뭉개진 얼굴들은 혐오스럽고, 온갖 뱀들이 꿈틀대는 머리를 가진 목 잘린 메두사를 그린 루벤스의 「메두사의 머리」(1618)는 기괴하고, 동물의 얼굴을 한 여자의 누드를 그린 대니얼 리의 「배심원단 n.4(여우의 영혼)」(1994)은 불길하며 섬뜩하다. 이들 그림들이 불러일으키는 징그러움과 섬뜩함은 바로 '미'의 지옥이 우리 영혼에 일으키는 반응들이다. 그러나 '추'에 숨길 수 없는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추'의 매혹에 불가사의하게 이끌린다. 화가들이 그토록 끈질기게 괴물들과 역겨운 풍경들을 그려낸 것은 그 때문이다. 한 화가의 회화에서 우리는 '미'를 떠받치는 형태소(形態素)로서의 우아한 질서와 척도를 찾아낼 것이다.
박항률의 그림에서 내향성은 숨길 수 없는 두드러진 표지다. 내향성은 안으로 작용하는 심리생물학적인 기질이다. 양의 기운보다는 음의 기운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 내향성의 주체는 남을 향한 공격성과 남과의 경쟁심을 덜어냄으로써 밖으로 뻗쳐야 할 기세가 안으로 향하게 한다. 이때 내향성은 수줍음, 혹은 세계를 차마 정면에서 보지 못함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현존의 위계에서 치열함이나 능동성에 견줘 낮은 단계로 결국은 최소주의의 행동, 최소주의의 삶으로 귀착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욕망의 징그러움 때문에 진절머리를 쳤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박항률의 부드러운 색조의 그림에 깃들인 뜻밖의 고요한 세계에서 낯선 평화와 근원적인 안식을 느끼고, 저를 돌아다보게 된다. 놀라워라, 그림에 스미고 섞여 드러난 화가의 내향성은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세계와의 싸움에서 거둔 고요의 승리로 빛난다. 박항률의 인물들은 풍부한 여백 속에서 선과 악을 넘어서 초연한 자리에 고요와 함께 순수한 미의 결정체로 자리 잡는다. 이미지들과 여백이 길항하며 빚어내는 그 초연함, 그 숭고함이라니! 박항률의 그림을 마주할 때 그윽하게 차오르는 감동과 경건한 발심(發心), 그리고 심미적 쾌감은 이 자기성찰적 내향성이 이룩한, 직관과 선지식으로 충만한, 삶의 복합적 현장에서 비켜서 있는 비현실적 고요의 동학(動學)이 일으킨 법열감이다.
박항률이 그토록 많이 그린 소녀들은 저마다 그 내면에 근원적 어머니를 품은 여성들이다. 배고픈 자식들에게 젖을 주고, 아픈 자들을 회복시켜 주는 미완의 어머니들인 이 소녀들은 괴테의 저 유명한 아포리즘 "여성적인 것만이 인류를 구원한다"라는 문장 속에 압축된, 구원을 주는 여성성의 정수(精髓)를 가진 존재들이다. 여성성에 대한 예찬은 동서의 구분이 없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여성을 곡신(谷神)으로 부르며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오묘한 도와 같은 지극한 경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한없이 부드럽되 저를 비워 만물을 용납하고 품어 안는다. 그런 까닭에 여성은 만물의 있음을 품어 기르는 뿌리-존재다. 반면에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아버지의 "부성성은 합법적인 허구이다"라다. 아버지들이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에의 결핍, 즉 텅 빈 껍데기로 전락한다. 나치즘·식민주의 통치·인종청소·이단에 대한 박해 따위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다 아버지들이다. 반면에 어머니는 생명을 품고 낳아 수유하는 부드러움, 즉 젖과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이다. 생명을 품고 기르는 것은 자연의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어머니들은 자연으로 귀의하는 존재들이다. 남성들이 이성·로고스·능동성·문화라면 여성들은 감정·파토스·수동성·자연이다. 아버지들이 생명을 탕진하고 고갈시키면, 어머니들은 생명을 살찌우고 길러 키운다. 아버지들은 숲을 없애버리고 도시를 세우고,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드는 건설자이자, 법과 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위반할 때마다 윽박지르고 때리는 지배자들이다. 숲과 강물의 숨결인 어머니들은 건설자들에 의해 토벌과 죽임을 당한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저 미래에서, 저 영원한 곳에서 끊임없이 돌아온다. 박항률의 소녀들은 바로 그 영원에서 돌아오는 여자들이다. 이 소녀들이 품은 여성성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소녀들은 관능성을 배제하고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콧대와 고운 입매를 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숭고한 아름다움에 닿는다. 기르고 치유하고 정화하는 이 소녀들은 내면의 상처와 고통을 덜어내고 치유함으로써 제 안의 대지모신(大地母神)을 현시한다. 박항률의 그림의 깊이는 심미성의 시지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치유하고 정화하는 힘에 비례한다.
박항률의 그림에는 소녀와 소년들(소년들은 사미승으로 변주되기도 한다)이 등장하고 그 배경에는 주로 새와 나비와 꽃이 나온다. 이 작은 오브제들은 화폭 안에서 매우 정적으로 배치된다. 고요는 고요 그 자체로써 영원성이라는 의미를 얻고 이 생명들이 처한 근원적 현존의 장으로 바꾼다. 박항률은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고요를 그려내는 화가다. 고요는 마음의 해탈을 가리키는 표상이다. 이 고요 속에서 소녀와 소년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 얼굴들은 텅 빈 얼굴이다. 무표정이다. 이 텅 빈 것은 무언가를 채우고자 하는 갈망을 드러내는데, 그 갈망의 표적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다. 여기는 강퍅한 현실이고 저기는 아스라한 피안(彼岸)이다. 이때 고요는 그림 속의 인물들이 갈망하는 생물학적 욕구 그 자체다. 이 욕구가 제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과제에서 비켜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비현실적이다. 화폭을 채운 고요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음이다. 텅 비어 있는 충만이 바로 고요다. 이 고요에 대해 소녀와 사미승들은 제 삼엄한 정신의 기표인 침묵으로 대응한다. 이렇듯 밖의 고요와 안의 침묵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춰낸다. 고요는 아무것도 없음,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정체(停滯)나 피동에 머무는 무른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결핍과 누락의 까닭을 살펴 묻는 정신의 꿋꿋한 능동성으로 빛난다. "꿈꾸는 자의 집은 고요이고, 그가 움직이는 방식은 성찰이다. 홀로 있는 고요함이 존재의 결핍을, 현존의 누락을 살펴 묻게 하여 고요는 꿈꾸는 자의 실천적 에너지로 빛난다. 결핍에 대한 고요 속의 물음이 충일한 존재의 빛을, 그 빛에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고요 속에서 묻는 한, 존재는 언젠가는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삶 전체의 충일적 질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문광훈, 『숨은 조화』) 고요는 멈춤 속에서 작동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고요 속에서 변화와 자기갱신의 정신 운동이 배태되는 것이다.
현실은 갖가지 소음으로 들어차 있다. 소음들은 문명의 산물이고 차라리 문명 그 자체다. 소음의 모태는 무질서와 혼란이다. 고요는 소음의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에서 떨어진 평화를 품고 제 실재를 드러낸다. 박항률의 고요는 우주에 충만한 태초의 기운이자 영원한 질서다. 그것은 선정(禪定)의 경지다. 그의 회화가 영원성을 품은 비경(秘境)이나 선경(仙境)으로 달려가는 것은 그 때문에 자연스럽다. 이 비경과 선경은 경험현실 저 너머의 세계다. 저 너머의 세계는 문밖이고, 다리 건너이며, 국경을 넘어선 어떤 곳이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그 넘어섬 뒤에 나타난다.「저 너머에」 연작들이 내 마음을 끄는 것은 현세와의 치열한 어울림보다는 내세에 대한 욕구를 넌지시 지향하는 까닭이다. 저 너머란 영토의 경계와 상상의 경계를 넘어선 무릉도원이다. 저 너머는 욕계(欲界)를 넘고 색계(色界)를 넘어서야 닿을 수 있는 무색계(無色界)다. 욕망도 형체도 없어서 벗어버린 세계, 무극(無極)의 세계! 이 피안의 세계는 옹졸하고 남루한 현실과는 역상(逆像)을 이룬다. 「저 너머에」의 한 작품을 보자.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노란꽃을 들고 앉아 있다. 소녀의 등뒤에는 분홍색 꽃이 흐드러진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소녀가 앉아 있는 그 너머 왼쪽에는 백로가 날고 오른쪽으로는 깎아지른 듯 솟은 고산(高山) 봉우리가 있다. 그 앞으로 여러 마리의 새들이 난다. 여백은 푸르른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푸르른 기운을 머금고 나무 몇 그루가 흐릿하게 드러난 이 여백은 회화적 언어를 품는다. 말할 것도 없이 이 풍경이 암시하는 것은 현실 저 너머에 숨은 피안의 세계다. 피안은 일상의 진부한 관습들과 거짓들로 들끓는 이 세속의 세상과는 다른 세계다.
박항률의 그림이 가진 깊이는 고요의 깊이와 비례한다는 사실은「낮꿈」과 「비밀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낮꿈」에서 소년은 바위에 온몸을 의탁한 채 잠들어 있다. 바위 앞에는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해 있다. 그 후경으로 아득한 높이에서 물이 떨어지는 폭포가 흐릿하게 나타난다. 폭포수는 저 까마득한 높이 어딘가에 있는 천상에 대한 상상으로 이끈다. 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천상과 지상을 잇는 폭포수는 이 물질세계가 중력의 장 안에 있음을 말한다. 그 폭포 옆으로 새 한 마리가 떠있는데, 공중을 나는 새는 도약과 비상으로 중력의 영들을 거스르는 운동을 보여준다. 물질성으로 구현된 존재가 중력의 포획을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한 것도 꿈에서는 가능하다. 이 오브제들이 어울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비경이 암시하는 것은 무릉도원이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의 세계다. 그러니까 무릉도원은 바위에 온몸을 편안하게 의탁한 채 낮잠에 빠져 있는 소년의 시간 속에서만 나타나는 세계이다. 시간의 본질은 인식 가능한 지금을 통해 드러난다. 한 점의 회화는 보고 느끼는 현재의 시간을 통해 그 실재를 드러낸다. 박항률의 그림이 보여주는 시간은 현실의 시간이 아니라 종교의 시간인 이금의 현성[而今之現成], 즉 영원성의 현재다. 현실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고 그 흐름은 직선적이다. 영원한 지금은 직선적 흐름을 멈추고 지금-여기에서 고요의 동학을 실현한다. 아마도 그것은 화엄불교에서 말하는 바 무진연기(無盡緣起)의 시간과 비슷한 시간일 터다.「비밀이야기」에서 몽환성은 더 깊어지며 속수무책으로 드러난다. 화폭 왼쪽 하단에 한 처녀가 눈을 감고 있다. 그 뒤로 비어(飛魚)와 악기를 들고 나는 인면조(人面鳥), 새를 타고 피리를 부는 남자가 나온다. 하단에는 정자, 초가집, 개, 소반을 들고 어디론가 가는 처녀, 목기러기 등이 배치되어 있다. 상단과 하단의 풍경은 저기와 여기, 하늘과 땅, 피안과 금생으로 대조된다. 이 상단과 하단을 연결하는 것이 화면 오른쪽에 있는 나무다. 이 나무는 세계수(世界樹)다. 우주를 떠받드는 이 세계수는 삼세계를 연결한다. 뿌리는 지하세계로 뻗어가고, 저 높은 가지들은 하늘에 닿아 있다. 세계수가 지하세계에서 뿌리로 빨아들인 수액은 몸통을 거쳐 하늘로 올라간다. 이 물들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 대지를 적시고 식물들을 자라게 한다. 지하와 천상을 연결한 나무로 인해 물은 우주에서 순환하며 생명들을 키운다. 처녀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은 배경으로 나오는 풍경이 꿈속의 그것임을 암시한다. 처녀는 꿈속에서 이승 저 너머를 보고 있다.
「꿈」은 비어를 머리에 인 소녀의 측면상이다. 박항률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측면상들이 많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박항률의 측면상의 인물들을 견줘 보라. 뚜렷하게 대비되는 바가 있다. 공재의 「자화상」은 중후한 표정이 풍부한 실감의 부피를 갖고 말을 걸어오는 듯 충분히 사실적이다. 정면을 꿰뚫어 보는 눈은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얼굴을 화면 중앙에 배치하고, 세필로 한 올 한 올 그려낸 수염과 꽉 다문 입매,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과 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 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선비의 기상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정면상(正面像)을 취한 공재의「자화상」과 달리 박항률의 인물들은 대부분 측면상이다. 정면상들은 물러섬 없이 세계와 꿋꿋하게 맞서려는 의지 때문에 드세고 강렬하다. 반면에 측면상들은 세계와의 눈 마주치는 것을 피함으로써 세계와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내향성의 정신세계를 예시한다. 그것은 제가 세계의 속진(俗塵)과 무관하다는 무의식의 주장을 보여준다. 조금 이색적인 작품은 「응시」라는 제목이 붙은, 눈동자가 네 개인 소년의 초상이다. 네 개의 눈동자는 박항률의 회화 문법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파격이다. 소년은 눈동자 네 개로 정면을 응시한다. 소년이 네 개의 눈동자로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그 시선이 가 닿은 데는 없다. 그 시선은 허공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소년과 소녀의 측면상을 그린 「새벽」연작과 「소년」·「기다림」등의 작품에 나오는 새를 주목하자. 새들은 인물들의 머리 위나 정수리 가까이에 날개를 펼치고 나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하늘과 땅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들(나비는 새의 변주다)은 차안과 피안을 오가는 메신저다. 아울러 새는 신화에서 보면, 공기의 정(精), 영혼의 인도자, 무의식에로 인도하는 샤먼이다. 박항률의 그림에서 새들은 여기에서 저기에로 가고자 하는 넋의 기호다. 새들이 향하는 곳은 물질성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영원한 저 어느 곳이다. 새들은 평면적 형태는 분명하지만 실재로서의 볼륨을 갖고 있지 않다. 의도적으로 물질성을 덜어냄으로써 그것이 현실의 새가 아니라 상징적 기표임을 나타낸다. 새와 더불어 그 많은 소녀들, 아직 개화된 성인의 세계에로 입사하지 않은, 그래서 사회의 여러 규범들, 법과 관습들의 구속에서 벗어나 있는 이 미완의 어머니들은 그 자체로 자연이다. 새들은 그 자연과 호응하는 자유로운 마음이자 여기가 아니라 저기로, 남루한 현실에서 원초의 세계로 회귀하는 꿈이다. 꿈은 고요 속에서 꾸어지고, 고요는 명상을 부른다. 이때 명상과 꿈은 현실에 짓눌린 마음을 펴주고 찢긴 상처들을 아물게 한다.
우리는 왜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일까? 아름다움은 범속한 현실 저 너머 초월적인 세계의 암시요, 감각의 비상한 고양(高揚)이고 그 기쁨이다. 꽤 오랫동안 박항률의 그림에 매혹되어 그 주변을 맴돌았던 것은 그것이 늘 의식과 감정의 갱신을 자극하고, 미적 쾌감이라는 보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박항률의 소녀들은 오로지 얼굴로써만 제 놀라운 현존을 말한다. 소녀들은 응시하지만 말은 하지 않는다. 침묵이 곧 소녀들의 언어다. 그 다소곳한 얼굴들은 침묵으로써 권력·특권·힘을 지향하는 남성적 가계(家系)가 누르고 앗아간 여성의 꿈을 노래한다. 그것은 생명의 노래요, 꿈속의 꿈이다. 아울러 관능성을 말소한 소녀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다. 현실의 중력에서 벗어나며 그것은 미제라빌리슴 miserabilisme을 하나의 추문으로 만든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력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으로 숭고하다. 박항률의 그림들은 이곳이 아니라 저곳을 꿈꾸게 한다. 이곳은 저곳의 있음으로 견딜만하다. 저곳을 현실 저 너머, 유토피아라고 할 수도 있겠다. 화가가 굳이 치유와 정화를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고요는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효과를 낳는다. 박항률의 그림은 색채로 작곡된 음악이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들 앞에서 시지각적인 것은 청각적인 것으로 바뀌는 기적을 경험한다. 마음으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박항률의 그림 앞에서 색채로 연주되는 음악, 고요에 반향(反響)되어 울려나오는 놀라운 교향악을 듣는다.
-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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