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수
명상도 화포에 유화, 45.5x53cm, 2007-2010
정복수
인연 회포에 유화, 40.9x53cm, 2007-2010
정복수
얼굴 화포에 유화, 41x27cm, 2007-2010
자기소외 혹은 노출의 역설적 아름다움
최태만/미술평론가
정복수의 작품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정서가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철저한 자기소외와 자기애-나아가 휴머니즘의- 고양된 감정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정확하게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집요한 질문과 그것의 수용과 부정을 통해 인간의 참모습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야만적인 인간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집중되고 있으며 그것은 대체로 성적 침탈, 동물적 본능에의 집착, 무자비한 노출에 의해 폭력적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는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점은 분명히 인간에 대한 깊은 혐오와 불신에 근거한 부정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면 속에 등장하고 있는 기호화된 인간들은 처절하게 소외되어 있으며, 추상화되고 일반화된 채 나타나고 있다. 마치 이집트 미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추상화된 인간의 모습이거나 중세의 도상(圖像)혹은 점괘도(占卦圖)의 양식화, 규범화된 신체구조처럼 그것은 특정한 인간을 지시한다기보다 다지 인간임을 암시해주는 몇가지 특징들에 의해 도식화되고 정형화한 모습으로 화면속에서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인간들은 초월적인 시·공간 속을 떠돌아다니는 악령과도 같은 존재 즉, 몽상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속에서 삶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의문 투성이이며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된 고독한 개인의 중얼거림으로 가득 차 있다. 신뢰와 존경이 사라진 공간 속을 배회하고 있는 인물들 위로 뱀이 스물스물 기어다니거나 수많은 누들이 마치 감시하듯 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향해 노려보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유쾌하지 않으며 혐오스럽기조차 하다. 그의 작품은 <기억의 창고>를 보면 마치 원죄처럼 신탁(神託)에 의해 결정 지워진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도상들 위에 새겨진 일련번호는 개성과 인격이 없는 물질로서의 인간을 지시하고 있는
이를 비집고 들어서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은 흉칙한 악몽을 상기하게 만든다. 뱀이란 동물에 대해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편견들-사악함, 교만함, 요사스러움, 인간을 파멸로 유혹하는 악마의 화신 등을 떠올릴 경우 그의 그림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 뱀은 교만하고 부도덕하며 본능에 이끌리는 인간을 상징한 것이라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그림이 신탁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 인간의 삶을 드러내 준다고 했을 때 비단 종교적인 맥락에서만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뱀은 남성성(男性性)을 상징한다. 그것은 공격적이고 지배적이며 탐욕적인 정력의 상징인 것이다. 여기에서 정복수가 가진 성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혐오감을 읽을 수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로서의 성(性)과 성적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는 인간의 삶이 그의 작품에서 매우 도발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의 그림에서 그는 성적 유혹, 생식에의 본능적 집착과 그 굴레에 얽매여 있는 인간의 삶의 결정성(決定性)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적 본능에만 이끌리는 인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짐승의 시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표현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짐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벌거벗겨진 여자의 말라비틀어진 육체와 등뼈처럼 수직으로 죽 이어진 30개의 눈, 만자(卍字), 화살표시, 푸른 웅덩이 속에 잠긴 아기 등 기호와 상징으로 가득한 <불면증>은 탄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인간의 삶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어린 아기를 감싸고 있는 청색의 웅덩이는 양수로 가득 찬 자궁이며 이 이미지가 그의 그림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하기를 열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은 너무나 혼란스러운 의문투성이이기 때문에. 이 그림의 한 켠에 그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내일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저렇게 화려한가. 무수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에 의하자면 현재는 믿을 수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무참하리만치 단절되어 있으며 예견할 수 없는 내일은 불안으로 다가오고 있다. 무수하게 되뇌어지는 의문들은 그의 그림을 심리적으로 더욱 옥죄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오장육부를 드러낸 인간, 자궁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명체, 불거진 성기, 끊임없이 토해내는 무의미한 말들의 흉칙한 음모는 정복수의 그림 속에서 늘 나타나고 있는 표지(標識)라고 할 수 있다. 존엄성이 거세된 껍질로서의 인간, 단백질 합성체에 불과한 육체는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찬 야수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야만적인 공격과 대립, 소통의 부재는 인간성의 부재란 한 국면에 대해 일깨워준다. 이렇게 파편화, 물질화된 인간상은 구체적인 관계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포착된 것이라기보다 거의 심리적인 반응, 그것도 대단히 강박적인 자기소외의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 인간의 이성과 윤리의 흔적을 찾고 그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매우 덧없는 시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다소 유쾌하지 않은 논조로 말해온 부정적인 측면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일면적인 것에 불과한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희노애락의 감정조차 증발해버린 원생 동물적 욕망만이 꿈틀거리는 그 작품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부정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탄력있는 근육과 아름다운 볼륨을 지닌 디오니소스나 아프로디테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볼성사나운 육체를 통해 성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우리의 욕망을 돌이켜 보게 만들고 우리 내부 깊숙한 곳에 은폐시켜 놓은 성적 공격성의 실체를 깨닫게 만드는 힘을 그의 작품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필자는 정복수의 이 혐오스러운 도상들이 비상한 도덕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진실에 대해 말해주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매너리스트적 정신주의와 그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정신적 숭고성이 내면화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 깔려있는 휴머니즘의 정신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의 그림이야말로 도덕성이 고갈된 현대사회를 향해 던지는 진술이며 또한 비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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