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深心한 날
2010.12.10 ▶ 2011.01.30
2010.12.10 ▶ 2011.01.30
임남진
연가 한지채색, 160x115cm, 2010
임남진
행복한 하루 한지채색, 110x80cm, 2010
임남진
바람에게 한지채색, 110x190cm, 2010
임남진
풍속도4-취생몽사 감물염색 비단채색, 152x205cm, 2009
임남진
Bella Luna 한지채색, 85x120cm, 2010
심심(深心)한 날, 그리다
황유정(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21세기를 살고 있는, 살아가야 할 우리들은 표지판 없는 교차로에서 목적지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모습이다. 모든 첨단 기능을 다 갖춘 전자 장비로 무장하고 있지만, 별자리나 나침반 하나로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과거의 인류와 달리 분명한 좌표를 설정하지 못한다. 지식이 분화되어질수록 전문적이 되어 가긴 하지만, 사람들의 사고영역은 줄어들고 통찰의 힘도 줄어들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컴퓨터의 데이터에 의존하여 연계된 지식의 탑을 쌓아올리고 있지만, 여기에는 고도의 지식이 우리들을 서로 격리시키는 ‘지식의 바벨탑’이 될 지도 모른다는 고민이 잠재해 있다. 흔들리는 현대인을 붙잡아주기 위하여 ‘통섭(通涉)’ ‘인문학 콜로키움’ ‘철학 읽기’ 등 문화 전반적으로 사유의 장(場)을 열고 있는 요즈음의 두드러진 사회현상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최근 미디어매체의 발달은 우리의 인식체계 자체를 바꾸어 놓고 있다. 이미지 시대인 현대 사회에 이르면 ‘현실의 팬텀화’, ‘이미지 존재론’ 등 기존의 인식틀로서 수용할 수 없는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정체성을 찾고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철학적 사유를 통한 현실 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현 시대가 어떤 변이를 하더라도 인간의 고민은 ‘존재의 본질’을 향해 있다. 디지털세대도 형식은 다를지라도 소크라테스가 했던 고민을 똑같이 반복할 것이다. 철학이나 미술이나 문학이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가는 접근 방법에 달려 있다고 보여 진다.
금남로분관에서 청년작가로 선정 초대받은 작가 <임남진>의 < 심심深心 한 날 >展은 그녀만의 독특한 해법으로 우리의 일상을 다양하게 포착해 보여준다. 항상 작품의 출발을 자신의 성찰로부터 시작하는 작가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작품을 통해 털어 놓는다. 천을 염색한 뒤, 수 십 번의 붓질로 형상 하나 하나를 완성해 나가는 더딘 작업방식 또한 작가에게는 자신의 근원으로 침잠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듯싶다.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절절한 고통으로 느꼈던 사회의 아픈 현상들은 < 떠도는 어린 넋을 위하여>, <오월五月문자도> 등의 작품으로 화폭에 옮겨졌고, 이러한 현실주의 참여미술이 지금도 작업 근간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1994년 ‘고려불화 특별전’을 보고 가장 한국적인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방식이라는 감동을 받아 불화연구에 열중하게 된다. 그 후 작가의 이야기 방식은 불화형식을 빌리고 있는데, 특히 구원의 세계까지 펼치는 감로탱화는 세상의 역사와 삶의 구석구석을 비추기에 더없이 좋은 형식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불화(佛畵)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통해 불교적인 이념을 찾아내어 감명을 받고, 법열(法悅)을 느껴 종교적인 실천행동을 하게끔 하는데 의의를 둔다. 그러나 단순한 교리의 도해가 아니라 문자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뛰어난 창작성을 지니는 것이다. 불화의 주류를 이루는 탱화는 경전의 내용을 도식화할 뿐 만 아니라 불법의 내용을 나타내거나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거나 공덕을 쌓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려탱화의 근엄하지만 우아하면서도 세련된 형태, 부드러우면서도 치밀한 선, 빈틈없는 대각선적인 구성, 밝고 선명한 색채 등은 가늘면서도 간결한 선을 통해 화사하고 섬려한 화풍을 지닌 독창적인 한국미술로 승화되어졌다. 작가가 취하고 있는 형식인 감로(甘露)탱화는 16세기 후반 조선시대에 탄생한 그림양식으로,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와 유사한 그림양식이 없는 조선시대의 독특한 불교회화이다. 감로탱화는 사자(死者)를 위한 의례이며, 그려진 내용 또한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 감로탱화의 공간구성은 삼단기법으로, 인간이 알 수 없는 미래의 세계인 피안의 경지를 나타내는 산수화를 배경으로 한다. 상단은 중생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불보살의 세계이고, 중단은 지옥장면과 함께 육도(六道)윤회를 보여주는 하단의 중생세계가 불보살의 세계로 나아가는 연결장치 이다.
비참한 현실세태의 들춤만이 목적이 아닌 임남진은 자신이 항상 고민해 오던 인간의 ‘죽음’과 ‘구원’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고, ‘자비’를 전해주는 감로탱화를 통해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또한 감로탱화는 영화와 같은 시점인 시간성과 연극과 같은 요소인 공간성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적 미감으로 풀어내기에 더없이 적절했으며,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창의성은 현대적인 새로운 조형세계의 창출에 풍부한 영감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특히 하단의 여러 무리 중 목구멍이 바늘만큼 작고 큰 입을 가진 아귀가 등장하는데, 굶어 죽는 고통을 받는 아귀의 형상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고난한 삶의 모습들을 열거하는데 적합한 소재가 되었다. ‘아귀’는 나이 들어감에 따라 메말라 가는 팔다리에 배가 불룩 튀어나오는 인간의 변화하는 모습과 외형상 매우 닮아있다. 이러한 작품 속의 아귀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인간 내면의 모습을 구체화시킨 형상이며, 작가 자신의 자아이기도 하다. 작가는 아귀를 인간 군상들의 갖가지 모습들로 구체화 시키는 동안,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끝없이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과 너무 흡사함을 새삼 깨달았다. 가장 한국적인 양식으로 선택한 감로탱화 형식을 통해 임남진은 현 세태를 담아내는 풍속도를 그리게 된다. 2007년 첫 번째 개인전을 통해 전시되었던 < 풍속도 > < 취생몽사 > < 시간의 저편 > 등의 작품은 재미와 유머를 담고 있는 서글픈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눈여겨 살펴볼 때, 곳곳에 대입되어진 우리 주변의 풍경을 발견하고 웃게 되지만, 웃음 뒤에는 가볍게 뒤돌아 설 수 없는 짙은 페이소스가 전해온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어 한다. 감로탱화를 보면 ‘아귀’는 결코 죄 속에 해매는 존재로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상단에 펼쳐지는 불보살의 세계가 마지막에 구원받아 천국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듯이 ‘아귀’는 구원이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최근 들어 작가는 우리네 세태를 조명하는 풍속도 작업에서 한걸음 나아가 인물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람에게> <심심한 상상 > <행복한 하루 > 등의 작품은 현재 작가의 변화하고 있는 사유의 중심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주변 이야기의 서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화자이자 자신을 대변하는 ‘아귀’는 어둠에 갇힌 자가 아니라 구원가능한 자로서 밝음 속에 드러낼 수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뀌어졌다. 화면은 밝아지고, 빛처럼 쏟아지는 나무줄기는 가벼운 경쾌함마저 감돈다. 임남진은 비로소 자신의 아픈 상처를 감싸 안고, 누추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구원을 느낀다.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은 화면 가득 그려진 형상들을 점점 비워내는 형태로 작업방식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빈 화면 속 작은 군상들은 거대한 우주 속의 일점(一點)을 이루는 인간 존재로서의 겸허함을 전해주고,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 어렵다는 것을 절감케 한다. 작품 구상의 밑그림 작업에서부터 붓을 잡기까지 더딘 과정은 생명을 잉태하듯 조심스럽고 극진하다. 작가는 자신이 부려놓은 화폭의 형상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자신을 정화시키고, 불보살 세계의 단비가 이 땅에 내리기를 염원하고 있다.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 역시 작품을 마주할 때, 비움으로서 드러나는 참됨을 발견하는 기쁨을 함께 누리길 바란다.
1970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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