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숙
부유하는 나의 도시-실마리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채색, 194x260cm, 2010
김효숙
부유하는 나의 도시-재현된 무대Ⅰ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채색, 181x223cm, 2010
김효숙
부유하는_나의_도시-재현된_무대Ⅱ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채색, 181x223cm, 2010
김효숙
부유하는 나의 도시-마지막 소통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채색, 130.3x194cm, 2010
건축인간, 세계를 해체하고 재건축하는
고충환 (Kho, Chung-Hwan 미술평론)
작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계기는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그 계기는 순수한 상상력의 원천일 수도 있고, 첨예한 현실인식의 결과일 수도 있으며, 억압된 욕망과 무의식의 탐색일 수도 있고, 대중문화와 일상성에 대한 공감일 수도 있다. 사사로운 경험에서 유래하는가 하면, 이데올로기와 같은 이상이나 대의명분이 그 동기가 되기도 한다. 김효숙의 경우는 일단 사적인 경험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유년시절은 유난히 이사가 잦은 편이었다. 잦은 이사는 작가로 하여금 제대로 된 친구를 사귈 수 없게 했고, 이로써 아마도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식의 자기반성적인 기질을 내재화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이사는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건축현장이 그것이다. 집과 집, 건물과 건물, 도시와 도시를 오가는 보통사람들의 인식 속에 건축현장이 자리할 여지는 별로 없다. 그렇게 별로 없는 여지가 작가의 의식 속에 둥지를 튼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의 특정성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 건축현장은 최종적인 지점 내지는 완결된 형태가 정박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과정이며 과도기가 움트는 장소다. 옛 집이 허물어지고 새 집이 축조되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새로운 가치관이 옛 가치관을 밀어내는 그곳은 사실은 장소의 개념이 무색할 정도로 왠지 불안정한 장소, 임의의 장소를 암시한다. 멀리서 보면 무슨 장난감과 놀이터 같고, 가까이서 보면 사람 사는 세상의 축소판 같다.
작가는 이처럼 과도기적 장소며 불안정한 장소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본다. 작가의 상상력이 매개가 돼 한갓 건축 현장이 삶의 메타포며 표상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즉 작가에게 삶은 건축 현장처럼 과도기적 장소며 불안정한 장소다. 어떤 완결된 형태나 결정적인 형식이 정박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이다. 어수선한 건축 현장처럼 세계의 전망도 파편화돼 있고, 그 전망을 대하는 내 인식의 조망도 파편화돼 있다. 세계를 통일된 전망 속에서 바라보게 해주는 중심 같은 것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무중력 상태(비현실 같은 현실) 속을 부유하는 세계의 파열된 조각들이 있을 뿐이며, 마찬가지로 조각난 인식의 편린들이 있을 뿐.
그렇게 떠돌다가 세계의 조각과 인식의 편린들이 잠시잠깐 서로 스치면서 만나질 뿐. 그러므로 건축현장의 불안정한 장소는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삶의 장소며 인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현장을 자기의 인식 속으로 불러들여 삶에 대한 자신의 의식(자의식)을 대리하게 한 것. 그렇게 대리된 장소가 삶의 불안정한 계기들이며 존재의 억압된 계기들이 차곡차곡 쟁여지는 헤테로토피아 같다. 미셀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비주류 사상이 움트는 혁명의 잠정적인 계기로 본다. 그리고 작가는 세계를 온전한 총체로서보다는 파열된 조각들의 집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렇게 파열된 조각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을 비주류(불안정한) 사상이 움트는 현상 내지는 징후의 메타포로 본다면 과장이며 비약일까.
작가는 건축현장에서 집을 보고, 건축을 보고, 도시를 보고,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을 본다. 집은 세상을 이루는 최소단위구조다. 집은 단순한 구조물 이상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상징은 이중적이다. 즉 집은 주체에게 친근하지만 타자에게는 낯설다. 이런 낯설음이 타자에게 호기심과 욕망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집을 정초시켜준다. 그렇게 정초된 집(집의 정체성)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의 경계를 넘어, 주체와 또 다른 주체(주체의 내면에서 발견한 타자)와의 관계를 아우른다. 그러므로 나(나의 정체성이 투사된 집)는 나에게 친근하면서 동시에 낯설다(자기소외). 집의 이중성이 존재의 이중성에로 확장되는 것. 그런가하면 집은 벽면으로 축조된 구조물이며, 그 사각의 방 또한 이중적이다. 즉 방은 세계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면서 동시에 고립시키고 단절시킨다. 저마다의 방들은 말하자면 세계로부터 고립된 섬들(고도)이다.
그러나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며, 여하튼 그 방들(벽)을 허물어 관계의 망을 복원해야 한다. 여기에 자기모순이 있고 세계(타자)와의 갈등이 있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축조된 벽면들과 허물어진 벽체들의 무분별한 편린들이 어지럽게 공존하는 건축현장의 살풍경은 이처럼 세계로부터 물러나 있고 싶은 주체의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타자(세계)와의 관계의 망으로부터 도태되고 퇴출될지도 모른다는(일종의 자기거세) 불안감이 공존하는 존재의 아이러니를, 그 이율배반을 보는 것 같다. 집은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아이러닉하고 이율배반적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집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기보다는 무슨 토네이도에 직면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허물어지고 있고, 해체되고 있고, 그렇게 해체된 구조물의 무분별한 파편들이 마치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화면(비현실적인 현실의 메타포) 위를 부유하고 있다.
허물어진 집과 파열된 정체성이 일종의 유비적 표현을 매개로 서로 매치되고 있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현대인은 정체성 혼란과 상실의 징후를 앓고 있다. 앞질러가는 물질적인 풍요와, 미처 이를 따라잡지 못한 채 뒤쳐진 정신적인 패닉 상태, 권태와 공허, 아노미의 심리적 징후가 현대인에게 내재화돼 있는 것.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의 경계를 넘어 현대인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되면서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얻는다.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은 급조된 근대화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메타포처럼도 보인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각종 크고 작은 도시가스 폭발사고와 용산 참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최근의 경우로는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사건 등등. 그림에선 심지어 도로마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원형 경기장이 통째로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린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현실, 가상현실 같은 현실, 그리고 때로 미로처럼 오리무중인 현실과 더불어 사는 현대인도 덩달아 비현실적이게 된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현실의 편린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서 무슨 거대한 괴물처럼 화면에 일종의 살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 비현실은 온통 무채색의 잿빛 그림으로 강조되고, 특히 얼굴 전체를 가릴 만큼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쓴 익명의 주체로 강화된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말하자면 색을 잃어버린 시대 곧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바치는 레퀴엠 같고, 그 상실의 시대를 증언하는 익명적 주체들 즉 얼굴 없는 사람들에 바치는 오마주 같다. 작가의 그림에서 집은 개별주체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집과 집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집이 건축현장에서처럼 허물어지거나 축성 중이라면 그 정체성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타자와의 관계 또한 미완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의 좌표 위에 얼굴 없는 익명적 주체들이 서성거린다. 보기에 따라선 세상을 낯설어하는 이방인 같기도 한 그들은 작가의 자화상이면서 우리 모두의 초상이기도 하다.
그림에서 익명적 주체들은 의미 있는 서사를 파생시키는데, 서사는 특히 <마지막 소통>에서 존재론적 의미를, 그리고 <재현된 무대 1>에서 사회학적 의미를 얻는다. 이를테면 작가는 언젠가 잠든 듯 누운 채로 죽은 노숙자의 주검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충격이 뇌리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다가, 버지니아울프의 <델러웨이 부인>을 만나면서 불현듯 되살아난다. 저작에서 울프는 자살을 도전이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본다. 그렇다면 작가는 노숙자의 죽음을 자살로 보는 것인가. 그리고 그 자살은 어떤 메시지를 탑재하고 있는가. 아마도 아무렇지도 않게 삶 곁에 공존하는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사회적 책임? 그리고 작가는 <재현된 무대 1>에서 뇌물수수혐의로 사건을 재현하는 장면을 찍은 보도사진을 모티브로 취한다. 혐의를 입증하려는 입장과 방어하려는 입장이 서로 대비되는 이 그림에서 작가는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테이블을 일종의 무대로 본다. 그리고 일종의 안무를 암시하는 사람의 형상을 빌려 그 상황 자체가 우습게 보이도록 연출한다(그 사건에 대한 작가의 논평?). 여기서 작가는 건축현장을 정체성 혼란이나 상실(종잡을 수 없는 사념?)의 표상으로 보는 단계를 넘어, 개인적인 경험의 층위를 넘어, 존재론적 발언의 수위를 넘어, 사회학적 층위로까지 그 의미를 확장시킨다. 다른 그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구체성과 현실성을 얻고 있는 경우로 보이고, 향후 작가의 그림이 전개될 전망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도시를 살아있는 유기체며 생명체로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인식은 일종의 도시생태학과도 통한다. 특히 해체되는 도시의 이미지는 기왕의 인식지도를 폐기하고, 자기 식의 인식지도 그리기에 대한 열망을 암시한다. 가능하다면 세계를 재건축하고 싶다는. 그래서 그림 속에 그려진 익명적 주체는 무슨 건축인간을 예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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