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 witness
2011.02.12 ▶ 2011.03.12
2011.02.12 ▶ 2011.03.12
박홍순
서해안-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02 S Korea_gelatin silver print, 28x57.5cm, 2008
이동문
삼락의깃발 강오석 76세 1300평 c.print, 120x100cm, 2010
박홍순
새만금 군산시 옥서면 01 S Korea_gelatin silver print, 2008
이동문
삼락의깃발_권해용부부 66세 523평 c.print, 120x100cm, 2010
이인미
Dongsamdong01 digital print, 80x120cm, 2010
이인미
Youngdo digital print, 120x100cm, 2011
주지의 사실이지만 현대사진의 경향은 사진을 통해 무엇인가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주려는 목적이 없다. 그래서 관람객에게 사진을 통해 특정한 사건에 대한 추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그 장소에 작가가 있었음을 증거할 뿐. 작가는 더 이상 “어디 ‘껀수’ 없나” 읊조리며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사진의 프레임에 담긴 사건은 보편적인 내용을 담기보다 작가만이 알고 있다. 그래서 관객은 이른바 ‘찔림’을 당해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현대사진을 대할 때 이미 고전적 사진이 제시하는 순간의 환희나 보도사진 등에 익숙해진 관객의 불평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오픈스페이스 배에 사진을 매체로 삼은 3인의 작가들이 모였다. 박홍순, 이동문, 이인미. 이들이 제시하는 프레임은 위에서 전제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작가 개인적인 시선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작품을 창조한 이의 개인적 취향이 운명과 같이 그 안에 녹아 있음을 이야기한 일반론이다. 오히려 이번에 출품한 3인의 작업 태도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작가라는 존재의 최소화를 통한 ‘객관화의 과잉’이다. 그래서 이 과잉된 객관화는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의 존재와 성향, 그리고 특정 공간과 시간에서 벌어진 특정사건을 추리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우선 박홍순의 작업을 만나보자. 박홍순의 사진으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하려는 작업은 백두대간과 서해와 남해 등 작가의 족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박홍순의 작업의 첫인상은 위에서 제시했던 현대사진의 경향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명확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사진이 담은 사건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기대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한다. 이것은 박홍순의 작업이 분명한 관찰자의 시선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박홍순의 작업을 보자. 그의 프레임에는 서해안의 갯벌 혹은 모래언덕, 그리고 방조제 공사로 조성된 간척지의 황량함이 담겨있다. 박홍순의 프레임 앞에 선 관객은 작가가 보여주는 장소에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혼란스러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철저히 프레임 밖에 존재한다. 관객은 작가가 프레임 밖에 존재함을 인식하면서 이런 유의 작업이 으레 이야기하는 환경파괴에 대한 문제제기나 생태주의 자들이 외치는 구호의 부재가 가져오는 간극에서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은 단호하며 프레임은 창백하리만큼 표정이 없다. 마치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처럼.
사진뿐만 아니라 세상 어떠한 장르의 작가도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박홍순은 이러한 명제를 작업을 통해 원칙적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의 증거로 작품을 선보였다. 그것은 그가 10년 넘게 작업을 통해 맥락화했던 우리 산하의 모습을 담은 작업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는 이전 <한강> 연작을 통해서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이나 타국의 그것과 비교해 월등한 우리 자연을 홍보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그 작업 속의 우리 산하는 마치 국도를 지나칠 때 만나는 거대한 고속도로 건설현장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편리한 이동을 위해 강변은 교각 기둥의 기초공사지(地)였다. 그렇지만 작가는 “봐라, 우리 산하가 공사판이 되어가는 피폐한 모습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서해안>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여주는 서해안은 있는 그대로다. 그렇다고 매립지에 들어선 공장 단지를 배경으로 한다거나 하다못해 죽은 물고기 한 마리도 그의 프레임 속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철저하다 못해 인정머리 없어 보이는 작가의 철저한 관찰자의 태도는 진부한 고발의 문법을 배제하면서도 이상스러우리만큼 묵직한 주제로 돌변하여 관객을 만난다.
이에 비해 이동문의 작업은 관객에게 좀 더 맥락과 내러티브를 파헤치라는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이동문은 부산의 삼락둔치에서 만났던, 이제는 정부 정책에 밀려 살아왔던 터전을 잃게될 운명에 처해있는 이들을 보여준다. 부산 사상구에 있는 삼락둔치는 정부의 4대강 개발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낙동강에서 채취된 준설토의 적치장이 마련될 예정지다. 이미 토지보상 등 행정절차가 마무리되었단다. 이동문은 여기에서 만난 191가구 농민을 그들의 삶의 현장인 경작지에서 촬영했다. 그는 이번에 출품되는 사진의 타이틀을 그곳에서 만난 이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의 넓이로 명명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길 운명에 처해있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표정이다. 꿈쩍도 하지 않을 세상에 맞설 수도 없고, 또한 맞선들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힘은 농기구나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구호가 적힌 플랜카드 등 최소한의 물리력이다.
사실 관객은 그가 담은 사진에서 이른바 ‘정치적’ 색채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동문의 작품은 정치적이군 그래’라고 마음속으로 선언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대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맞지 않다고 혹은 부합하는 것이라고 호불호(好不好)가 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동문의 프레임은 역동적이지 않음을 미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면 정치적 색채와 무관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는 http://www.imagepressian.com/detail.asp?article_num=70100917010841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이동문은 거대한 권력 앞에 한 개인이 얼마나 초라한지 목격담을 전해주고 있으며, 대상으로서 프레임에 실린 이들을 포함하여 셔터를 눌렀을 작가 스스로까지 포함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동문의 프레임 속 그들의 절박함 심정은 곤궁하게 표현되었지만 더 넓은 파동을 만들어낸다.
또 하나의 참여작가 이인미는 위 두 작가와 ‘대상의 강경한 객관화의 추구’라는 표현의 원칙을 공유하고 있으나 좀 더 자전적인 내용을 다룬 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그녀 작품의 프레임들은 두 갈래로 나눠진 시선의 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 나머지는 그 지극함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일상이다. 대상의 평범함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독특한 구조를 발견하는 것은 나름 전문화된 시각을 필요로 한다. 이인미는 건축(학부)과 사진(대학원)을 전공한 다소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작가의 외연만 보면 이인미는 건축물의 껍질과 그것을 지탱하게끔 하는 뼈대의 구조를 좀 더 전문화된(혹은 공학적인) 시각으로 통찰하는 작업을 하지 않을까하는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약간만 시선을 돌려 생각하자면 겉과 속을 병렬시켜 비교하기보다는 그 둘이 통합되면서 일으키는 다양한 파장과 파열음을 한 프레임에 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그녀의 작품은 겉과 속, 또렷한 원경과 어두운 근경, 작가의 일상과 타인의 일상 등 분리 가능한 두 영역은 결국 하나였던 통합체라는 태생적 본질로 강제 환원된다.
이인미가 바라보는 햇빛 가득한 바다는 작가 자신의 삶과 가까웠던 곳으로 판단되지만, 작가의 생활과 더 밀착되어 존재하는 공간인 아파트의 어두운 복도에서 바라보았던, 어찌보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당연시되어 인지하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소에 이인미의 시선이 꽂힌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꾸준히 자신이 삶의 영역에 대한 탐사에 나섰던 작가의 태도가 작업을 통해 맥락화된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그 탐사의 작업은 오히려 더 지난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무엇인가 객관화된 특별함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인 자신뿐만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게 자신이 두었던 대상과의 ‘거리감’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가 이전 작품을 통해 누빈 부산의 이곳저곳은 렌즈를 들이밀어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눌렀던 그 작은 시간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인미의 포커스를 받은 대상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이미 과거가 되었지만 동시에 현재로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 시간성을 내포한 대상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른다.
- 황석권․[월간미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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