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소영
언제나 흐른다_ oil on canvas, 162.2x112cm, 2011
신소영
그 순간1 oil on canv, 91x60cm, 2011
신소영
그때의 너는 oil on canvas, 193.9x97cm, 2011
신소영
그러했던 날 oil on canvas, 100x100cm, 2011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신소영은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이고 싶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고 어른이 아닌 아이의 모습과 시선으로 세상 속에 있고 싶고, 세상을 보고 싶다. 이 노트처럼 작가의 그림엔 어린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자신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작가 속에, 우리 모두 속에, 어른들 속에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은 부재하는 유년시절을 대리한다.어른들은 어린아이를 경유해왔다. 그래서 어른들 속엔 여전히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린아이는 부재하는(부재로써 존재하는) 만큼, 어른이 어린아이를 되불러온다는 것은 곧 부재하는 존재와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 존재방식이 부재인 만큼 그리움을 되불러오는 시제 역시 과거시제를 취한다(모든 그리움은 부재에 대한 그리움이며, 과거를 향한 그리움이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엔 <그 순간>, <그때서야>, <그때의 너는>, <그러했던 날>, <잊어가는, 잊혀지는> 등의 과거를 암시하는 제목이 많다.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그때 그 순간을 되새김질하는 것.
이처럼 작가는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그 눈에 비친 세상은 <어린 왕자>처럼 이상적이기도 하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때론 <양철북>에 등장하는 오스카처럼 시니컬하기도 하다. 순진한가 하면,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 순진하지가 않은 것은 그의 이상과 환상(그 자체 유토피아의 계기인)이 사실은 현실원칙에 위배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감행하게 해주는 장소며 지점들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는 어린아이의 눈엔, 엄밀하게는 어린아이의 눈을 빌린 어른의 눈엔 사실은 어른의 욕망이 투사돼 있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세계에 성공적으로 편입하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억압된, 그리고 거세된 욕망(아마도 최초의 트라우마로 새겨졌을, 그래서 무의식의 지층을 이루고 있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이를테면 그림 <그 순간1, 2>에는 서로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작가는 여자아이가 그림 바깥을 향하고 남자아이가 그림 안쪽을 향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되는 또 다른 그림을 그려 두 그림이 쌍을 이루게 했다. 한 그림에선 여자아이가, 그리고 또 다른 그림에선 남자아이가 그림의 전면을 향하도록 배열한 이 그림들에서 작가는 일종의 심리극 내지는 역할극에로 이끈다.여자아이의 손엔 빈 새장이 들려져 있고, 남자아이의 손엔 아마도 그 새장으로부터 빠져나왔을 새가 앉아있는 나뭇가지가 들려져 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을 두고 한번은 여자아이의 입장에, 그리고 재차 남자아이의 입장에 서게 만든다. 빈 새장을 쥐고 있는 여자아이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새장 속의 새가 아니야. 제발 나를 가두려 하지 마. 양손으로 빈 새장을 쥐고 있는 여자아이의 앙다문 입술이 사뭇 결의에 찬 느낌이다. 그리고 남자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넌 내꺼야. 너는 내가 보호해줘야만 돼. 내가 보호해줄게. 여자아이와 달리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혹여 놓칠 새라 나뭇가지를 꼭 붙잡고 있는 남자아이의 손이 또 다른 결의를 엿보게 한다.
결의와 결의가 서로 부닥치고 충돌하는 극적인 순간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결의와 결의가 교환되는 이 극적인 순간에조차 정작 말이 교환되지는 않는다. 미처 발화되지 못하고 정박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자기 주변을 맴도는 속말이며, 몸말이며, 무의식이 하는 말이 하릴없이 허공에 산화될 뿐. 그 뿐. 나는 내가 말하는 지금여기에, 나의 말 속에 없다는 라캉의 말처럼 무의식의 말은 상대방에게 가닿지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는다. 너는 나의 타자(실재 곧 대상화되지 않는 무엇)며, 나는 결코 나의 경계를 가로질러 너에게로, 타자에게로 건너가지 못한다. 새장과 새, 억압과 자유가 대비되는, 새와 자유가 실재 곧 타자를 대리하는 이 그림들에서 작가는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성역할을 연기하게 한다. 서로에게 등을 보여준다는, 이 역할극에서의 상황논리가 흡사 타자의 표상처럼 읽힌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는 곧잘 쌍둥이로 보이는 두 아이들이 등장한다. 남자아이들이 등장하기도 하고(어떠니), 여자아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한번만). 이 어린아이들은 그저 쌍둥이라기보다는 자기와 또 다른 자기가 대면하는 내면적인 경험의 경우로 보인다. 이를테면 과거 속의 자기와 현재에 우연히 맞닥트리는, 그리고 몰래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보르헤스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현재의 자기와 과거 속의 자기, 의식적인 자기와 무의식적인 자기가 서로 만나지는 것. 일종의 자기분신이며 아바타며 얼터에고와 만나지는 이 경험을 통해서 작가는 또 다른 자신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을 수가 있게 되고(어떠니), 전작에서처럼 속말을 공유할 수가 있게 된다(얘기해봐).
그리고 특히 쌍둥이 여자아이들이 등장하는 그림(한번만)이 흥미로운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아이 중 한 아이는 목줄을 맨 아기 곰을 줄 끝에 붙들고 있고, 맞은편의 또 다른 아이는 그 품에 곰 인형을 껴안고 있다. 전작에서 토끼와 토끼 인형이 대비되는 그림과도 통하는 이 그림에서의 제목 <한번만>의 의미는 저 곰을 한번만 꼭 껴안아봤으면 하는 욕망의 말줄임표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여기서 곰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편입하기 위해서 억압했던 욕망을, 야생과 야성을, 자연성과 본성을 상징한다. 결국 이 그림은 자신의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과, 그 욕망이 억압되면서 생겨났을 상처의식과 대면하고 화해하는 제스처를 암시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이자면, 곰이든 토끼든 실제의 동물과 인형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동물은 욕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정작 그 대상을 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욕망은 현실의 틈새로 출현한 실재를 의미하며, 실재는 현실에 부재하는 것이며 현실에 위배되는 것. 그리고 프로이드 식으론 친근한 것에 내장된 낯 설은 것). 그래서 나와진 것이 인형이다. 욕망하는 대상 자체를 취할 수는 없으므로(실재는 부재하는 것이므로) 차선책으로 찾아낸 것이 인형이다. 욕망의 대리물을 욕망의 대상 자체로 착각하는 것(혹은 욕망의 대상 자체와 바꾸는 것)이며, 그 이면에서 일종의 심리의 경제학이 작동되고 있는 것. 그럼에도 여하튼 욕망의 대리물과 욕망의 대상 자체가 같을 수는 없으므로 결여와 결핍으로서의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은 여전히 그대로 남겨지는 것.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아이들은 사실은 어른을 연기하고, 어른들의 욕망을 대리한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사뭇 진지한 표정이 마치 자기 내면과 대화하는 것 같고, 흡사 각자에게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는 일종의 상황극 내지는 역할극을 보는 것 같다. 그 극장 속에서 나의 성장은 어린아이에서 멈춰서버렸다. 적어도 그 욕망의 극장 속에서만큼은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로 머물 수가 있다. 그리고 극장 밖에서 나는 아마도 그 어린아이가 욕망했을 나와 다른 나를 발견한다. 극장 속의 나와 극장 밖의 나 사이에서 나는 흔적도 없이 산화해버린, 도무지 재구성할 수조차 없는 무수한 나를 떠올린다. 내가 미처 기억할 수조차 없을 만큼 까마득해져버린 나. 어린아이가 순수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어린 나는 과연 순수했을까. 극장 속의 그 어린아이는 과연 나였던가. 나는 누구였고 누구인가.작가는 근작의 주제를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순간들>이라고 부른다. 나는 무수한 차이의 연쇄를 만들면서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순간들의 집합이다. 그 순간들의 한 지점에서 만나진 어린아이가 친근하면서 낯설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타임머신을 태워 저마다의 유년과, 친근하면서 낯선 타자와 맞닥트리게 한다.
-고충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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