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환
Variation#1 Oil on canvas, 91x73cm, 2011
오수환
Variation#2 oil on canvas, 91x73cm, 2011
오수환
Variation#3 Oil on canvas, 91x73cm, 2011
오수환
Variation#1 Oil on canvas, 130x97cm, 2010
오수환
Variation#4 Oil on canvas, 130x97cm, 2010
오수환
Variation#1 Oil on canvas, 100x80cm, 2010
가나아트 부산은 한국 추상미술계에서 서체적 추상으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오수환의 서른다섯 번째 개인전을 연다.
자신의 무화無化를 통하여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삶에 도달하는 작가 오수환은 한국의 미를 선으로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가다. 문사의 분위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어려서부터 ‘서예’를 접했던 작가의 작업에는 서예의 흔적이 녹아 들어가 있다. 한국의 정신이 겪어온 굴곡 많은 풍토에서 배양된 그의 작업은 화려한 색채와 자유로우면서도 다이나믹한 필선의 역동적 구성을 선보인다.
1946년 경남 출신인 오수환작가는 서울 및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그간 부산에서의 개인전은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가나아트 부산의 개인전은 작가에게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최근 3년 동안의 새로운 작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오수환 작가의 작품성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모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線(선)의 의미: ‘존재의 충격’이 남긴 ‘사이’의 흔적
문성훈 / 서울여대교수, 현대철학
과연 산을 산으로, 강을 강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우리가 산이라 부르고, 강이라 부르는 것 자체를 그릴 수는 없다. 우리가 그린 산은 우리에게 보여 진 산이지, 산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산은 우리에게 보여 지고, 보여 진 것은 다시 그려지면서 그 구체성은 추상화되고, 그 고유성은 재구성된다. 따라서 화폭에 담긴 것은 차라리 인간화된 산과 강이지 자연으로 존재하는 산과 강은 아니다. 더구나 같은 것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또한 다르게 그려진다. 빨간 선글라스로 본 세상은 빨갛기만 하고, 파란 선글라스로 본 세상은 파랗기만 하며, 서양인이 그린 산과 동양인이 그린 산은 같은 산이라도 다르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이 같은 것을 그리긴 그린 것인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을 그렸다고 해야 할지 의문만 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것을 그린 사람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이는 것을 그린 그림 속에 존재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차라리 화가 자신의 특징이다.
오수환의 작품은 한마디로 선(線)이다. 그러나 이 선이 면을 만들고, 형체를 만들고, 눈에 보이는 것을 형상화시키는 경우란 거의 없다. 오히려 선만이 보이는 화폭에는 형체도, 풍경도, 인상도 없고 세계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의 그림은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며, 따라서 세계에 대한 재현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모든 것이 추상화된 선이다. 하지만 이 선마저 세계의 윤곽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선은 과연 무엇을 그린 것일까? 아무 것도 그린 것이 아니라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대자연의 장관을 그리던, 마음의 감정을 그리던, 아니면 선과 색채만으로 표현된 어떤 아름다움을 그리던 그림이 그림인 한 그것은 무엇을 그린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림이란 무언가를 표시하는 기호도 아니며, 무언가를 대표하는 상징도 아니며, 오직 무언가를 그렸기 때문에 그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수환의 작품의 예를 보자. 화폭에 담긴 선이 왜 하필이면 4개일까? 5개일 수는 없었을까? 그의 화폭에 담긴 선은 왜 좌에서 우로, 그것도 위로 치켜져 올려 그어졌을까? 그리고 그것은 왜 연초록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 사실 이처럼 간단한 그림을 보면 누구나 자신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이렇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에겐 하필 이처럼 그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수환의 그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분명 무엇을 그리고 있고, 바로 그렇게 그리고 있다.
그럼 사람들은 오수환이 무엇을 그린다고 생각할까? 오수환의 그림에 대한 작품 평 역시 대부분 이 선에 주목한다. 아마도 이는 선의 의미를 알 때 오수환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이를 서구의 추상주의와 동양의 서화정신의 만남으로 푼다. 비록 그의 그림이 유화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려진 것이지만,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서예로 그린 추상화와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는 동양 서화의 전통적 필법과 묵법이 느껴지는가 하면, 대상에 대한 묘사를 버리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려는 서양의 추상회화 전통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붓을 쥔 손과 팔이 힘의 강약을 조절하며 쭉 뻗어 가다가 갑자기 사선을 그으며 아래로 곤두박질하고, 완만한 흐름으로 물결을 타듯 둥둥 떠다니다가, 바람에 가랑잎이 떨어지듯 춤을 추며 흩날리는 것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그의 그림에서는 물감이 뚝뚝 떨어지고, 붓이 짓뭉개지고, 아지랑이가 꼬불꼬불 피어나듯 실뱀 같은 선들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이런 그의 작품을 보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구성하고자 하는 추상화가의 열정이 느껴지고, 한 획 한 획에 혼과 정성을 담는 서예가의 집념이 보이기도 하고, 그 어떤 경계나 강박 없이 그저 붓 가는 데로 따라가는 몰아의 경지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감상들은 오수환의 작품에 나타난 선의 모습이나 그의 그림 스타일에 관한 것일 뿐, 그가 과연 이를 통해 무엇을 그리려 했는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즉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모습을 알 순 있어도 정작 이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수환은 왜 모든 것을 제거하고, 지우고, 자신마저 없애면서 선을 남기려 했을까? 모든 것이 사라진 뒤 나타나는 선은 무엇을 그린 것일까? 도대체 아무 것도 없는 적막 속에 존재하는 선이 그림일 수조차 있을까? 아마도 이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오수환 자신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오수환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그것은 바로 그의 그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수환의 <노트>에는 그가 독서하고 사색한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노트>에서 그는 한 사상가의 사유를 음미하다가, 이내 여기에서 벗어나 다른 사유흐름을 쫓는다. 그리고 한 사상가의 입장을 따라서 스스로도 생각해 보고, 다른 사상가의 입장에서 이를 비판해 보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 실험을 통해 걸러지고, 남겨진 것은 그림에 대한 오수환 자신의 고민과 사색이며, 이는 대략 4가지 주제로 모여지는 것 같다.
첫째는 ‘세계의 재현 불가능성’이다. 흔히 사람들은 세계를 그림으로 재현하려는 환상에 빠진다. 즉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그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수환은 사람들이 재현이란 환상에서 벗어나길 촉구한다. 단적으로 말해 보이는 것은 진짜 세계가 아니다. 따라서 그림은 오히려 보이는 것의 황홀함에 빠지지 말고, 이를 넘어서 세계의 보이지 않는 고유성을 가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세계란 그 자체가 아니라, 항상 주관적 조건 하에서 지각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은 세계를 감각적 지각으로 축소하고, 이를 다시 개념을 통해 고정화시키는 것으로서 이는 세계의 고유성에 대한 부정이자 폭력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한다는 역설적 시도는 세계의 재현불가능성을 폭로하고, 주관적 지각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세계를 왜곡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는 ‘예술가의 자유’이다. 흔히 사람들은 예술가는 금력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은 한낱 경제적 상품이나 정치적 선전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술가는 시대의 유행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수환이 말하는 자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즉 예술가에게 자유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오수환에 따르면 자신을 구속하는 감정, 사고, 개성 등 이른바 자신을 이루는 모든 주관적 요소를 초월할 때 진정 예술가는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비판 정신이다. 예술가는 자신을 현재의 자신으로 만들어낸 모든 현실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때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참과 거짓을 따지면서 지금의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비판 정신이란 어떠한 순간에도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현재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즉 오수환에게 비판이란 바로 자유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셋째는 ‘존재의 드러남’이다. 이는 오수환이 왜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화시키려 하는지, 그리고 왜 그가 자기 자신마저도 부정하는 자유를 갈구하는지를 알게 하는 열쇠이다. 즉 오수환에 따르면 내가 나 자신을 비움으로써 나의 가슴이 뚜렷이 열릴 때 비로소 이 세계의 존재가 비가시성을 넘어서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화가는 존재가 존재이게끔 하는 그 숨겨진 힘을 그려내는 사람으로서 바로 존재를 향해 열린 창과 같다. 즉 예술가는 모든 형상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망각되고 소멸될 때 비로소 존재와 만날 수 있으며, 이 만남의 사건이 주는 당황과 경탄 속에서 존재가 남긴 비일상적 충격의 흔적을 가시화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가는 존재가 충격을 통해 자신에게 남긴 흔적을 표현하는 사람이며, 또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존재가 열리게 하는 자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화가는 사람이 집에서 살듯 존재의 충격 속에서 산다고 할 수 있다. 넷째는 ‘예술을 통한 화해’이다. 오수환에게 예술가가 존재가 드러나는 창이라면 그의 작업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의 고유성, 내지 존재의 진리를 작품 속에 정립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작품은 예술가의 정신이 표현된 것도, 그의 의도대로 창작된 것도 아니다. 예술 작품에는 일상을 넘어선 존재의 충격이 담겨져 있으며, 이 충격은 다시 감상자에게도 전달된다. 그리고 이제 존재의 충격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모두를 변화시킨다. 이들은 충격을 통해 일상의 존재이해에서 벗어나 비록 낯설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즉 이는 세계를 가시적인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이를 주관적 인식 틀 속에 가두어두고 인간의 마음대로 재단하고 조작하고 지배하게 하는 주체-객체 관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사실 현대사회에 만연된 모든 패악과 갈등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뿐만 아니라 타인과 자기 자신마저 객체로 보고 이를 이용하고 지배하고 억압한다. 예술이 추구할 수 있는 화해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존재를 주관의 객체로 만들지 않고, 존재의 충격을 작품 속에 담으며 그 고유성을 정립하듯 인간과 자연 그리고 타인이 서로의 고유성을 드러내도록 하는데 있는 것은 아닐까?
오수환의 고민과 사색을 이 4가지 주제에 따라 추적해 본다면 과연 이를 통해 추측해 낼 수 있는 선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자유의 상태에서 화가에게 가해진 존재의 충격이 남긴 흔적일 것이다. 물론 한 지인이 일러준 ‘雪(설)泥(니)鴻(홍)爪(조)’라는 소식(蘇軾)의 시(詩) 구절처럼 그것은 눈 녹은 진흙에 남긴 곧 사라질 희미한 흔적이고, 기 러기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조차 알게 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흔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련한 흔적을 가슴에 담고, 화폭에 담으려는 화가의 숭고성이 있을 때 비로소 존재는 자신의 비가시적 고유성을 가시화한다.
그런데 왜 하필 오수환에게 존재의 흔적은 선일까? 존재의 흔적은 과연 선을 통해 나타나는 것일까? 사실 존재의 비가시적 고유성을 가시화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동일시될 수 없듯이 비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지 않는다면 존재의 고유성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면서도 이들을 동일화시키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선은 규정이자 부정이며, 내재이자 초월이고, 존재자들의 ‘사이’이다. 우선 선을 그린다는 것은 선을 통해 상하좌우가 만들고 이것과 저것이 나타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선 자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선이 어디부터 위인지를 규정하지만 동시에 이는 아래의 시작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위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을 볼 때 세계는 선 안에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는 선 밖으로 초월한다. 즉 존재는 선 안에서 규정되고 가시화되지만 선은 동시에 이를 부정하고 초월하며 비가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이 그어지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사이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선은 규정이자 부정일 수 없다. 선은 이미 존재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 그 테두리에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상하좌우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통해 상하좌우가 형성되고 이들 간의 관계가 만들어지듯이 선 역시 그것이 그어지기 때문에 비로소 이를 사이에 두고 존재자가 나타나며 이들 간의 관계도 형성된다면 선은 규정이자 부정일 수 있다. 따라서 존재의 흔적을 선으로 가시화한다는 것은 선이 만들어낸 사이에서 존재의 비가시적 고유성을 가시화하면서도 이들을 동일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오수환의 선은 과연 무엇을 그린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충격을 통해 흔적을 남긴 존재이며, 사이의 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의 고유성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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