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LOGOS
2011.08.17 ▶ 2011.08.23
2011.08.17 ▶ 2011.08.23
오정현
욕망 합성수지, 실, 석고, 2009
오정현
타자의 거울 1~6 합성수지, 석고, 2011
오정현
타자의 거울1 합성수지, 석고, 70x40x90cm, 2011
오정현
대화의 시작 합성수지, 목재, 석고, 170x170x230cm, 2011
오정현
키노피오1_마주하다 합성수지, 철, 160x160x230cm, 2011
오정현
키노피오2_마주하다 합성수지, 알루미늄, 2011
오정현
키노피오3_마주하다 합성수지, 2011
욕망하는 주체의 초상
오정현은 사고와 행동의 주인으로서의 주체에 대한 회의를 다양한 연극적 장치를 통해 표현한다. 생기 잃은 인체들이 주인공인 이러한 상황극적 경향은 이전 작품에도 발견된다. 생각하는 사람의 석고상이 커다란 자물쇠가 잠겨 진 쇠우리에 안치된 작품 [추억에 갇히다](2006)가 그렇다. 마스크 같은 큰 얼굴을 쥐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 작품 [내가 꿈꾸는 자살](2008)에 가서는 과도한 의식의 비중이 죽음에까지 이르는 소외를 낳는다.
그의 작품은 자연으로부터의 자율성을 가능하게 한 이성의 계몽이 다시 인간을 옥죄는 쇠우리가 되고 만 역설이 존재한다. 이성의 쇠우리는 인간 뿐 아니라 자연도 가두어 버린다. 돌고래가 쇠조롱에 갇혀있는 이전 작품 [사건 4](2010)의 또 다른 부제는 ‘의식 너머에’인데, 그것은 의식이 억압하는 무의식의 처소가 타자화 된 인간뿐 아니라, 자연에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에게 크고 신비로운 생명체인 고래는 자연과 자유를 의미한다. 밀가루 반죽처럼 흘러내리는 얼굴을 한 괴물 같은 사람이 물고기를 안고 있는 작품 [시선에 그치다](2007)는 이제 자연을 다시금 보듬을 수 있는 이는 이성의 가면을 벗은 이름붙일 수 없는 존재임을 예시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은 상징계가 지배하는 주체 이전의, 상상적 자아부터 시작되는 소외를 표현한다. 모서리 양면에 설치한 거울을 보는 남자를 표현하는 이전 작품 [유령-시선과 마주하다](2009)는 절단된 신체를 통합하는 총체적 가상으로서의 거울, 그 반영상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분열상이다. 거울상과 주체의 소외라는 테마는 정신분석에서 잘 알려져 있다.
마단 사럽은 라깡을 해설한 책에서, 거울은 주체를 나로서 작용하게 해주지만 그것의 중심 기능은 오해라고 말한다. 파편화된 이미지를 일체화된 이미지로 만드는 거울의 반사 이미지는 주체를 완전성이라는 환영에 빠지게 한다. 라깡은 인간의 시각이 이미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구조에 의해 우리는 보여 지는 것이다. 거울에 비추어지는 상은 자아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다. 자기 반사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주체는 소외된 주체인 것이다.
오정현의 작품에서 자아는 자율적이지 못하고 환영 속에 갇혀 있다. 몸을 구속하는 복장을 하고 길에서 퍼포먼스를 한 사진과 장치들을 같이 보여주는 이전 작품 [악몽을 꾸다-포획장치](2009)는 몸뚱이라는 알맹이가 빠져도 자신만의 자율성을 구가하며 서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적 위장 수단인 딱딱한 옷들이다.
분신 같은 한 쌍은 존재의 분열상을 보여주며, 이 중에서 하얀 분장은 더욱 유령같이 보인다. 오정현의 작품에서 인간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근대의 사유하는 주체로부터 탈근대의 욕망하는 주체로의 이동이다. 욕망은 사유와 달리, 원인과 목적의 관계가 불분명하고 시작도 끝도 없다. 오정현의 작품에서 욕망의 역학관계가 시작되는 곳은 시선과 응시이다.
메인 작품 주변에 놓인 6개의 군상 [타자의 거울]은 박스 안에 갇힌 거대한 눈깔이 머리를 대신한다. 그들은 쭈그리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눈에 할당된 비중의 과도함이 공통적이다. 정방형에 갇힌 외눈은 관념화된 눈을 상징한다. 이러한 눈은 사고와 이성을 집약한다. 이 작품을 제외한 오정현의 인체 상들은 대부분 눈이 가려져 있다. 그것은 맹목적인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나 과장되어 있든 숨겨져 있든, 작품 속 얼굴에는 시선과 응시는 잠재해 있으며 그것은 욕망의 맹목성과 연결된다. 작품 [욕망](2009)은 훼손된 큰 안면 상을 가진 남자가 공중에 떠있고, 목에 감긴 붉은 실을 잡고 있는 부처 얼굴을 보여준다. 시멘트 느낌을 주지만 붕 떠 있는 풍선이기도 한 자화상과 보다 인간적인 모습인 부처상은 그것들의 위치만큼이나 대조적인 의미를 가진다.
작가에 의하면 부처상은 그가 생각하는 참된 것과 바른 것을 의미하고, 풍선은 붕 떠 있는 욕망을 상징한다. 붕 떠 있는 자나 붙잡고 있는 자나 모두 압도적이고 구체적인 두상에 비해 몸이 왜소하다. 부박한 욕망을 떨치라는 종교적 메시지에 의지하려 하지만, 떠도는 주체를 확실하게 정박하는 든든한 방편은 없어 보인다. 욕망은 대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오정현은 작품 [키노피오-마주하다]에서 자신이 만든 덫에 갇혀 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하나는 코로부터 나온 선이 감옥을 이루는데, 인간이 그 안에 옴짝달싹 주저앉아 있다. 다른 하나는 코로부터 분출된 선이 새장같이 인간을 가둔다. 인간은 수인처럼 양팔로 창살을 붙잡고 있다. 코가 길어져서 몸을 관통하고 감옥이 되는 상황이 등신대의 인간상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곧 자신과의 투쟁을 말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욕망의 감옥은 늘어난 코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이 주저앉아 있는 자소상에 잘 나타나 있다. 작가는 작은 실수들이 쌓여서 그 무게감이 나를 쓰러뜨린다고 말한다. 그것은 칠 벗겨진 목각 인형 같은 느낌을 준다. 거짓말을 함으로서 코가 늘어난다는 동화 피노키오를 떠올려 볼 때, 스스로를 가두는 상징적 덫의 원흉은 바로 말이다.
여러 작품에서 산재해 있는 메시지를 모두 종합해 보면, 오정현의 작품이 나타내는 인간상은 언어적 존재로서 욕망하는 주체라는 초상이 나온다. 그의 작품은 단단해 보이는 현실(reality)에 잘 적응하는 합리적 인간이 아닌, 허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표현한다. 그러나 합리적인 자아가 근대적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가 표현하는 허약한 자아는 보다 실재(real)에 가깝다. 그가 표현하는 인간 주체는 실체보다 그것의 빈 곳, 즉 실재 속에 있는 불연속에 주목한다.
실재는 언어만큼이나 빈틈이 많은 것이다. 오정현의 작품은 실재와 언어 사이의 간극 속에 존재한다. 페터 비트머는 [욕망의 전복]에서 라깡에게 원래적 실재는 언어 이면에 위치한다고 지적한다. 언어는 실재의 심연 위에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실재는 상상도 상징도 아닌 무엇이다. 라깡의 개념 틀에 따르면 주체의 육체성은 실재에 속한다. 그는 한편으로 실재란 불가능 한 것이라고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같은 곳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상황 극처럼 몸으로 표현하는 오정현의 조각 언어는 이러한 실재의 비규정성과 비포착성을 표현한다. 몸은 논리를 벗어나는 장소라는 점에서, 존재가 아닌 탈존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실재계는 성과 죽음처럼 표현 불가능하고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영역, 즉 주체 외부의 영역이다. 실재는 상상과 상징 바깥에 있는 것이다. 오정현의 작품에서 거울로 연출한 상황이 상상의 단계에 속한다면, 말로서 자승자박 하는 상황은 상징의 단계에 속한다. 오정현의 작품은 말은 피노키오의 비유를 빌어 거짓말임을 암시하지만, 말(상징) 자체가 실재와 괴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마단 사럽은 라깡의 해설서에서, 전통적으로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로 간주되어 왔으며, 주체가 말을 할 때 자신이 행하는 바를 완전히 인식하는 그 주체에 의해 터득된다고 생각되어져 왔지만, 라깡의 언어관은 말하는 주체의 제어력 결여에 중심을 둔다고 지적한다. 라깡은 의사소통이란 정신에서 정신으로의 개념의 이동이라는 생각, 즉 개념에 의미를 이미 분명하게 낙인찍은 징표의 교환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오히려 인간 주체라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라깡이 출발하는 프로이트적인 조망에 의하면, 인간은 언어에 포박된 그리고 언어로 고문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는 대상이 부재한 상태에서 대상을 지시함으로서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라깡에게 주체는 기표가 기표를 지칭하는 구조의 미궁과도 같은 체계에 갇혀있다. 오정현의 작품은 의미화 사슬에 갇힌 주체, 즉 언어 속에서 우리 존재를 상실하는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서 주체를 가두는 쇠우리는 단단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주체의 산물이면서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마단 사럽이 요약하는 라깡의 이론에 의하면, 언어의 구조와 주체의 구조에 유사성이 있다. 이 두 구조는 모두 차이의 발화이며 어느 것도 중심을 갖고 있지 않다. 둘은 끝없는 대체를 내포한다. 말 자체에 내재된 원초적 결핍은 언어적 존재로서의 인간 한 가운데 흔적을 남긴다. 원초적 결핍은 욕망하는 인간에게도 아로새겨져 있다. 머리가 눈으로 바뀌어 있고, 그 눈조차도 사각 틀에 갇혀 있는 오정현의 작품은 욕망과 시선의 문제를 다룬다.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그 존재 자체가 보는 주체와 보여 지는 주체 간에 드리워진 간극으로 인해 명확히 고정될 수 없다. 전시부제인 ‘타자와의 만남’은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은 물론, 진짜 타자와의 만남도 상징한다. 타자와의 만남이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 경우는 없다.
라깡은 시선(eye)과 응시(gaze), 즉 바라봄과 보여 짐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다. 라깡은 응시와 시각의 분열에 의해 시각적 충동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 간극과 분열 때문에 욕망은 완전히 충족될 수 없다. 마단 사럽은 라깡의 욕망(desire) 개념이 소망(wish)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과 인정(recognition)에 대한 헤겔의 사상을 결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라깡에게 생물학적 욕구와도 다른 욕망은 항상 나의 바깥에 있는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만족할 줄 모른다.
‘대상 a’는 욕망을 위한, 그리고 그것을 대신하는 상실된 대상을 위해 라깡이 만든 공식이다. 욕망의 기표로서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지만, 욕망을 해방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욕망하는 주체에 내재된 거의 결정론에 가까운 가설은, 비관론이기 보다는 자유를 위해 인정해야 하는 최소한의 필연으로 다가온다. 동물과 달리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타자의 인정과 사랑에 대한 욕망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정현의 작품에 나타난 인간상은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주체의 운명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상하게 보이는 그의 인간상들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고립되어 보이는 그의 인간상들은 지극히 사회적인 상황 속에 놓여있다. - 이선영
송영규: I am nowhere
갤러리 그림손
2024.10.30 ~ 2024.11.25
김지혜 : SOMEWHERE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갤러리 도스
2024.11.20 ~ 2024.11.26
Rolling Eyes: Proposals for Media Façade 눈 홉뜨기: 미디어 파사드를 위한 제안들
대안공간 루프
2024.11.13 ~ 2024.11.26
선과 색의 시선 Perspective of Lines and Colors
필갤러리
2024.10.10 ~ 2024.11.27
제15회 畵歌 《플롯: 풀과 벌의 이야기 Plot: The Story of Wild Grasses and Bees》
한원미술관
2024.08.29 ~ 2024.11.29
오종 개인전 《white》
페리지갤러리
2024.10.11 ~ 2024.11.30
여세동보 與世同寶: 세상 함께 보배 삼아
간송미술관
2024.09.03 ~ 2024.12.01
2024 광주비엔날레 기념특별전 《시천여민 侍天與民》
광주시립미술관
2024.09.06 ~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