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명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혼합재료, 가변설치, 2011
천성명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혼합재료, 128x30x68cm, 2011
천성명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열병’ 혼합재료, 143x40x27cm, 2011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천성명의 조각은 실존적 자아에 대한 고민이 작가가 구성한 내러티브를 통해 연극적으로 전개돼왔다. 작가 자신의 얼굴을 바탕으로 한 인물 조각은 서술되는 이야기 구성 방식을 따라 자아가 겪는 내밀한 이야기들을 마치 무대 위에서와 같이 극적으로 드러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으며 관객과 교감해왔다.
근 몇 년간 그가 선보인 작품은 ‘그림자를 삼키다’를 제목으로 하여, 2007년, 2008년의 2회의 개인전에 걸쳐 정오, 밤, 새벽에까지 다다르는 시간대별로 구성되었다. 시간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바탕으로 하여, 그 안에는 여러 작은 이야기들이 공간별, 사건별로 펼쳐지는 방식이다. 이후 3년만의 개인전인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그림자를 삼키다’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사이에서 독립적으로 발생된 단편적 이야기로, 현실적 삶의 편린들에서 비롯된다.
현실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그림자를 삼키다’의 이야기가 한 단락 정리됐던 시간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전의 개인전에서 동트기 전인 새벽까지의 이야기가 전개된 이후, 그는 해가 뜨고 밝아지며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을 현실적인 장면으로 설정한다. 이로부터 본 전시의 시공간적인 축은 동시대적 시간대를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 일상적 환경이 공간적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전체적인 전시 구성을 살펴보면, 주 전시공간에는 거대한 남자 인물조각이 조각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으며, 그 뒤로 여자 인물조각이 이 정황을 지켜보고 있다. 파편적으로 나열된 남자의 몸은 쓰러지면서 부서져버린 것인지, 그렇게 도막난 채로 오랜 시간 방치돼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인물의 인상착의를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바지는 벗겨진 채로 셔츠만을 입은 남자의 모습은 힘없이 반쯤은 노출된, 박탈당한 상태를 보여준다.
셔츠에 달린 훈장만이 그가 어느 시대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의 옆에는 손에 쥔 깃발 또한 부러진 채 바닥에 힘없이 늘어져있다. 원래는 높이 세워져 바람에 나부꼈을 이 깃발은 땅에 떨어져 그 권위를 잃어버린 모습이다. 깃발, 훈장 등과 같은 상징적 표식을 지닌 거대한 인물 조각은 작가가 동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전시 공간에 버거울 정도로 큰 7m의 높이는 전형적인 동상의 크기에서 비롯한다.
견고하고 압도적이었을 이 동상은 이제 부서진 모양새로 전시장 바닥에 흩어져 파편적이나마 겨우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이러한 동상의 형식을 차용하여 작가는 기념물에 담긴 가치, 상징성이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지점을 통해, 과거에 조각적이었던 것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재구성해낸다. 동상 옆에 놓인 확성기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음은 이러한 상황과는 상관없이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며, 동상이 처한 상황과 현실 사이의 단절감을 공감각적으로 인지케 한다.
쓰러진 동상을 뒤로 하여 전시장 한켠에는 한 여자가 옷을 반쯤 몸에 두르고는 의자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응시한다. 여자는 손에 실을 붙잡고 있는데, 이 실은 남자의 조각난 몸을 스치며 전시 공간의 기둥에까지 이어진다. 두 조각 사이의 관계는 명확하진 않지만, 여자가 든 실오라기는 남자의 몸을 경계 지으며 전시 공간을 아우르는 새로운 축을 형성한다. 새로 등장한 여자 인물은 기존의 작품에서 보여줬던 인물들에 비해, 현실적인 인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연관하여 별도로 구성된 쇼윈도우 공간에 전시된 다른 여자도 일상적 인물의 모습으로, 앞서서 본 여자 인물처럼 붉은 천으로 몸을 반쯤 가린 채 다소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벌거벗지도, 가리지도 앉은 채 몽롱한 표정으로 서있는 여자의 얼굴과 몸은 열병이 일어난 듯 붉은 반점이 울긋불긋하다. 마치 꿈속에서 밤새 투쟁과 갈등을 벌이다 아침에 눈을 뜬 듯, 열병이 난 여자는 골똘히 지나간 상념에 잠겨 있다.
두 여자 인물의 경우 리얼리티가 강해진 인상이지만 몸에 두른 천의 모호한 모양새나 쓰여 진 글귀 등 복합적 내러티브는 오히려 비현실적 분위기를 지닌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 개인과 사회, 꿈과 현실, 욕망과 좌절 등 상이한 가치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관조하고, 이를 매개해나가는 중간자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전시의 큰 줄기를 구성함에 있어 작가가 동상이라는 구시대적 조각 형식을 차용한 것은, 시대적 환경으로부터 변화하는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들을 스스로 점검하고자 하는 자기 성찰적 태도에서부터 비롯한다. 일상적으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동상이 지닌 조각적, 수공적, 아날로그적인 특징은 현시대에 와 이전의 유물로 인식되며, 하나의 모뉴멘트로서 상징적 기능만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구식의 양식이 대변하고 있는 조각의 위상은 전시장의 바닥에 쓰러진 남자 인물을 통해 그 가치가 전환돼 보인다.
조각이라는 장르를 기반으로 하여, 회화, 문학, 연극적 요소를 조각 작품의 내외부적으로 관계시켜왔던 작가는 조각가로서의 본연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지금 시대에 있어서 조각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시 공간 속에 펼쳐내 보인다. 이는 급변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변화의 축을 감지하되 동시에 상쇄되어가는 근본적 의미를 고찰해내는 예술가의 운명적 상황과 맞물린다. - 심소미 (큐레이터, 갤러리 스케이프)
1971년 울산광역시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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