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년07월08일 이탈리아 로마 출생 - 1656년

이탈리아에서 활동

추가정보

그녀는 아버지이자 화가였던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장녀로, 오라치오는 카라바조 학교의 대표자들 중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화실에서 처음으로 회화를 접했으며 그녀의 남동생들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로잉과 유화, 색을 섞는 법에 관해서 아버지에게 배우게 된다. 그 때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카라바조풍의 강렬한 명암법과 색감 스타일, 주제 등은, 아버지인 오라치오에서 아르테미시아에게까지 넘어간다. 그러나 아르테미시아는 이러한 화풍과 당시 전형적인 회화의 주제에 관해 오라치오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첫 작품은 수산나(1610년작)로 그녀가 17살이 되던 해에 완성되었는데, 아버지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1612년, 그녀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성들이 전부였던 미술학교에 입학을 거부당한다. 이 시기에 아버지 오라치오는 아고스티노 타시와 로마의 대저택을 꾸미는 공동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오라치오는 토스카나의 화가였던 그를 고용하여 아르테미시아를 개인적으로 가르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타시는 그녀를 강간하게 된다. 그 이후 타시는 그녀의 명예를 위하여 그녀와 결혼하기로 약속했으나, 훗날 약속을 이행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로 인하여 오라치오는 타시를 고발하게 된다.

재판은 7개월간 지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타시가 그의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의 처제와 간통을 하고 오라치오의 작품을 훔쳐내려는 것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재판 도중 아르테미시아는 부인과 진찰대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것은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로, 만약 그 사람이 모진 고문 와중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진실이라는 당시의 보편적인 관점 때문이었다. 이 재판 이후 타시는 1년 형을 선고받게 되고, 이 이야기는 훗날 20세기의 페미니스트들의 아르테미시아에 대한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1612-1613년작)는 나폴리에서 전시되었는데, 생생하게 표현된 잔인성이 주는 인상은 아르테미시아가 겪어야 했던 고통에 대한 정신적 복수심을 나타낸다고 해석되었다.

재판이 있는지 한달이 지난 후, 그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오라치오는 플로렌스의 한 화가인 피란토니오와 그녀를 결혼시킬 준비를 한다. 그녀가 플로렌스로 이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테미시아는 카사 부나로티의 청탁을 받아 왕실화가가 되었으며 메디치 가문의 찰스 I세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이시기에 그녀는 <Madonna col Bambino(The Virgin and Child)>를 그렸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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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dith Slaying Holofernes

    Oil on canvas, 199x162cm , 1614–20, 우피치미술관(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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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

    1630s, Royal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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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sanna and the Elders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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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dith and her Maidservant

    Oil on canvas, 16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