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망
Aqua Frego 아크릴박스 속 물감튜브, 70x40x10cm, 2005
카플란
Hiver a Saint-Tropez Oil on Canvas, 2009
아르망
Chaise violoncelle 1993
카플란
Alchimie de la nuit Oil on Canvas, 2009
아르망
La Majeur 1986
카플란
Aqua alta a Venise Oil on Canvas, 2009
아르망
Luth “Oum Kalsoum” 1986
카플란
Faubourg Saint - Jacques Oil on Canvas, 2009
아르망
Mur de violons 1986
카플란
Flamboiement rue de Rivoli Oil on Canvas, 2009
아르망
Tranches de Lagoya 1986
카플란
Marche dominical a Aix Oil on Canvas, 2009
아르망
1928년 프랑스 니스 출신으로,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두각을 나타내었고 독서를 즐기는 조숙함을 보였다. 훗날 그의 독창적인 개념과 텍스트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만들어져 왔었다는 평을 들을만큼, 성장기 때부터 빼곡히 적어내려 갔던 수백권의 노트는 남달랐던 아르망의 유년시절을 보여준다. 특히 골동품 딜러이자 첼로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과 수집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감각을 갖게 되었던 아르망은 훗날 이러한 경험들이 작품에 모두 투영되었다고 회고한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자주 다녔던 박람회에서는 자동차, 커피 그라인더, 바이올린등 당시의 기술적 업적을 자랑하는 시연이 열렸는데,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방법을 매체를 절단하여 내부를 보여주는 광경은 아르망의 해체 기법등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들이 상상하지 못한 것을 상상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아르망의 능력이 바로 작품으로 연결된 것이다. 청소년기에 만난 같은 고향 친구인 이브 클라인(Yve Klein) 및 클로드 파스칼(Claud Pascal)과의 교류는 그들이 함께 예술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유럽각지로 수차례 배낭 여행을 함께 떠나며 예술에 대한 생각과 열정을 공유했다. 훗날 이브 클라인은 미술계에서 활동하며 아르망과 함께 누보 레알리즘을 함께 창시하였고, 클로드 파스칼은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니스의 장식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아르망은 빠리 에꼴드 루브르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였으며, 동양 철학에 심취하기도 하였고 스페인의 유도 학교에서 유도 강사로도 일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1954년 파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아상블라쥬>와 <천과 우표의 축척> 등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작가로 데뷔하였고, 1960년 파리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Iris Clert gallery)에서 열렸던 “꽉참(Le Plein)” 전시는 전시장 내부를 버려진 쓰레기로 가득 채우는 대담한 전시로 유럽 미술계에 큰 반항을 불러왔다. 아르망은 구슬, 단추, 시계, 악기, 자동차 등 일상의 오브제를 쌓아올리며 예술을 평범한 삶에 동화시켰고, 일상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아르망의 회화언어는 폐기물을 유리상자에 넣은 소포 시리즈와 같이 대량생산품을 쌓아올리는 ‘집적(accumulation)’, 그리고 악기 시리즈와 같이 기성의 사물을 해체하고 재조합해내는 ‘아쌍블라쥬 (assemblage)’ 두 가지 기법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미술의 평범한 시각에 도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1960년대 당시의 국제 미술계는 추상표현주의가 유행하며 무의식과 영감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 우세하였으나, 아르망과 그 주변 예술가들은 이를 현실도피라 비판하며 예술의 현실로의 복귀를 꾀했다. 아르망은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를 위시하여, 이브 클라인, 장 팅글리(Jean Tingluely)와 같은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누보레알리즘 선언문에 서명함으로서 누보레알레즘 그룹 창립에 가담하게 된다. 피에르 레스타니( Pierre Prestany) 는 “아르망이 그의 작품에서 쌓아올린 오브제들은 변하지도, 본질에서 벗어나지도 않으며, 복제되지도 않는다. 단지, 현실에서 빌려왔을 뿐이다.”라고 평하며, 일상의 물체(오브제)가 예술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아르망의 악기 시리즈는 해체되고, 잘려지고, 분해된 악기 파편의 재조합으로, 소리를 낸다는 악기 본래의 기능은 박탈당했으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에너지와 리듬감을 통해서 내면을 울림을 전하고 있다. ‘들리는 소리’가 ‘보이는 소리’로 전환된 것이다. 이처럼 아르망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보는 이에게 새로운 시선을 제기하며, 관람객이 그들 스스로의 의식과 삶을 끊임없이 재평가하길 바랬다. 1991년 휴스턴 미술관에서 열린 주요 회고전(Major Retrospective) 과 1998년 파리 국립주드폼 미술관 (the 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 의 회고전 등 아르망은 그의 생에 걸쳐 600회이상의 주요 개인전을 가졌다. 1982년 까르띠에 재단에 설치된 장기주차 (Long Term Parking)을 비롯하여 1984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엘리제 궁에 조각품 제작의뢰를 받아 공화국(A La Republique)을 제작하였고, 영원한 보관소(Consigne a Vie)와 모두의 시간 (L’heure de Tout) 등의 작품은 생-라자르 역에 설치되어 있다. 2002년 암 선고를 받고 나서도 작품 활동을 정진하다 2005년 10월 22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그의 회고전이 세계 도처에서 열리고 있다.
마크 카플란
마크 카플란(Mark Kaplan)의 작품은 처음보는 사람들에게도 왠지 친근한 인상을 준다. 섬세한듯 시원스런 붓질과 찬란한 태양빛 또는 아른거리는 별빛을 떠올리게 하는 색채의 향연은 우리에게 친숙한 고흐의 작품을 연상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태생의 정통 미술공부를 했을 것이라 단정 짓기 쉬운 그의 이력은 정작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레닌그라드 조형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하였으며, 영극영화학교에서 무대디자인 수업을 이수했다. 러시아 영화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던 당시에 영화예술감독이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영화제작과 무대연출을 경력을 쌓아 갔다. 1980년 그는 더 넓은 세계를 찾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게 된다. 암스테르담은 평화와 공존의 맥박이 뛰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카플란 스스로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렘브란트(Rembrant : 1606~1669)와 반 고흐(Van Gogh : 1853~1890)를 키운 도시로도 유명하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빛과 어둠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듯한 그만의 명암법은 그가 남긴 수많은 자화상을 통하여 그가 남기고자 했던 인간애를 전하고 있다. 또한 당대 암스테르담의 부유함과 역동적인 모습을 찬란한 색채와 붓터치를 통해 표현해냈다. 고흐 역시 빛의 화가로 대변되는 그의 명성처럼 신학공부를 하기위해 찾아간 암스테르담에서 사랑하는 여인 케이를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삶의 빛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오늘날 유명한 고흐의 미술관이 있는 곳이 바로 암스테르담이다.
카플란은 이 도시에서 20여년을 머물며, 무대 및 영화예술 감독으로 종사한다. 이탈리아 희극작가인 카를로 콜도니(Carlo Goldoni)에게 헌정된 코미디 뮤지컬을 위해 붉은 벽돌길이 태양빛에 노랗게 반짝거리는 이탈리아의 풍경을 그려냈고, 조명장치를 통하여 마치 곤돌라가 흘러내려가는 듯한 베니스의 수로를 재현해냈다. 동시에 꾸준히 회화를 병행해왔던 그의 미술작품을 처음으로 전시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연극무대나 영화세트를 제작하면서 익힌 공간구성 감각과 빛을 조절하여 얻어낼 수 있는 시공 변화의 연출력은 그의 회화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풍부한 색감과 탄탄한 화면구성, 그 속에서 마치 공기가 흐르는 듯 빛의 흐름을 그려낸 그의 작품은 소개와 동시에 많은 사람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다수의 영화와 연극 작품을 제작하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회화 작품에만 몰두하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그는 암스테르담을 떠나 남 프랑스, 프로방스로 떠난다. 한쪽은 초록빛 바다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작은 구릉들의 펼쳐진 생 트로페가 바로 오늘날 카플란이 살고 있는 도시이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면한 생트로페(Saint-Tropez)는 자연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으로 1904년 마티스, 시냐크 그리고 크로스와 함께 체재하며 신인상풍을 짙게 받아들였던 곳이다. 특히 폴 시냐크(Paul Signac : 1863~1935)는 다양한 색점들로 그려낸 1899년 작 <생트로페의 항구>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생트로페의 자연풍광을 널리 알린 작가 중 한명이다. 현재는 프랑스 배우 브리지토 바르도를 비롯한 세계의 유명인사들이 그들의 휴양지로 즐겨 찾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Hiver a Saint-Tropez :생 트로페의 겨울은 카플란이 유년시절 기억하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과는 다른 남 프랑스의 따듯한 햇빛이 함께 하는 그의 동경을 겨울이라는 계절감이 차가움이 아닌 포근함의 노란빛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훌륭한 메뉴가 있어서가 아닌라 그저 분위기가 좋아서, 테이블보가 예뻐서, 짚으로 엮은 의자가 멋스러워서 발걸음을 향하게 하는 레스토랑. 레몬빛 테이블 위에 놓인 파란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노란 의자 위에 놓인 에메랄드빛 쿠션을 바라보는 순간! 하얀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보랏빛 접시 위에 놓인 잘 익은 양고기와 빛나는 샴페인을 내어올 때, 그날밤이 아름다울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찬미한 작가의 말처럼, 카플란은 남 프랑스의 햇볕을 거닐며 마치 작가가 아닌 제 3자의 시선으로 평범한 하루하루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겨 놓고 있는 것이다.
카플란은 오랫동안 미술계를 지배해왔던 ‘개념주의’의 부조리한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회화가 시작된다고 말하며 회화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문제를 제기하거나 어떤 특정 이념이 앞서고, 그것을 위한 증명과도 같이 작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화면의 힘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할 수 있는 힘. 계속 그 그림을 바라보고 싶고 만지고 싶게 하는 힘. 그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카플란은 티치아노 렘브란트, 고야의 그림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들 대가의 초기 작품과 말기 작품의 추이를 연구하며 작품이 무르익을 수록 디테일이 아닌 본질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의 삶속에서 발견한 진부한 풍경들을 부분묘사는 과감히 생략하며 강렬한 색채와 구성만으로도 우리가 지나치기 쉬웠던 소소한 것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있다. 평범한 순간의 한 장면은 강렬한 노랑, 파랑 혹은 붉은 색채의 붓터치 속에서 잊혀질 수 없는 한 장면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비슷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속에서 찾아내야 할 본질과 그 속에 숨은 뜻을 되짚어 보게 하는 점. 바로 그것이 우리가 카플란의 작품속에서 끊임없이 감동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아르망 피에르 페르난데스(Armand Pierre Fernandez)
1928년 프랑스 니스출생
1957년 러시아출생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초상
리움미술관
2024.07.18 ~ 2024.11.24
예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관문
서울대학교미술관
2024.09.12 ~ 2024.11.24
Mindscapes
가나아트센터
2024.10.16 ~ 2024.11.24
부산 청년예술가 3인전 《응시: 세 방향의 시선》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2024.10.26 ~ 2024.11.24
송준: Blue Eclipse Episode 3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2024.11.14 ~ 2024.11.24
Wherever : 순간이 새겨진 곳
이응노의 집
2024.10.29 ~ 2024.11.24
꽃 보다: 이철주의 작품세계
이천시립월전미술관
2024.09.26 ~ 2024.11.24
송영규: I am nowhere
갤러리 그림손
2024.10.30 ~ 202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