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근
여행-봄 캔버스에 유채, 91x65cm, 2012
전영근
여행 나무에 채색, 68.5x59x3cm, 2012
전영근
여행-산을 오르다 나무에 채색, 53x29x29cm, 2012
전영근
여행-여름 oil on canvas, 91x65cm, 2012
전영근
여행-언덕을 지나며 oil on canvas, 162x112cm, 2012
한 잔의 홍차와 같은 여행 또는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
1. 이맘때면 차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를 탔다. 봄이 왔고 길은 시원했다. 간간히 봄비가 길을 적시면 창문을 연 채 천천히 차를 몰아 바람과 함께 숨을 쉰다. 좀 더 멀리 가는 것도 좋다. 자유로를 내달리거나 아니면 양평과 춘천을 지나 강릉과 속초로 나가보는 것이다. 첫 사랑과 함께 했던 장소, 실연의 기억을 더듬어도 본다. 동해에 도착하면 차를 세우고 짙은 푸름으로 넘실대는 파도와 춤추고 소금기 찐한 바람을 껴안고 떠나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가장자리가 하얀 혹은 은빛으로 빛나는 비늘구름이 떠있다. 갑자기 태양이 크게 보이는 것은 햇빛이 평소보다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동차가 나온다. 그리고 자동차만큼이나 길이 나온다. 신작로이든 비포장 시골길이든. 잘 알려진 국도나 강변로를 따라 또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기도 한다.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자동차가 한 대나 또는 두 대가 덩그러니 있는 길은 결코 모두가 함께 쉬는 휴일이 아닐 것이다. 다른 이들이 모두 일상에 속한 시간인 것이다. 그런 시간은 어디라도 휴식이고 여행이 된다. 그러면 그 시간대를 사는 사람들은 일상과 일상 사이를 건너다니는 시인이거나 화가가 된다.
여행은 현대 사회의 문화를 상징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사람들이 공통으로 꿈꾸는 것이기에 많은 예술가들의 주제로 다뤄졌다. 괜찮은 여행은 인생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한층 달라보이게 한다. 생활을 돌아보고 번잡한 일상을 벗어나서 어떤 열정과 감흥에 나 자신을 고스란히 던져놓는다. 그 가운데 어떤 한계를 느끼고 그것을 뛰어넘기도 한다. 생계를 위한 또는 볼거리를 찾아 떠나는 관광이 아닌 말 그대로 무언가를 경험하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삶을 반추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곳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산다는 것이 옳다고도 말했다. 여행은 내밀한 경험으로 가득한 진짜 삶을 살러 가는 것이다.
인생이니 삶이니 어쩌면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어디론가 떠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전영근의 그림은 상투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로망을 건드린다. 로망이란 욕망의 다른 말이다. 로망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존속한다. 로망은 상투적이고 보편적이며 한 세대가 함께 공유하는 공감이다. 바로 그 상투성이 공감의 요체다. 매일매일 비슷비슷한 옷을 갈아입는 사물이 달리 보인다.
자동차는 더 이상 이동수단만은 아닌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자동차는 모험가의 세계였다. 모험과 열정으로 가득한 현대의 상징이었다. 자동차를 타는 것은 꿈과 열정에 몸을 얹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담한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것은 오래된 로망이자 내면의 소리를 듣는 계기다. 완전한 몰입이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기계라기보다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여행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말이나 낙타 또는 노새처럼 숨 쉬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빠르고 편리한 비행기나 초고속 KTX가 아닌 그림 속 자동차는 굳이 약속된 시간에 어딘가에 도착해야할 이유가 애초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문화이고 상징이며 한가함의 은유이다. 변덕스런 감정을 추스리고 삶을 관조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움과 서정抒情이다.
어린 시절 자동차를 처음 탔던 기억은 단지 빛바랜 추억만은 아닌 것이다. 좁은 국도를 따라 꿩이 날아오르고 고라니가 놀라 달아난다. 나무 그림자가 채찍처럼 날카롭게 휘감겼던 원형의 기억은 생생하고 구체적인 만큼 전투적이며 격렬한 갈등과 교묘한 화합으로 채워진다.
2. 어떤 시인은 길은 그리움이라고 말했고 또 다른 이는 길은 인생이라고도 말했다. 잠파노와 젤소미나의 ‘길’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두껍게 채색된 흑백의 기억을 달린다. 굽이굽이 돌아내리고 오르는 과정은 시가 되고 그림이 된다. 대관령과 한계령과 미시령을 차례로 오르고 내리는 시간은 그 자체로 솟는 시간이다. 과거도 미래도, 서론도 결론도 없이 단지 어떤 중간 지점에서 갑자기 출현한다.
그림은 너무 앞서가지도 너무 뒤처지지도 않은 길에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앞서가지도 않는다. 나무와 꽃과 구름과 풀과 어울려 어디쯤인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어떤 그림은 따듯하고 어떤 그림은 모호하다. 또 어떤 그림은 익숙하다. 너무도 익숙하여 신파적이기까지 하다. 거대한 산보다는 아담한 산등성이를 오르고 거친 파도보다는 햇살이 좋은 잔잔한 바다를 본다. 등짐을 진 자동차는 일상을 떠나는 이들의 초상이 되고, 캔버스를 걸고 그림은 새로운 경험으로 시동을 건다.
어떤 거창한 이념도 논리도 목적도 없이 이야기의 선을 그려간다. 우화처럼 시리즈로 펼쳐지는 그림들은 오랜 시간 화가의 삶을 꾸려가는 과정을 함께 해온 것이다. 어떻게든 보내든 하루는 갈 것이고 내일은 오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상상이나 공상으로만 그려온 시간을 담담히 해내었다. 살고 살아지는 것이다.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날리고 꽃이 피고 졌다. 비가 스치고 눈이 쌓이는 떠남을 작가는 해온 것이다.
그림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또는 앞으로 잃어버릴 것을 미리 그려낸다. 기억들은 뭉뚱그려져 하나의 씬을 이룬다. 자동차가 달리는 것은 길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인 것이다. 비록 망각되었을지라도 만물은 자신의 이름이 있다. 무엇을 보았고 무었을 이야기 했으며 또 무엇이 되어보았는지는 기억할 수 없어도 세상은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속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름 모를 것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전 마르셀 프루스트가 사소한 기억을 떠올리면 시작하였던 장대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낯선 시간은 결코 처음이 아니라 반복해서 펼쳐졌던 시간들인 것이다. 이미지들의 길고긴 행렬이 벌어진다. 그것은 기억의 행진일 지도 모른다. 체험을 기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기억에 대해 기억하는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현대성의 끝에서 그림그리기의 즐거움이 등장한다. 작가는 아주 밝은 빛이 투사된 꿈을 ‘함께’ 꾼다. 물감과 붓질 사이로 의식과 무의식이 교묘하게 얽혀들고, 기억과 망각이 서로의 경계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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