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택 1932-2012: Earth,Wind and Fire
2012.08.24 ▶ 2012.10.21
2012.08.24 ▶ 2012.10.21
이승택
바람 1969
이승택
기와설치 작품 2000년대 후반,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액자작업001 2012,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액자작업002 2012,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액자작업003 2012,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결국 예술은 쓰레기가 되었다 1997,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고드랫돌 1958,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고인돌에 링거 1967
이승택
구름위의 죽은나무 1980,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녹의수난 1996,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물그림 1986,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바람-민속놀이 1971
이승택
새 싹(엽생) 1963,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설치된 각목 1973,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소불알 1958,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이승택
어긋난 흰그림자 1984, 성곡미술관제공이미지
성곡미술관은 원로작가회고전, <이승택 1932-2012: Earth, Wind and Fire>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한국현대미술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현재인 한국의 대표적 아방가르디스트(Avant-gardist) 이승택이 지난 60여 년 동안 세상에 펼친 예술실험과 열정을 돌아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평생을 ‘안티(Anti)정신’으로 살아온 작가가 혼신을 다해 제작한 대형설치작업 20여점을 엄선하였으며 조각, 회화, 도자, 사진작업 등 총 80여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드로잉, 육필 원고, 사진자료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 일부가 최초로 공개되는 이번 전시는 끊임없이 기성의 가치에 도전해온 작가의 실험적 예술세계는 물론, 치열한 예술정신을 오늘에 되새길 수 있는 드문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승택 1932-2012: Earth, Wind and Fire
미술관 전관에 걸쳐 마련되었음에도 이승택의 방대한 실험과 작업을 충실히 수용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다만,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평생을 주류와 타협하지 않고 그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일체의 집단 활동을 삼가면서 파란만장한 한국현대미술사 속에서 자신만의 작업영역을 꿋꿋하게 개척해온 작가의 실험정신을 이렇듯 소개할 수 있음을 미술관은 기쁘게 생각한다. 남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담으려 했던, 천상 예술가 이승택의 혼신을 다한 예술혼을 오롯이 느껴 보기 바란다. 특정 장르와 형식에 매몰되지 않고 파격적 예술행보를 이어오고 있는 작가의 살아 있는 정신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택, 세상에 반(反)하다
역사 속 제(諸) 부문이 그러했듯 예술은 전통에 대한 극복과 도전을 통해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 전통을 부정(repudiation)하고, 비판적으로 반복(repetition)하며 때론 그것을 확장, 증폭(amplification)해나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앞으로의 예술 또한 그러한 부침을 거듭하며 진화해나갈 것이다. 전통뿐만 아니라, 예술은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 미감, 제작 동인(動因)과 같은 주류 현상이나 개념에 대한 반(反), 탈(脫), 후기(後期) 개념으로 작동하며 기존과 길항하고 기성을 견제하며 오랜 세월 기능해왔다. 기성의 형식과 가치에 반하는, 기존 질서 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그 무엇을 창조해내거나 그것과의 명확한 단절을 고하는 형식과 행동을 실천적으로 제시해왔다. 또는 기존의 작법이나 규율을 벗어나 다른 차원의 질서와 교류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그들의 어법을 도입하거나 결합시키는 작업도 이어왔다. 극복해야할 대상으로서 기존 지배가치를 인정하되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고 발전시키는 작업도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현대미술의 오늘을 있게 하였다.
이들의 노력에서 중요한 점, 또는 공통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전통, 혹은 당대의 기성가치(thesis)에 대해서 이른바 안티-테제(Anti-thesis)로서 기능하였다는 점이다. 옛말에 ‘고이면 썩는다’고 했다. 진화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정체하고 있는 예술은 반드시 썩는다. 살아 있는 듯 현란하게 위장하지만, 이미 죽은 예술이다.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예술이라는 자전거는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썩지 않으려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성과 타성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자극하고 고독의 최전선에서 자신을 걷잡고 다독이는 자들에 의해 현대미술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미술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안티, 이른바 세상을 뒤집어서 보려는 ‘반’개념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개념과 반개념의 충돌과 길항(拮抗)이야말로 기성화단에 긴장을 자아내고 건강한 미래적 성숙과 발전을 도모한다.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실험은 대부분 당대에는 기성에 의해 무시와 멸시를 당하기 일쑤지만, 훗날의 광영은 이들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미술의 역사는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중세 천년 동안 이어진 신(神) 중심의 세계관과 맞선 르네상스인들의 인간 중심의 질서가 그러했다. 또한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리스, 로마의 세계관과 철학, 조형논리를 지나치게 노예적으로 모방하고 따른 것에 대한 매너리스트들의 노골적인 거부감, 즉 대상과 형태의 부분 왜곡, 과장, 변형은 낭만주의는 물론 현대미술의 표현주의를 멀리 잉태한 것일 수도 있다. 세잔느의 세상을 담는 전혀 다른 시각과 시도가 없었던들, 피카소와 마티스의 자유로운 상상도 없었을 것이며 오늘날의 현대미술의 풍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다. 뒤샹의 악마적 저항이 없었더라면, 변기는 판매점과 화장실에서만 기능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오브제 작업이라든가 오브제로부터 비롯한 설치작업은 어쩌면 아직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백남준의 예술정신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남과 다르게, 기성화단과 예술제도, 예술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하지 않는 것을 과감히 실천해나가는 사람.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자들. 자기만족과 현상유지를 부정하고 극복하기 위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노력하고 실천하는 자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현대미술과 미술의 내일은 존재하며 가능할 것이다.
미국여행길에서 만났던 작가미상의 ‘평범하지 않은 새(uncommon bird)’라는 조각작품이 떠오른다. 전선줄에 나란히, 편안하게 앉은 새들 대부분이 같은 방향을 일제히 바라보고 있을 때, 그들과 반대의 방향을 예의 바라보는 한 마리의 새가 있는 작은 작품이다. 그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마리의 새. 그 새가 훗날, 결국 세상을 바꾸는 새일 수 있다는 메시지의 작품이다. 반개념, 혹은 당대 보편적인 양태와는 다른 시도와 태도는 때론 주류로부터의 탄압과 노골적 소외, 집단 따돌림 등으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그에게 가능한 모든 물리적/심리적 폭력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세상을 바꾸어가기 때문이다. 독설과 파격으로 전위(前衛)적이고 미래적인 작업으로 세상을, 미술동네를 심하게 흔들지만, 그가 있어 미술은 진정 긴장하고 발전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부르기도 한다. 틀린 말 아니다. 미치지 않고 어떻게 질곡의 한국현대를 살아 올 수 있었겠는가?
미치면 미친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 미쳐서(concentrate) 미친(reach) 사람 이승택. 그를 부르는 많은 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예술가라면 모름지기 세상의 모든 가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과 비평적 거리를 견지하며 세상을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려는 치열한 자기노력이 필요하다. 당장의 시류에 편승하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특정 양식을 좇는 한 예술의 미래는 없다. 오늘도 없다. 예술가도 없다. 물론 꽃의 아름다움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예술이 어느 하나에 집단적으로 매몰되거나 봉사하는 단순형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정, 부정의 변증법, 변증법적 진화, 혹은 발전논리는 사회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다. 부정을 통한 긍정, 긍정에 대한 부정. 끊임없는 현실부정에의 논리가 진정한 현대미술의 핵심이자 가치요, 이승택 예술실험의 직접적인 모티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전통뿐만이 아니라, 인습, 관습, 재료, 형식, 제도, 기성, 가치, 장르의 고유성, 유형적 특징, 재료와 개념에 대한 거부와 부정의 총체적 논리일 것이다.
이승택, 비(非)물질로서의 오브제
이승택의 작업에는 송골매의 부리와 같은 날카롭고 매서운 독설이 가득하다. 그의 작업은 기존 예술형식에 대한 노골적인 부정과 역설, 통렬한 비판 그 자체다. 기성의 예술권력에 절대 빌붙지 않았고 자신에게는 물론, 세상에 단 한 번도 굴(掘)하지 않았으니 매사에 거침이 없다. 일체의 가식이 없는 직설적인 작업과 그의 자신만만한 행동을 두고 세상은 고집불통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누가 이승택 만큼 당당하고 떳떳하랴.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작가 이승택의 세상에 대한, 당대 예술에 대한 엄정한 호통과 고함이 세대를 초월하여 힘을 획득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의 작업은 의식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끌어 올린 냉정하고 철학적인 힘으로 넘쳐난다. 기성가치에 대한 균형 있는 조롱과 해학도 있다. 그의 아방가르드 60년이 동서양의 시대를 초월하고 넘나들며 현재도 가능하고 기능하는 까닭이다.
이승택의 전위(前衛) 60년을 관통하는 예술실험 모티프는 단연 ‘비(非)물질’이다. 누가 보아도 결코 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사소하고 허접한 것들에 대한 애지적 관심으로부터 그의 작업은 비롯했다. 세상 모두가 국내외 동시대의 미감을 따라잡으려 경쟁하고 또 무언가를 잘 꾸미고 만들려고 애쓰던 시절, 그는 모든 것을 뒤집었다. 구체적인 형태나 형체가 없는 비(非)물질에 주목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안료나 지지체 등과 같은 당면한 물질의 문제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물질로 드러내려 할 때, 비(非)물질적 존재를 환기시키는 아이러니를 세상에 내어 놓았다. 전통은 물론, 당대의 주류 미술관념을 벗어난 파격을 잇달아 선보이며 화단의 이단아, 문제아를 자처했다. 세상은 그를 반항아로 보았지만, 그는 진정 자유로운 예술가였으며 영혼이 건강한 자유인이었다.
이승택은 세상의 수많은 오브제 중, 특히 전래의 ‘고드랫돌’이라는 오브제를 모티프로 예술의 기원이자, 오랜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주술(呪術)적, 제의(祭儀)적 충동/행위를 현재적으로 풀어내고 이어왔다. 주지하다시피, 고드랫돌은 오래전부터 조상들이 사용해오던 생활 오브제로 발이나 돗자리 등을 직조할 때 날을 흔들리지 않게 길게 늘어뜨려 붙잡아 두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약간의 물리적 무게감은 있으나 시각적으로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동글동글한 생김새를 간직하고 있다. 주로 돌, 혹은 사기, 도자, 나무 등으로 만들어 사용했으며 가운데 실이 감기는 부분이 움푹하게 파여 있는, 대체로 어색한 좌우대칭을 취하고 있는 안정되고 미더운 모습이다.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 만난 고드랫돌의 강하지만 부드러운 인상은 이후 그의 작업을 조율하는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특히 그의 작업 전 시기를 관통하는 역설(逆說)과 반(反), 비(非)개념 등도 이러한 고드랫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을 감고 매달거나 꽁꽁 동여매면 사물에 대한 기존 인상과 재료의 물성이 다른 느낌으로 변하거나 치환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렇듯 고드랫돌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사물에 대한 인식 전환의 계기로 작용한 중요한 모티프다. 기성과 기성가치,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비틀어왔던 작가의 지난 파격적 행위들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개념이기도 하다. 초창기 50년대 작업 대부분은 이 ‘고드랫돌’의 사물인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출발했다. 이 당시 주로 사용한 재료는 돌, 기와, 노끈, 나무, 철사, 철망, 시멘트, 석고 등이었다. 돌, 철사로 동여맨 사물인상은 자신을 옥죄고 있는 사회 현실, 개인적 처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막연함 등이며, 그것은 당시 ‘안개속의 자화상’(1965) 같은 회화 작업에도 투영되어 있다.
‘기와지붕작업’(1968-2012)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재료의 기존 물리적 구조나 질량감, 전통, 민속적인 전래의 관습을 비틀거나 감싸 안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승택은 미대 재학시절 실기실 바닥에 소조 진흙으로 만든 기와를 시작으로 1987년 서울올림픽조각심포지엄, 2006년 안양공공미술프로젝트, 2012년 일본 에츠코 츠마리 트리엔날레 등에 대형의 기와설치작업을 남겼다. 이는 전통문화에 대한 환기와 함께 일방적 개발 논리로 신음하는 자연을 위로하고 품어 안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로, 탁 트인 거친 벌판 위에 전통과 전통의 가치, 위선을 균형 있게 생각해보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세간에 익히 잘 알려진 그의 독설(毒舌)과 역설은 이미 대학 재학시절부터 사건의 연속이었다. 대학 1학년 시절인 1955년 이승택은 석고데생시간에 남들 다하는 방식으로 흰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전지 두장 크기의 대형 검은 종이 위에 흰 백묵으로 비너스 전신상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다. 당시 담당교수였던 이봉상 교수으로부터 ‘그림이 아니다’라고 혹평을 받기도 했다. 2학년 때인 1956년에는 하나의 받침대 위에 두 개의 조각상을 연출하여 국전에 출품하였으나 낙선했다. 하나의 좌대 위에 하나의 작품만을 용인하는 심사위원의 궤변에 크게 반감을 가지고 이후 국전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외곬인생을 시작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또 하나의 역설은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 ‘소불알’(1957)이다. 이는 “오뉴월에 쇠불알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는 속담을 반영한 작업으로, 쇠불알 떨어지면 주워서 구워 먹으려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꼬집은 작품이다. 노력도 없이 요행만 바라거나 치열한 작업 없이 예술가로 행세하는 허울 좋은 당시 예술가들의 세태를 반영하고 비튼 작품이다. 나무와 종이로 여러 점을 만들어 작은 액자 안에 달랑 매달아 두었다. 이렇듯 이승택은 당시 유행하던 앵포르멜이니 서구에서 유입된 추상표현주의 등등의 어법에 관심을 두거나 주목하기보다는 전통과 전래의 민담이나 전승의 가치들을 모티프로 이른바 한국적인 것들로 세계적인 것들과 싸운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전통, 허위의 가치, 가치를 위한 가치, 전통을 위한 전통, 세속적인 통념과 사물에 대한 고정된 관념 어리석은 생각을 까발리고 뒤집으려는 통쾌한 시도였다. 실제 액자 프레임에 달린 소의 음낭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 허위로서의 음낭이다.
1958년 미술대학 졸업전에서 이승택은 설치작품, ‘역사와 시간’(1관 1전시실)을 선보인다. 대학졸전 사상 최초의 설치작업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석고를 가시철망으로 감은 것으로 청색과 적색으로 동서진영을 각각 나누어 색을 칠한 파격적인 작업이었다. 당시 이념 대립이 첨예했던 냉전시대의 동서(東西)의 문제를 예리하게 반영한 수작이다. 초창기 이승택의 작품에는 사회적인 관심도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강대국들의 일방적인, 폭력적인 논리에 의해 국익이 유린되는 당시 약소국가들의 처한 현실을 지적, 고발한 작업이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받아들이는 이념의 온도차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으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는 사진으로 대체 출품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이승택은 초기 무속이나 전통으로부터 우선 벗어나 비(非)물질, 바람, 자연, 환경을 중심으로한 작업으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일깨우기 시작했다. 고드랫돌, 기와, 천, 헝겊, 사진 콜라주 등은 작가가 서구에의 문화적 종속을 견제하면서 작업을 이어왔음을 보여준다. ‘제3국의 예술은 우리의 예술이 결코 될 수 없다는 놀라운 자각과 우리의 현실에 기초한 우리의 미술을 해야한다’는 선동적인 작업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이승택의 순발력과 정곡을 찌르는 위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파격적인 실천과 행위를 용납하지 않던 당시 미대교육의 억압적 분위기와 집단적 따돌림 등 외적인 동인도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유전적인 측면에서도 반골기질이 있었다고 작가는 술회한 바 있다.
바람-민속놀이, 1971196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세상에 선보이기 시작한 바람 작업은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토속적인 풍어제의 울긋불긋한 깃발 형태를 응용한 것이다. 시각적, 물리적 생동감과 현란함,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를 우렁찬 소리와 함께 시각화, 형상화하는 작업이었다. 존재와 자연 그리고 물질의 완전한 합체로서의 비(非)조각, 비(非)물질, 반(反)개념, 반(反)예술이었다. 기존 질서와 고정 관념을 온몸으로 거부해온 작가의 치밀한 전략이자 울부짖음이다. 이승택의 오늘을 있게 한 결정적인 작업은 이러한 ‘비(非)물질’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이른바 실체가 없는 미술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일찍이 그는 바람, 불, 연기, 대기, 물 등의 비가시적 존재들에 주목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를 거치면서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작동했다. 이는 당시 전혀 새로운 실험미술로 본격적으로 국내에 퍼포먼스, 이벤트, 해프닝과 같은 예술이 본격적으로 상륙하기 10여 년 전의 얘기다. 1960년에는 한강 백사장에서 ‘연기나는 구조물’을 발표하고 그 행위결과를 드로잉으로 남기기도 하는 등 앞서나가는 예술실험을 펼쳐 나갔다.
이승택은 대자연을 배경으로 바람이나 소리, 연기, 물, 불(꽃), 구름, 안개 등 우주의 기운(氣韻) 등을 마치 초혼(招魂)하듯 불러내어 찰나(刹那)를 영겁(永劫)으로 매개하는 영매(靈媒)에 다름 아니다. 우주를 다양한 퍼포먼스로 끌어안고 어루만지면서 하나 되기 위해 노력했다. 자연미에는 인공미가 따를 수 없는 본래의 진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작업의 성격상 현재 남아 있는 실물 작업이 많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이승택은 폐쇄적인 학교 교육제도, 특정 사조, 잘 차려진 전시장, 캔버스 등과 같은 한정된 틀을 박차고 나와 지구 곳곳 광활한 대지에서 우주와 뜨겁게 조우했다. 그것은 마치 무속인의 내림굿 상황과도 같은 신비로운 비의(秘儀)적 과정이었으며 그의 퍼포먼스는 신을 받아들이는 접신(接神)처럼 울림과 떨림이 함께 하는 순간이었다.
1960년대는 비(非)물질적인 기운들을 본격적으로 찾아들어가고 끄집어내려는 시기였다. 불, 바람, 대지의 도도한 움직임, 제의적인 이승택의 퍼포먼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주술적인 작업으로 대자연의 힘을 주목했다. 내재된 기운을 드러내려는 시도, 힘, 에너지, 기운과 같은 비(非)물질적인 것을 강조했다. 1962년에는 경복궁 내 통행로 바닥에 ‘시멘트와 벽돌, 철사’를 결합시킨 작업을 설치하는 등 전시공간을 야외, 삶의 현장으로 이동하였다. 날이 묶여진 톱날, 물렁한 톱, 물렁한 식칼과 같은 발상과 인식의 대 전환을 촉구하는 부드러운 조각 등을 남겼다. 지금 보아도 당당하고 쨍쨍하다.
이승택을 사회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은 화판에 불을 붙여 강물에 떠내려 보낸 퍼포먼스 ‘떠내려가는 불붙은 화판’이다. 1964년 겨울 크리스마스날 한강 유역의 철통같은 군 경비를 뚫고 감행한 아찔한 작업이다. 이후 그의 작업에는 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분신하는 불상(佛像)’(1965-1971) 등이 그것이다. 1988년 수원 컴아트국제전에서 대형 크레인을 타고 불을 좌우로 흔들었던, ‘화제’(火祭)는 그의 불작업에 있어 단연 백미라 하겠다. 불을 개입시키면서 이승택은 도전, 저항의 기운들이 배어 있는 작업들을 적극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고인돌에 링거’(1966)를 투여한 작업, 생목과 헝겊을 결합한 ‘바람’(1969)작업, 끈으로 묶여 있는 ‘매어 있는 토르소’(1961) 등은 전쟁의 참화를 목도한 겪은 젊은 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부분들에 대한 울분이 표출된 것이다. 대부분의 이승택 작업이 그러했듯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작업들이었다. 인간 존엄을 옥죄는 당대의 사회정치 예술정치 현실에 대한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저항이 묻어난다. 이승택은 조각가이지만 회화, 드로잉 작업을 많이 남겼다. 직접 그린 자화상도 여럿 있지만, 유독 자각상, 자소상 등을 많이 남겼다. 1963년에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추상화와 자화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작가의 자의식이 대단히 강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사례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에서 5개의 초대형 자각상을 제작, 설치한 바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지지체로서 예술활동의 장으로서 사진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퍼포먼스의 사진 기록은 물론 사진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오브제로 인식하고 사고의 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태양열에 노출되어 변형된 사진작업이라든가, 그린 꽃을 바위에 설치하여 사진으로 기록하는 등 대지를, 우주를 상대로 작업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1관 1전시실에 전시된 ‘각목+끈+비닐헝겊’(1967)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 당시로선 보기드문 작업으로 관객이 이들로 무엇을 만들던 작가가 관여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를테면 노끈이라는 오브제를 사용한 관객참여드로잉이라 할 수 있겠는데, 나무의 무게가 무게니 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70년대 들어 이승택 작업의 특징은 이른바 단단한 덩어리를 깎아 들어가 형태를 잡아내는 전통조각술이 아닌 비(非)조각작업, 즉 오브제로 작업하는 작업, 이른바 오브제 설치 작업들과 사진설치작업들을 시작했다. 이승택은 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기 시작했는데, 기존의 비(非)물질적인 관심이 자연, 환경, 지구, 우주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문명에 의해 훼손된 자연을 치유하려는 몸짓으로 수성물감을 분무기로 뿌렸던 ‘이끼 심는 예술가’(1975) 작업이 대표적인 작업이라 하겠다. 이밖에 ‘녹의 수난’(1996), ‘기빠진 지구’(1992), ‘풀죽은 지구’(1992) 등과 같은 대형작업들을 제작하였는데 이는 자연 환경파괴의 주범이 다름 아닌 인간임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끼 심는 예술가’(1975)는 이끼를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는 메시지인데 실제 이끼씨와 거름, 흙, 색소를 절벽에 뿌리는 행위였다. 이후 녹(綠)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작업에 이입하면서 물, 불, 바람에 이어 지구, 환경으로 관심을 증폭시켜 나아갔다. 1979년 들어 지구에 대한 관심을 작업으로 옮기기 시작하면서 환경오염을 경고하는 퍼포먼스를 병행했다.
80년대는 행위예술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시기다. 한강변, 미아리 재건축 단지, 버려진 군화(軍靴) 폐기장에서의 행위, 논에 벼대신 잡초를 심는 행위, 절벽에서 폭포를 그리는 행위, 난지도 쓰레기장, 부산 경포대에서의 퍼포먼스 등이 그것이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쓰레기 미술이라는 비난을 담은 행위라든가 산 정상에 바다, 물, 그림을 역설적으로 설치하는 행위, 1994년 중국 만리장성과 천안문, 베이징시내에서 지구를 손수레에 태우고 시내를 관광하는 행위, 소나기가 내리면서 그려진 물그림(1995), 인사동 한 복판에서 행한 AIDS 예방 술따르기 퍼포먼스(2000) 등도 그것이다. 2관 3층에 마련된 동상제작(1956-2012) 관련 사진설치작업은 이번 전시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진행한 70여점의 동상작업을 병렬적으로 집약한 것으로 조각가의 사회적 현실과 역할을 아이러니컬하게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 성과 예술은 불가분의 관계라 했다. 이승택은 1970년대 들어 남녀의 심볼을 이용한 작업을 전개해왔다.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그의 작업은 평소 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이 그러했듯이 성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넘어서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번 전시에도 ‘19금’ 코너를 별도로 마련했지만, 최근 비보이 페스티벌에서의 벌거벗은 채 몸을 숙이고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여성의 하체사진을 어깨에 메고 뛰어다녔던 퍼포먼스라든가 남근이라든가 여성의 성징을 노골화한 작업을 꾸준하게 전개하고 있다. 아직 죽지 않고 빳빳하게 발기해 있는 작가의 이성과 감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물렁한 암석’(1964), ‘궁둥이’(1975), ‘털난 캔버스’(1975), ‘X-mas 구두’(1980), ‘재주부리는 혀’(1982) 등은 이와 같은 작가의 상식을 뒤집는 개념적 조합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성징을 강조하고 있지만, 세상 잘난 것들에 대한 독설과 야유, 제도와 기성에 대한 노골적 비판이 가득하다.
이승택은 작업에 있어 준거집단(reference group)이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극복해야할 무엇, 반대해야할 무엇이 있었다. 기성의 가치, 제도, 권력, 집단창작양식, 단체 활동 등이 그것이었다.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이유이자 힘, 성취동기, 원동력이었다. 예술가로서의 존재이유였다. 외로움, 질시, 다르기 때문에 고통 받고 힘들게 살아야만 했던 당시를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혼란의 시기, 격동의 시기였고 경제개발이라고 하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전력을 다하던 시기에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가란 무엇인가? 작업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뛰어 다니던 처절하고 치열한 시절이었다.
탁월한 조형감각과 접신하는 무당처럼 자연의 시공을 공격적으로 가로지르는 이승택의 민첩함은 어릴적 운동으로 단련된 특유의 공간 감각으로부터 길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택은 중학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한 바 있다. 공간을 효과적으로 확보하는 특유의 순발력과 공간지각력, 공간을 희롱하듯 치고 빠지는 특유의 인지력은 운동으로 길러진 탄탄한 몸과 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공간을 건들고, 공간에 치고 들어가 개입하며 하나로 어우러지는 능력은 가히 압권이다. 이렇듯 이승택의 조형에 있어 공간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출하는 것이다. 공간에 대한 고민과 해석과는 달리, 시간성을 담고 있는 작업도 있다. 바로 머리카락작업인데, 지난 1963년부터 이어져온 이 작업은 시간성을 강조하고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각각 신문제호와 날짜를 부기해 놓았다. 그에게 머리카락의 의미는 매일매일 사라지듯 다시 자라나는 기운이요, 힘일 것이다.
이승택에게 있어 예술은 선동(煽動)이요, 역(逆)이요, 반(反)이었다. 반(反)의 전쟁이다. 이른바 부정이다. 안티, 반(反)개념 정신이다. 주류와의 타협은 없다. 소외를 자초했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도전하고 부딪히고 앞으로 나아가는 돌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주류가 애써 외면한 것들, 소외된 가치들을 주목했다. 유행과 시류, 서구의 새로운 형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새로운 것, 멋져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몸을 던진 한국의 미술계는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 모노크롬 등으로 이어지면서 여전히 이젤과 캔버스, 물질, 질량감에 머물러 있었다. 정해진 몇몇 규율에 의한 캔버스의 표면, 제한된 그라운드 위에서의 제한된 놀음이었다. 반면 이승택의 예술실천은 파격 그 자체였다. 그의 그러한 저항 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세상을 역행하면 저절로 예술이 보인다’는 그의 말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이자 실마리일 것이다.
이번 회고전은 한국현대미술에 있어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승택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돌아보고 그의 고독했던 실험정신을 오늘에 되새기는 뜻 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시작이 반(半)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승택에게는 시작부터가 반(反)이었다. 이 시간에도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는 이승택, 이 세상 끝 날까지 그의 작업은 세상의 반(反)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32년 함경남동 고원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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