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연신
국화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2009
추연신
귤나무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2009
추연신
錦山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2009
추연신
단풍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2009
추연신
딸기 캔버스에 유채, 45.5x38cm, 2010
추연신
numerical value ALBA 소포지에 드로잉, 2009
시작점은 늘 작은 세포 하나에서부터 만들어진다. 그리고 물질의 생성 또한 작은 미립자에서 시작되듯이 나뭇잎을 떨어트리는 나무 또한 생성을 위한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다. 동시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갖추는 것은 실 한 올 한 올처럼 소소한 것의 중첩된 밀도에 의해서도 생성되는 것이다. 바다 또한 수증기 입자의 증가된 밀도에 따른 중량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조화로운 삶을 평화로운 삶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곧 서로 다른 개체들의 집합에 의한 구조가 이루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크게 자연물과 인공물로 나뉘어지는데, 단어의 말 자체에서도 차이가 있다. 자연물의 생성 조건은 세포의 분열이며, 인공물의 생성조건은 입자의 조합이다. 다시 자연물은 체세포 하나에서 변이를 일으키며 몸체를 환경에 맞도록 변형하고, 서로 다른 화학적, 유기적 요소에 화학적 변화량을 가미시킬 때 인공물이 만들어진다. 결과적으로 구체적인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입자의 물리적, 자연적 변화량에서 온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서 이루어짐은 완성된 면에 따른 화면의 비례보다는 불안정한 개체들의 조합을 의미한다.
점과의 인연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영혼의 울림처럼 자연스레 점점 증폭되다가 확대되어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 사물은 어렵지 않은 곳에 있다. 골목.. 계절 날씨 일상에 깊이 녹아들어 각기 다른 오감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사물의 아름다운 색상,. 가장 자극적인 시각으로 전달되는 자연의 색상은 어느새 시각을 뛰어넘어 후각 미각에서까지 잘게 부서져 대기 중에 포화된 상태에서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현대문명 속 새로운 제도와 사회현상을 구성하는 text의 혼합과도 같은 이치이지만 그 문명에서 동떨어진 원초적인 자연의 풍경에서는 질량과 밀도, 비율 등의 순수한 상관관계로 나타난다.
대학교2학년때의 일이다 철학수업의 일부분에서 세상만물의 모든 사물은 입자로서 환원되어지는 성질을 갖고 있으며 다시 입자를 통해 온전한 사물로 재탄생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생성구조에 따른 오랜 과학의 역사적 근원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이론으로 증명되고 해석된다. 시대를 거듭날수록 과학의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생성의 기초적인 구성 물리학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한 이론들은 지구상 모든 현상에 대한 궁금증을 밝혀내는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입자는 곧 사물이 생성되기에 필요한 원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무실의 책상을 살펴보아도 그 물질의 성분 특징과 화학적 성분은 모두 자연으로 비롯되는 동시에 인간의 인위적인 제조, 화합물의 융합으로 도구적 가치를 실현시켜주기도 한다.
19세기에도 과학에서 물질구조와 생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미술에서도 그 특징이 드러났다.
그림을 나타내는 요소중에 하나인 빛에대한 분석을 하였다. 빛은 사물의 윤곽을 나타내며, 어두운공간에 거리감과 공간감을 나타내는 특징을 갖고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중에는 이 빛의 변화와 빛으로 드러나는 색채의 상관관계와 색의 질량 분포도에 따른 자연광에 대한 연구를 그림으로 재해석하였으며 그 표현방법은 그로테스크한 미완의 추상성을 유지하여 현대회화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후기 인상파에 점묘법은 과학에서의 광범위한 입자, 질량구성에 대한 이론을 다 담아내지는 않더라도 그와 동시에 생성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를 주장하고 있다.
고질적인 병=점묘
계절이 변할 때마다 자연의 색상 또한 변한다. 자연을 밑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도시의 모든 미학적 건축물들과 인공 사물들에도 자연이 묻어난다. 어느 길을 걷든 어느 풍경을 보든 그곳엔 세월의 고즈넉한 사연이 녹이 슬어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가장먼저는 시각적 자극이 두드러진다. 광원으로부터 서로 다른 사물은 그 고유색을 공중에 분사시키고 서로 의 색과 혼합 된다. 이때의 색의 혼합은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 입자와도 같은 성질로 사물을 픽셀화 시키고 다시 궁극적인 색 면으로 그 사물에 자리한다. 나는 색상에 매료되어 점묘 작업을 하게 되었다. 물감의 순수한 물성과 색점 하나가 가진 무수한 이미지 와 추상성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인조의 풍경에서 나는 동경을 배운다. 앞에서 말한 모든 과학적인 측면에서의 입자는 생명의 태동의 근원으로 해석된다. 또한 기하학적인 인공사물의 생성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유화냄새 가득한 작업실에서 그러한 조건을 다 배제시키며 공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을 탐구하며 회화가 가진 전통적인 맥락을 지켜내고 싶을 뿐이다.
과학적 견해로서의 입자(dot)
점은 평면상의 표현을, 입자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어 이는 곧 생명이 탄생되는데 필요한 요소 (환경)라고 소개하겠다. 다윈을 비롯한 생물학계의 학자들에게 진화란 생명의 생성에 대한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물리 화학적 물질에서 원자의 쪼개짐 (분열)은 곧 물성 간에 새로운 결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자에서 분리되어진 입자는 다른 입자와 결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물학적 입자는 원자와 같이 분리되는 성질인 세포의 전이, 분열을 통해 새로운 종을 만드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점을 하나하나 찍으면서 달라지는 색의변화는 한개의 개체에서 분리된 또 하나의 세포가 계속되는 분열을 하듯이 동일한 분류의 색상을 복제하고 또 증가 시키는부분만큼은 단순한 액상의 물질이기보다는 생명력이 부여된 생물체와도 같은 변화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보았을때 입자의 유효함은 언제나 끈임없이 진행되며, 확장성을 부여해주는 원제 와도 같다.
나는 점묘를 동경한다. 점은 색 면으로 자리하기이전에 포말과도 같은 의미로 그 문명의 텍스트를 배제한 인간감성의 순수한 감탄사와 같은 희극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철학적견해로서의 점은 물자체에 대한 본질을 조금 더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며 새로운 융합의 매개체로서 늘 신세계를 발생시킬 수 있는 확장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초기 우주생성의 현상과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사회는 시각체계에 따르면 물질이 홍수를 이루어 그 개념에 대한 확고한 이치를 외향적 틀에 주입하여 정체성에대한 의의를 확립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21세기의 사회는 형상에 늘 text를 오려붙여 언어와 의미의 혼란을 수시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오늘날 현대인은 점이 가진 형질 자체의 순수함으로 보지 않고 색안경을 낀채 형상의 표면질에 텍스트로 붙인다. 그것이 자연을 거스르는 현대인의 오만이기도 하겠다. 문제가있다면 간상체와 원추세포에 의존한채 image 로서의 사회에만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다.
결과 주의적 현대사회를 비판하기위해 숫자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대는 급속도록 변화한다. 생활은 편리해지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편리함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기술력은 삶에 녹아들어있다. 바코드를 예로들면 생산년도, 제조일자, 출원일, 제품의 등록번호, 생산번호, 값 까지 세세한 정보를 담아낼 수 있는데, 이것은 정보화 사회의 단편적인 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사회는 점점 좋은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주의적인 면목에서의 기능성일 뿐이다.)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기다림 없이 일의 능률을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인간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가끔씩 무수히 많은 기술력에서도 오류가 발생 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점점 더 강화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창조하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오류를 통한 발전의 반복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미래인지 의구심을 느낀다.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분명한 것은 디지털을 앞선 전자 시스템이 거리는 물론 인간의 감성까지 활개 할 것이다. 아날로그시대에 우리는 그토록 영혼의 감성을 머리위에서 발끝까지 채우고 살아왔다. 모든 것이 손으로, 몸으로, 감성으로, 움직이며 사람냄새가 진동하는 시장을 지나고, 르네상스적 시대를 살아왔다. 이제 세상은 디지털 화된 코드에 무자비하게 지배당할 것을 추측해본다. 결과적인 측면에서 문장은 단어보다 설득력이 강하지만, 반대로 단어를 채용하게 됨으로서 시간을 단축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숫자는 어떤 사물을 지칭하거나 분류할 때 자주 사용된다. 또한 기하학적 인공물 또는 대량화된 생산품을 구성하고, 해석되는 필수요소로 쓰인다. 화초에 씨앗을 심고 싹이 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기까지의 발생과정 또한 수치로 표현하게 된다. 과학, 수학자들은 이 발생과정을 숫자와 기호,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고, 철학자들은, 아름다움, 생성, 미, 시간, 공간, 은유, 로서 나타낼 수 있다. 한 가지 문제를 던지자면, 자신 스스로의 탄생과 삶의 스토리 또한 수치로서 말할 수 있느냐 이다. 우리가 숱한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미래사회에는 인공적인 생명을 갖게 된 인간이 판옵티콘 과 같은 형식으로 누군가에 의해 기록화 되고 전자 문서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작업으로 나타내며 그와 동시에 발생과정에 따른 대상의 참된 근본과 진리를 구성하는 형상은 쉽게 분해, 분산되고, 쉽게 조합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곧 현사회의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운 현상의 단면을 표현한 작업이다.
어느 날 길을 걷다 세상이 뒤틀려 버리면서 옴짝 달싹 하지 못한 채 잘게 부서져 그 파편이 대기 중의 먼지처럼 부유해 정지된 현상을 목격하게 되면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사물이 입자로 이루어져있다는 보편화된 이론에 안주하여 온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 전까지는 확실히 구조에 관하여 논리적인 이해를 위해 작업에 몰두하였었다. 초창기 작업에서 두드러졌던 것은 후기 인상주의 회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시간을 지나치고 거듭 되풀이하기를 반복 한 후에 입자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입자는 생성되는 초기의 형태이며 이 무수한 물질단위는 물리 화학적 변화를 통해 탈환되고 환원되어 새로운 결정, 구조를 띄게 된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가장 원시적인 세포분열(진화)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다.
단위 수량.. 공학적 부호들은 가공을 위해 중요한 구성요소들로 비율을 중요시하는데 특히나 작품 속 소재인 도심속 혼란의 원인은 늘 인공적 구조, 기계화된 시스템, 인간 개인의 감성, 구조적 결함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건축물과 모든 구조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은 감성을 담당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수학적 계산식 기호들 각종 이론과 공학 설계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 mechanical 한 생활속 그러나 한 가지 이 구조를 조물주처럼 생성 혹은 파괴시키는 것 또한 인류의 역할이다. 빈번하게 나타나는 사회적 혼란의 주범 또한 인간의 담당이다. 가장 1차적으로는 그 구조들 , 인간이 스스로 발전시킨 미래의 정치제도 환경에서 인간은 여전히 통제를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기계구조, 끊임없이 증식하는 생물처럼 늘어나는 기술력에서 인간은 사회화와 공동체를 형성하며 감성적인 부분을 컨트롤하며 환경다운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숫자작업에서 나타내고자하는 부분은 결과 주의적 구조에 대하여 과연 인간은 참다운 선과 진리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서 출발하게 된다.
모든 사물은 색 입자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은 미술과 과학, 철학 사이에 화두가 되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 사물은 완연하게 굳어져있지만 어떻게든 다시 입자로서 환원되고 부서져 모래입자의 형태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내가 채택한 숫자는 산업사회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생성되기에 필요한 모든 필요조건이며 그 수치는 가히 놀라우리만큼 기계공학의 공식으로 작은 것 에서부터 거대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오래전부터 노력해온 과학자 수학자 건축가들의 공이 가장 크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러한 구조들이 인간의 생활에 밀접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만큼 물질을 구성하는 데에 숫자는 가장 큰 기호중의 하나이다. 또 한 가지 숫자는 어떤 사물을 지칭할 때 분류하거나 표기할 때 제시된다. 사람 또한 마친가지다. 그 숫자로 지정된 표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에게까지 영향력을 뻗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테크놀로지, 정보의 홍수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으며.. 점점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을 스스로 가치를 찾는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기술을 빌린 여행은 할 수 있으나 그 기술에 가려 가치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감성의 한 부분을 퇴화될 위기에 처해있다. 도로위에 자동차 디지털 it 소품 첨단 산업이 그러한 예이다. 즉 숫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벽한 구조를 생성하는 동시에 점차사라지는 가치소멸의 단적인 예를 의미하는 바이다.
정리해보면/화면에는 도심속의 혼란의 한 단면을 나타낸다. 숫자작업을 하기 이전에는 점의 매력에 빠져지낼정도였다. 생성과도 직결되는 의미의 점은 모든 학문에서 원초적인 보탬이 되고 생성하는데 가장 큰 시발점으로 원동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dot의 무한한 잠재력은 그 당시 모든 풍경을 다 점으로 보게 하였던 것 같았다. 아무튼 시대도 시대이니만큼 풍경이나 사물을 그리는 것에 그치던 점묘법을 벗어나고자 찾아 헤매던 것은 언어이다. 기분 좋게 운전을 하고 가던 날이었다. 아름다운풍경에서 마주한 핏덩어리 가득한 풍경 그 두 상황의 뒤틀림은 감각, 언어까지도 마비시킬 정도였다. 가장 도움이 된 것은 화방에서 구입하였던 레터링이라는 재료를 마주하면서부터 작업은 점에서 글자, 낱알의 텍스트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전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다루기에는 너무 많은 영역을 건드리는듯하여 나 스스로도 오래 걸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것을 추려내기에 힘을 쓰다가 숫자라는 것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가만히 보면 물질로 가득한 현대사회와 닮아있는 것이 숫자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숫자 또한 무한하고 끝도 없는 결론을 도출해내는데 그만한 잠재력은 마치 팽창하는 우주와도같이 좀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숫자이다.
인간은 과연 어떠한 편의를 위해 윤리와 도덕을 어떻게 융화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여하튼 숫자가 가진 특징은 사회 전반적으로 물질생성의 역할을 수행하고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을 것이다./ 가끔 보면 그 어마어마하게 공간을 차지해있는 구조들을 보면 답답할 정도이다.
과연 발전이 무엇이고 무엇으로 이상적인 삶이 가능한 것인지는 가늠할 새조차 느낄 수 없이 각박하게 돌아간다.
그 속에서는 늘 인권, 윤리, 도덕, 자아와 정체성, 자유와 평등, 민주화 등등 언어와 텍스트의 부조화들이 늘 녹슨 철문처럼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이 부분역시 배제할 수 없어서 그림의 부분 부분을 text로 채워 넣기도 한다.
나의 작업전반에 사용되는 숫자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물질에 대해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외부에 드러나 측정되는(값), 결과주의적인 사회 도태의 모습, 생성과 소멸에 대한 예리한 지적을 의미 하기도 한다.)-숫자작업에대한 최종 보고서 2009_1105
NUMERICAL VALUE : 수치(數値)
시대는 급속도록 변화한다. 생활은 편리해지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편리함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기술력은 삶에 녹아들어있다. 바코드를 예로 들면 생산년도, 제조일자, 출원일, 제품의 등록번호, 생산번호, 값 까지 세세한 정보를 담아낼 수 있는데, 이것은 정보화 사회의 단편적인 면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사회는 점점 좋은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주의적인 면목에서의 기능성일 뿐이다.)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기다림 없이 일의 능률을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점점 더 강화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오차의 범위를 좁혀나간다... 오류를 통한 발전의 반복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아름다운 미래인지 의구심을 느낀다. 우리가 구상하고 있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아날로그시대에 우리는 그토록 영혼의 감성을 머리위에서 발끝까지 채우고 살아왔다. 모든 것이 손으로, 몸으로, 감성으로, 움직이며 사람냄새가 진동하는 시장을 지나고, 르네상스적 시대를 살아왔다. 이제 세상은 디지털 화된 코드에 무자비하게 지배당할 것을 추측해본다. 결과적인 측면에서 문장은 단어보다 설득력이 강하지만, 반대로 단어를 채용하게 됨으로서 시간을 단축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대표적으로. 숫자는 어떤 사물을 지칭하거나 분류할 때 자주 사용된다. 또한 기하학적 인공물 또는 대량화된 생산품을 구성하고, 해석되는 필수요소로 쓰인다. 화초에 씨앗을 심고 싹이 트고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맺히기까지의 발생과정 또한 수치로 표현하게 된다. 과학, 수학자들은 이 발생과정을 숫자와 기호,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고, 철학자들은, 아름다움, 생성, 미, 시간, 공간, 은유, 로서 나타낼 수 있다. 한 가지 문제를 던지자면, 자신 스스로의 탄생과 삶의 스토리 또한 수치로서 말할 수 있느냐 이다. 우리가 숱한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미래사회에는 인공적인 생명을 갖게 된 인간이 판옵티콘으로서 기록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작업으로 나타내며 그와 동시에 발생과정에 따른 대상의 참된 근본과 진리를 구성하는 형상은 쉽게 분해, 분산되고, 쉽게 조합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곧 현사회의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운 현상의 단면을 표현한 작업이다.
내가 채택한 숫자는 산업사회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생성되기에 필요한 모든 필요조건이며 그 수치는 가히 놀라우리만큼 기계공학의 공식으로 작은 것 에서부터 거대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러한 구조들이 인간의 생활에 밀접해 있는 만큼 물질을 구성하거나 분류, 표기하는 데에 숫자는 가장 큰 기호중의 하나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숫자로 지정된 표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에게까지 영향력을 뻗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테크놀로지, 정보의 홍수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으며... 점점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을 스스로 가치를 찾는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기술을 빌린 여행은 할 수 있으나 그 기술에 가려 가치를 찾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감성의 한 부분을 퇴화될 위기에 처해있다. 도로위에 자동차 디지털 it 소품 첨단 산업이 그러한 예이다. 즉 숫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완벽한 구조를 생성하는 동시에 점차사라지는 가치소멸의 단적인 예를 의미하는 바이다.
나의 작업전반에 사용되는 숫자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물질에 대해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외부에 드러나 측정되는(값), 결과주의적인 사회의 혼란 속 생성과 소멸에 대한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1986년 출생
폴린 부드리/레나테 로렌츠: 초상
리움미술관
2024.07.18 ~ 2024.11.24
예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관문
서울대학교미술관
2024.09.12 ~ 2024.11.24
Mindscapes
가나아트센터
2024.10.16 ~ 2024.11.24
부산 청년예술가 3인전 《응시: 세 방향의 시선》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2024.10.26 ~ 2024.11.24
송준: Blue Eclipse Episode 3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2024.11.14 ~ 2024.11.24
Wherever : 순간이 새겨진 곳
이응노의 집
2024.10.29 ~ 2024.11.24
꽃 보다: 이철주의 작품세계
이천시립월전미술관
2024.09.26 ~ 2024.11.24
송영규: I am nowhere
갤러리 그림손
2024.10.30 ~ 202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