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원 - DOUCKING
2012.11.28 ▶ 2012.12.04
2012.11.28 ▶ 2012.12.04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2010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2009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2012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2012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117x80cm, 2012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2012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2012
고석원
DOCKING Acrylic on Canvas, 2010
상상의 문명과 우주
우주(宇宙)-눈의 경험으로부터 마음의 상상으로
고석원이 '회화의 방법론으로 상상하는 우주'는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우리들의 시지각으로 판별 가능했던 우주가 아니다. 인공위성의 것이든 우주비행선의 것이든 찍혀진 우주의 사진 이미지는 다분히 우리가 눈을 통해서 확인했던 이미지이다. 그 이미지를 맞닥뜨린 최초의 경험에서 우리는 현실계에서 경험하지 못한 낯설고 신비로운 느낌을 가지게 되지만 수많은 정보와 이미지 자료를 통해서 자연스레 체득된 우주에 대한 이해는 이내 친숙함으로 변모하게 된다. 최초의 낯설음이 반복되는 정보와 이미지 훈련이라는 간접 경험을 통해서 친숙함으로 뒤바뀐 탓이다. 이미지를 통해서 친숙함이 가능해지는 것은 눈의 힘을 과신하는 우리들의 관성 탓이다. "직접 보았어?"라는 질문은 직접적 경험을 질문하는 말로 이해되어 온지 오래고, '목격자'는 직접적 경험을 전제하는 '사실성의 증빙'으로 간주되고 있는 용어이다. 하지만 눈의 경험이 드러내는 사실성에의 과신은 종종 직접적 경험으로 왜곡되어 실체에 대한 왜곡이나 변형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의 파악마저 그르치기 십상이다. 눈이 사실성에의 증빙을 출발부터 어렵게 하는 까닭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 탓이다. 하나의 단일 시점 안에 포착되는 대상만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눈이 포착한 이미지의 흔적들이 집적되면서 사건의 전개가 이해되지만 그 실체는 늘 불명확할 따름이다. 본질(reality)은 시각성이라는 '눈의 경험'에 매몰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석원은 '눈의 경험'으로부터 탈주해서 '마음의 상상'으로 우주를 대면하다. 우리는 우주에 가본 적이 없다. 단지 정보와 이미지를 통해 체득한 간접적 경험에 의지해서 우즈를 바라보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고석원은 회화의 창으로 바라보는 우주를 '눈의 경험'이 아닌 '마음의 상상'으로 대면하고자 한다. 그가 마음으로 상상으로 읽어내는 우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나 연상하는 우주의 이미지와 판이하다. 광활한 우주의 공간과 갤럭시가 보이고 이 공간위에 유영하는 인공위성과 같은 기계적 이미지, 암모나이트 화석과 같은 고대 생물의 이미지가 혼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산양이나 멧돼지 혹은 말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동물들이 혼란스럽게 한데 어우러져 있다. 원래 우주를 지칭하는 영어 코스모스(Kosmos)가 질서를 뜻하는 말임을 상기할 때 고석원이 그려내는 우주란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의 혼돈 이미지인 카오스(Kaos)를 드러낼 따름이다. 그가 그려내는 우주는 공전 주기에 따라 행성이 일정하게 운행하는 식의 질서의 체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첨단 기계인 듯한 사물이 우주정거장처럼 보이다가 원생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내 미생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내 미생물의 확대된 모습처럼 더욱 디테일해 보이기도 한다. 이미지의 '양가성'은 그가 풀어내는 우주에 대한 결론이다. 즉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무기체와 유기체, 질서와 혼돈, 공간과 시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카오스의 우주인 셈이다. 천문학자가 우주의 질서를 관측하는 '눈의 경험'으로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우주의 모습인 것이다. 눈의 경험이 간과하는 본질을 고석원은 마음의 상상으로서 찾아 나선다. 그는 우주의 공간 안에 수많은 상상의 존재들을 풀어놓는다. 미분, 적분 등 수학공식의 복잡다단한 여산으로 우주를 측정, 설명하려는 태도와 달리 고석원은 어린 시절 달에 살고 있다는 토끼를 찾아나서는 아이들의 마음으로 우주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文明)-'원래 있음의 시공간'으로부터 '만남의 시공간'으로
우주를 두고 동양에서는 사방상하(四方上下)를 우(宇)라 하고, 고왕금래(古往今來)를 주(宙)라 하여, 천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즉 우주를 시간과 공간의 총체적 인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고석원이 우주로부터 가져오는 현실계의 인식은 이제 공간과 시간이 합치된 개념이 우주보다 선명해진 '문명'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주가 관념성이 앞서는 것이라 할 때 문명은 이에 비해 실제성이 앞서는 것으로 보다 현실화된 개념이다. 즉 문명이란 시간성의 개념이 보다 현실적으로 체감되는 개념인 것이다. 시간성에 개입하는 인간행위가 창출하는 문명은 무수한 만남의 관계학을 형성한다. 애초의 관념적 시공간인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과 태도들이 다른 노력과 태도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오늘과 같은 문명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방종과 일탈을 규율로 통제하면서 질서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인간 주체의 등극에 다름 아니다. 원우주의 공허와 혼란 속에 인간이 개입한 것이다. 문명은 카오스를 용인하지 않으며 카오스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시도한다. 카오스를 지배하고자 하는 문명은 법과 제도를 만나고 이들은 다시 인간 주체의 자유로운 상황을 억압하기에 이른다. 인간을 위해 수많은 만남을 성사시킨 문명에 의해서 다시금 인간 스스로가 점차 구속되어 갈 수 밖에 없는 오늘날 현실에 직면하고 마는 것이다. 문명이 촉발한 '만남의 관계지형학'이 좌초시킨 현실의 지평은 현대인들에게 있어 다분히 부정적이다.
고석원의 작품제목들이 한결같이 '도킹(Docking)'이라 표기되고 있듯이 그의 작업의 주제는 만남이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는 고석원의 작품세계에서 문명이 촉발하는 '만남'의 결과가 결코 부정적이 아님을 피력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만남이 우주를 '마음의 상상'으로 대면하면서 질서와 카오스를 뒤섞어 놓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오스의 자체를 질서로 인식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 즉 원래의 우주인 '원우주'를 '원래 없음의 시공간'인 '카오스'로 대별해 냄으로써 우주를 '원래 있음의 시공간'인 '질서 안의 카오스'로 인식하려는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카오스 자체가 질서 안에 내재한 그 무엇으로 바라보려는 태도인 것이다. 고석원의 그림 속에서의 혼돈은 '질서 안의 카오스'라는 '원래 있음의 시공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무질서와 혼돈으로 비추어지는 양상은 그가 만남의 관계지형학을 비체계적인 양상으로 화면 속에 자꾸 꺼내 보여주기 때문인 것이다. 세포와 같은 미시적 세계가 우주와 같은 거시적 세계와 부딪히고 동물이나 원생생물과 같은 이미지들이 기계와 같은 금속성의 이미지와 부딪히는 '양가적 이미지의 비체계적인 만남'은 그의 화면 속에서 끊임없는 작가의 창작 에너지를 통해 반복적으로 생산된다. 고석원의 작업이 '우주로부터 문명으로', '원래 있음의 시공간으로부터 만남의 시공간'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끊임없이 창출되고 있는 것이다.
방만한 회화적 감성과 상상 세계
화면 안에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시메트리(Symmetry)형식으로 혹은 이를 이탈하는 디시메트리(Dissymmetry)형식으로 만나게 하고 교접시키는 고석원의 회화적 테크닉은 실상 표피적인 제스처일 따름이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효과적 화면에 대한 구축이기 이전에 양가적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 안에 마구 쏟아낼 수 있는 괄목할만한 상상력의 에너지라 할 것이다. 고석원의 상상력이란 다분히 이지적인 차원의 것이기 보다는 감성적 측면이 강한 상상력이라 할 것이다. 달리 말해 우주와 문명을 대면하는 그의 태도가 인식의 차원을 지향하기 보다는 상상에 기반한 감성의 차원을 지향함으로써 그의 예술세계를 매우 자유롭고 방만하게 풀어헤쳐놓고 있다 할 것이다. 동물의 이미지 역시 구체적인 실존 동물의 이미지를 닮아있으면서도 현실계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라든가, 기계 이미지 역시 기능성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공상적 이미지들만이 반복 나열됨으로써 그의 회화를 풍요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그의 상상의 체계를 말해야 한다면, P. 자네(Pierre-Marie-Felix Janer)가 칭한 '토기의 행위'가 예술적 결과에 대한 상상하는 '목적적 상상'을 지칭하듯이, 예술창작 행위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목적적 상상'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상이 유용성을 강조하는 공예나 디자인과 같은 합목적성을 애초에 방기할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회화에서 주요한 화면구성의 전략을 폐기처분함으로써 창작 주체인 자신을 단지 예술 창작의 일부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좀 다른 차원의 상상을 정의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P. 자네의 예시를 흉내내어 '꽃가루(Pollen)의 행위'라 불러본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단지 수정(受精)의 목적만을 달성하고자 하는 꽃가루의 흩날림과 같은 유동적 운동은 고석원의 창작행위와 유사하다. 구체적인 화면구성의 전략을 통해 메시지의 효과적인 구현을 지향하기 보다는 단지 주제를 드러내는 창작의 목적만을 달성하고자 하는 에너지의 분출과 같은 행위가 고석원의 창작행위라 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와 관련된 그의 상상을 '탈지시적 목적적 상상'이라 불러봄직하다. 근원적인 주제의식과 창작행위는 지향하되 특정적 지향성을 방기하려는 상상인 것이다. 이러한 '탈지시적 목적적 상상'은 그의 '방만한 회화적 감성'과 만나기에 안성맞춤이다. 특히 거대화면을 지향하는 작업방식에서는 기본적인 틀이 애초에 구상되지만 크기의 특성상 세부의 화면까지 미리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세부의 화면을 방만하게 풀어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처음부터 지닌다고 할 것이다. 대칭과 비대칭. 기하학과 유기적 이미지, 에어브러쉬의 큰 흔적과 자잘한 붓질의 미세한 자위가 특정한 화면경영의 의지 없이 뒤섞인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방만한 회화적 상상력이 운위한 결과이다. 작가는 단지 이러한 다종의 양상들이 방만하게 쏟아져 나왔음에도 그것들이 애초에 가지는 질서의 체계를 통해 우주와 문명에 대해서 생각해 주길 바랄 뿐이다. 이해하길 강요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자유로움, 그것은 고석원 회화의 지독한 강점이지만 그의 회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를 비판적으로 가늠하는데 있어 하나의 걸림돌이기도 하다. 작가 역시 가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우주와 문명이라는 거대 주제 아래 휘말린 하나의 딜레마로 지속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가 있다면 화면 안에 이미지들은 자꾸만 구겨 놓고자 하는 욕망이 앞서 같은 유형의 시리즈들은 마냥 재생산 할 수밖에 없다는 지점에 존재한다. 하나의 관건이 있다면 다종의 이미지들을 프레임 밖으로 끌고 나오는 전략적 장치일 것이다. 그것은 화면의 재생산을 단순화하거나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하는 설치의 도임같은 필요성에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을 보는 필자의 분석일 뿐이다. 보다 근원적인 방향성은 앞으로의 작업세계에 대한 주체적 역할을 맡은 고석원이라는 작가의 변모된 의식 속에서 발현되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비판적 눈으로 지켜볼 따름이다. ■
평론가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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