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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부모의 이혼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친척집에 살기 전까지 스위스 로잔에 있는 학교를 잠시 다녔다. 1916년 변호사 타데우즈 렘피키(Tadeusz Lempicki)와 결혼하였고 1917년 남편이 볼세비키 혁명과 연루되자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였다.
당시 파리는 어느 도시보다 여성 미술가들에게 많은 기회가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타마라 드 렘피카(Tamara de Lempicka)로 바꾸고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하였다. 렘피카는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와 앙드레 로트(André Lhote)에게 그림을 배웠다. 드니의 ‘종합적 큐비즘(synthetic cubism)’과 로트의 ‘부드러운 큐비즘(soft cubism)’의 영향 속에 그녀만의 독특하고 강한 예술적 경향을 발전시켜 나갔다.
렘피카는 ‘살롱 도톤 Salon d'automne’과 ‘살롱 데 앙데팡당 Salon des Indépendants'과 같은 전위적인 파리 살롱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192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27년에는 보르도 국제미술전에서 <발코니에 있는 키제트 Kizette on the Balcony>로 1등상을 받았다. 이 시기로부터 1930년대까지 그녀는 화단의 프리마돈나로 군림하며 관음증, 그룹섹스, 동성애 등 파격적인 소재의 작품들을 잇달아 선보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항상 상류층 사람들과의 교류를 시도하였고 사교계의 중요한 초상화가가 되었다. 또한 빼어난 미모와 거침없는 남성 편력, 양성애자로 화단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작품에 보이는 강한 섹슈얼리티는 본능에 솔직하고 자유분방했던 그녀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1928년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고 1933년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바론 라울 쿠프너(Baron Raoul Kuffner)와 재혼하였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렘피카는 남편과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동안 그녀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크게 위축되었다. 전후 미국에서 등장해 전 세계 화단을 휩쓴 추상표현주의의 위세와 평론가들의 혹평에 렘피카는 전시를 일체 거부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0년 멕시코 쿠에르나바카(Cuernavaca)에서 생을 마감했다.
렘피카의 작품은 뜨거운 열정과 얼음 같은 차가움이 공존한다. 특유의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작업 스타일은 아르데코(Art Déco)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며 날카롭게 끊어지는 선묘와 차갑고 단순한 형태, 유리처럼 매끈한 색채는 렘피카만이 지니는 독특한 조형적 특징이다. 비록 자유분방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고는 하나 동시에 그녀는 망명자로서 불안과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그녀 작품에서 보이는 차가운 시선의 긴장된 분위기는 그러한 시대의 암울함과 혼란스러움을 엿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