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화
봉천3동-Ⅱ 캔버스에 유채, 145.5x112cm, 2005
최민화
락커Rocker 캔버스에 유채, 145.5x112cm, 2005
최민화
대로(大路)-Ⅰ 캔버스에 유채, 145.5x112cm, 2005
최민화
연인Lover 캔버스에 유채, 130.3x97cm, 2005
절망을 반성하기
2000년대 이후 작품으로 구성되는 이번 <靑春- Prologue>전은 50대의 최민화가 바라본 청춘들을 소재로 한 것이다. 최민화가 지속적인 화제(畵題)로 삼은 ‘청춘’과 ‘부랑’의 연속선상에 있는 회화작업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궤적에 있는 신작은 80년대의 ‘들풀’전과, 한강미술관에서의 ‘분단’전, 90년대의 분홍작업들(토아트스페이스. 91/공평아트센타,95)이후 처음 선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 동안 테마기획적·실험적 의도의 개인전상고사전, 브로마이드전, 6월전, 20세기 회화의 추억전 등은 다수 있었지만 최민화가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회화적 주제로는 95년 이후 처음이다. 대략 200여 점의 작품 중에서 열 몇 점으로 소략하게 먼저 소개하는 것이 이 전시의 의도다. 따라서 현재 진행중인 작업들이 어느정도 완결된 후에 지금보다 정교한 체계와 규모를 갖춘 본격적인 전시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최민화 작업의 지속적인 주제 즉 문학적 수사는 부랑浮浪이고, 소재는 자신이 지나온 청춘을 서정적으로 회고하는 것에서부터, 지금의 젊은 청춘들을 따스한 마음으로/비판적으로 쿨Cool하게 바라보는 것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다. 한편 이런 소재와 수사가 시각적으로 소통 가능하게 해주는 그만의 회화개념과 회화성이 조형적인 특성이라 하겠다.
부랑의 일차적인 의미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제도에서 소외받은 아웃사이더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확장해서 보자면 여행이나 주유천하 하는 방랑자나 집시처럼 낭만적 로망으로도 해석된다. 더 확장해서 보면 고정되거나 머물지 않는 자세로 세계를 대하는 태도로도 볼 수 있다. 지난 30년간 최민화 작업 궤적을 보면, 이렇듯 유동하는 입장에서 청춘이란 소재에 대한 내밀한 경험과 감정과 해석을 그의 체질적인 회화로 전이시켜 왔다고 하겠다. 특히 90년대 ‘분홍시리즈’에 등장했던 청춘 - 작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추억이나 쓸쓸함을 불러일으키는 보헤미안의 낭만과, 우울했던 그의 개인사를 우리 현대사와 오버랩 시킨 리얼리스트의 관점의 절묘한 이중주 - 의 정서는 최민화의 슬픔과 희망과 의지와 저항을 두루 버무려내며 7,80년대식 청춘의 한 표지, 혹은 전형이 된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렇게 그의 기억 속 70년대의 청춘들은 분홍색에 폭발력을 숨긴 채 기타를 치거나 담배를 꼬나물고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들이었다. 제도와 규약으로 젊음을 속박하던 전체주의 사회에서 자유를 추구하고 구가하는 길은 그런 제약에서 일탈하는 길 뿐이었다. 반항과 함께 기성문화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 우울함과 모호한 희망이 혼재된 이때의 작업은 특정한 어휘로 개념화하기에는 다층적인 면이 넓어서, 작품을 마주한 관객의 해석학적 입장이 오히려 넓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폭넓은 해석을 가능케 한 조형적 기제로 선택된 분홍색은 ‘부랑’이라던가 ‘양아치’라는 최민화 특유의 정서로 좁게는 그의 개인적인 성향에서, 넓게는 한국사회의 공고화 된 기존의 인식적 층위와 불화하던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의 전형이 되었고, 그 결과 정치적 해석학의 시각적 텍스트가 되었다 .
그런데, 근작의 청춘에서는 그런 분홍정서의 풍부했던 너비를 작가 스스로 거세시킨 듯하다. 변두리 골목, 도심, 공원에서 마주치는 청춘들. 하드보일드한 락커(Rocker), 연인, 곡예사,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여성…. 큰 키, 미끈한 몸매, 욕망, 궁핍하지 않고 세련된 패션…. 빠른 속도감의 도회적 비트에 곧 폭발할 것 같은 형상인데도, 왠지 이들은 쓸쓸하다. 그리고 이 청춘들의 재현 사이로 삐져나오는 것은 창백하게 탈색된 회청색의 염세성이다. 작가 자신이 체험했던 허무한 청춘에 희망과 삶의 의지를 덧붙여 승리감의 기대를 표명했던 분홍과는 사뭇 다르다. 과거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던 청색과 분홍을 지나, 무채색인 회색과 흰색을 주조로 창백한 재현을 한 것이다. 이런 최민화의 색의 변화과정은 색과 계절을 조합하여 인생을 비유한 옛 절기구분과 유사해 보인다. 청춘은 푸름靑과 봄春의 합성이고, 성숙기인 여름은 붉음(朱+夏), 장년기인 가을은 흰색(白+秋), 노년기인 겨울은 검정(玄+冬)으로 비유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어두운 톤으로 그린 20대의 자화상 <부랑, 1975>의 푸른색조가 봄이라면, 3·40대의 분홍시리즈가 여름인 朱夏에 해당되고, 50대에 그린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가을인 白秋에 해당한다.
의도적인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최민화 근작의 색이 밝은 회색으로 흰색에 가까워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까. 사물과 현상을 투명하고 직관적으로도 느끼고, 반대로 치밀한 분석도 가능한 색으로 이 옅은 색을 상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어”야 할 청춘이 이리도 애잔하고 흐리게 묘사된 것은 자신에게 한 가닥 남아있던 분홍의 희망과 낭만이 지금의 청춘에게도, 자신에게도,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엷어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다. ‘부랑’의 시점(視點)으로 ‘청춘’이란 드라마의 주연(20대)을 거쳐 이를 회고하는 분홍시대(3, 40대), 그리고 이젠 주/객관적인 입장을 아우르며 청춘들을 바라보고 재현하는 거라면 비약일까?
그래서인가. 이 리얼한 관찰을 동반한 시선은 무언가 우울하고 여리다. 화면은 밝지만 탈색된 것처럼 안료 층은 더욱 얇고, 일필휘지로 자신의 기운을 싣던 분홍시대의 시원한 붓질은 아주 작은 붓 터치들의 가벼운 스침으로 더 옅어졌다. 흰색에 가까운 배경이나, 옅은 청회색 모노톤의 화면은 시니컬하게 현실감을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곳에서는 건조한 청춘들의 덩그런 시선만이 화면 밖의 우리를 향한다. 암청색으로 자신을 묘사했던 70년대의 구작 <부랑>과 겹쳐지면서…
이 근작들은 떠돌면서 포착한 청춘들의 현장성, 혹은 사실성에 작가의 회화적 태도를 더함으로 완결된다. 회화는 물질(물감)과 캔버스에 가하는 행위의 결과물이자, 캔버스 안팎의 세계를 두루 수렴하는 감수성과 인식이 만나는 총체적인 마당이기도 하다. 작가의 신체적 호흡도, 세계나 미술에 대한 이념도 거기에 포함된다. 여기에서 최민화는 과거와 달리 감정을 절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묘한 차가움과 까칠함이 나타난다. 청춘들에 대한 그의 연민의 시선이 그의 회화적 방식을 통해서 관객의 감정도 일정부분은 절제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소재나 상황의 서술과 더불어 조형적 표현으로 그 느낌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최민화가 회화를 고집하는 이유중의 하나다. 서술이나 소재의 설명이 아니라 정서의 표출로 구축하는 동시대의 전형성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기존의 구상회화와는 다른 인물의 표정과 동작, 고답적인 완성개념에서의 일탈, 물감의 두터운 물질성보다는 최민화 특유의 빠르고 가벼운 붓 터치의 운용과 속도감이 빚어내는 궤적을 즉발적으로 흔적화 하는 시각효과 등이 빚는 회화적 표현이 이 시대의 청춘과 부랑에 대한 그의 내러티브를 리얼리티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스산하고 을씨년스런 회화의 뉘앙스는 누벨바그의 카메라 들고찍기처럼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연하고도 즉발적으로 만난 숱한 청춘들이 자유롭게, 즐겁게, 멋대로 살지 못함을 확인함으로 나타난다. 발전되고 진보한 것 같은 우리사회는, 그러나 천박한 자본주의 구조내에서 갈등하고 삶의 수준이나 질에 있어서도 여전히 별 볼일 없음을 청춘들을 통해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우울하다. 분홍을 통해 해방을 맞을 것으로 기대했던 청춘들이 그의 ‘분홍’이후 십수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좌절감으로 말이다. 민주화 이후 몇 개의 정부가 지나가도록 이 땅의 청춘들에게 - 화가인 자신에게도 - 사회적인 삶의 ‘가치’는 고양되지 않았고, 혁명의 명분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게 탈각되었다. 출세와 성공, 치부, 지금보다 더 속물화되어가는 과정만이 반복될 뿐. 변혁기를 미술을 통한 희망으로 관통해온 그에게, 미술조차도 우리 사회에 대안적인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자본에 예속되어 가는 현실은 더욱 견디기 어려운 절망이었을 게다. 그래서 <로커>나 <곡예사>와 같은 예술가적인 청춘들과 젊은 <연인>들의 미래는 지금껏 예술가로 살아온 자신의 삶의 궤적과 동일시되어 회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최민화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청춘을 지향하는 뜨거운 정서로, 그리고 정착하지 않고 떠도는 사람의 시선과 태도로, 계속해서 이 혼탁한 세상을 리얼하게 바라보고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이란 프리즘 하나로만 세상을 보고 사는 그는 여전히 청춘과 같은 마음과 태도로 떠돌 수밖에 없으며, 그 부랑의 고단함은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나 그에게 흡착된 무거운 운명과 같은 것같다. 어느 시대건 그가 바라는 의식과 현실이 통일된 자유로운 세상은 없을 것이니, 종내 모순된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작가’인 그는 끊임없이 떠돌며 그가 보고 인식한 것을 그림으로 증명해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인지 최민화는 <인사동 사거리>로 타계한 오윤을 갑자기 불러들인다. 지금도 유효한 우리미술의 가치 때문에 만나려는 것일게다. 저 세상 사람을 만날 정도로 이 세상을 집요하게 보고자 하는 그의 ‘부랑’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절망'을 '반성'하려는 의지로, 불면의 밤을 두 눈 부릅뜨고 헤메는 오디세이의 운명으로 말이다. <김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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