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전경 2013
노동식
애애애앵~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3
노동식
문곳 또 물기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3
노동식
물파스가 필요해 혼합재료, 가변크기, 2013
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
-노동식이 제시하는 동화적 상상의 미학
홍경한(미술평론가)
1. 노동식은 ‘솜’을 이용한 다양한 작업으로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그가 그동안 만들어낸 고운 결 속 하얀 세상은 누군가에겐 아련한 추억과 기억을 상기시키는 단초를 제공했고 번잡하고 빠르게만 흘러가는 초침을 벗 삼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감수성을 건드리는 역할을 했다. 물론 우리 모두 한번쯤 생각하고 경험해 보았으나 마음 한구석에 밀쳐놨음직한 미지의 여백들에 시선을 두게 하는 조용한 내레이션은 그가 창조하는 다양한 형상에 포박된 채 곳곳에 들어차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를 간략히 말하자면 복잡한 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문화적 사건들을 낭만으로 회귀시키는 결과물이자, 당대가 잉태한 여백의 보충물이라 해도 틀리지는 않다.
실제로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세월의 지층을 뚫고 나와 무언가를 되새김질(※소환하거나 회귀토록 하거나)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그의 작품이 지닌 여러 특징 중의 일부로 규정되는 것이었다. 특히 동화적인 친근감과 그로부터 비롯된 상상력 가득한 여러 작업들, 스토리가 있는 구조 등은 노동식이라는 인칭명사를 각인시키기에 아쉬움이 없을 만큼 작가만의 개성으로 정립되는 것이기도 했다.(※과거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양’을 세던 구전(口傳)을 모티프로 한 작품 <불면증>에서 엿보였던 ‘동화 같은 세계로의 초대’나 매직리얼리즘에서 일반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상상의 문 너머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 등장하는 요정이자 아랍권의 마신을 주인공으로 한 <램프의 요정 지니>, 일본 만화를 소재로 한 <아톰의 위기>, 판타지 영화 꼬마유령 캐스퍼의 주인공인 <캐스퍼>와 같은 작품과 ‘모기’ 시리즈는 공통적인 유심을 지정하고 있다.)
2. 그러나 이번 전시(※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작품전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은 밀란 쿤데라가 1984년 발표한 장편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차용했다.)에 선보이는 작업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 효용 된 ‘솜’ 이외, 금속이 주재료로 등장하고 더욱 아기자기한 맛이 덧대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더구나 의식을 재구조화하는 스토리가 밀도를 더했다는 것도 다소간의 구분 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일까, 정말이지 그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간지럽기 짝이 없는 ‘모기’는 끈질기게 괴롭히던 지난 여름을 떠올리게 하며,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모기향을 따라 그 여름날의 흔적을 쫓다 보면 어느새 노동식 특유의 판타지의 세계로 다가서게 된다. 더불어 디테일하게 조각된 수백 마리의 모기와 그 모기에 물려 부어있는 발가락과 손가락 형상 사이에서 불현듯 솟아나는 감성은 우리를 또 다른 기억의 공간으로, 혹은 각자의 현실로 유도한다.
허나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환상마저 슬쩍 열어 놓는 노동식 작업의 일관된 조형요소와 창작의지, 그리고 밝고 건강한 미적 세계를 구축하려는 뚜렷한 작업 가치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하나하나 일일이 다듬고 깎고 설치하는 집요한 노동력 역시 이전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작품 설치에만 며칠이 필요하다는 점만 봐도 그 노동의 강도가 남다름을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충분히 발생 가능한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과거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익숙한 사물들을 통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것, 언제나 그러하듯 넉넉한 구상이 가능하다는 것도 이전 작업과 현재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려움>은 같은 맥락 아래 놓인다.
3. 노동식의 작업을 십 수 년 간 목도해온 입장에서 볼 때 작가 작업의 미적 가치는 시간의 유속과 관계없는 내용의 동일성을 축으로 한다. 즉, 예전 평론에서도 밝혔듯 이미지로 대리되는 형식에 앞서 드러난/드러내고자 하는 의미에 방점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일상과 기억의 재생, 혹은 환기를 일컫는다. 그것은 기술적 이성 자체가 멈춰서버린 상태에서 꽃을 피우고,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텍스트를 받아들여 뱉어낸, 건조한 우리네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긍정적인 현실을 지향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어떠한지를 증거 하는 곳에서 자라난다. 더구나 정겹고 유쾌한 이야기를 생성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발화되며, 이는 당연히도 작가의 심성 자체가 그곳에 자리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다만 현 시점에서 재료의 효용은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이전 작품만 해도 그의 작업 배경에는 늘 솜틀집의 아들로 자라면서 보고 느꼈던 기억, 솜을 하나의 놀이도구로 삼았던 날들에 대한 회상, 가족과 얽힌 애정사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따라서 그가 주재료로 삼는 ‘솜’은 작가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정겹게 풀어내는 수단이자 확장된 무대였고, 이는 작가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작가는 ‘솜’이라는 고정적 재료에서 탈피해 금속이나 각종 오브제 등을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했다.(※최소한 2000년대 중반 이후 다양한 장소에서 선보인 <민들레 홀씨 되어> 연작은 솜이라는 외부 환경의 제약을 받는 소재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보인다.) 가느다랗거나 굵은 철사, 비행기, 낙하산 타는 사람과 같은 오브제가 솜과 같이 나란히 놓였으며, 때론 직접 제작한 다양한 사물(조각)들이 이야기를 보다 극적으로 구현시키기 위해 출현하곤 했다.
이번 <포스코미술관> 전시에 선보이는 ‘모기’ 작업도 큰 범주에선 위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여기엔 넓은 부분을 차지하던 솜이 핵심만 점하는 대신 ‘상황’이 들어서 있고, 그로부터 비롯된 재료의 다변화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탄탄히 하는데 쓰임 받도록 철저히 분담되어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일차적으로 재료의 확장을 지정하지만 실은 내용에 맞는 형식의 개방으로 해석하는 게 보다 적절하다. 옛 작업들이 재료에 스스로 속박되어 어느 정도 표현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면(※그럼에도 재료의 속성을 충분히 발현시켰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재료의 특성을 적재적처 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조형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렇기에 작금 노동식의 작품에선 재료의 한정성은 읽기 어렵다. 앞서도 언급했듯 재료에 앞서 주제와 스토리, 그 여운이 더욱 도드라지는 형국을 하고 있다는 것이 맞다.
4. ‘모기’ 연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은 거의 대부분의 동화적 화법이 그러하듯 거부감 없는 자연스러운 공감을 유쾌하게 이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모기’ 작품들은 다분히 현실적인 측면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위에서 기술한 작업들과 약간의 틈을 내보인다. 찰나의 기억을 기록하고, 이를 다시 보편적인 공감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정한 간극은 무산되지만 보다 친근해졌음은 비교적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맞닿는 예전 작품으로 동네 귀퉁이나 재래시장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뻥튀기 장면을 묘사한 <뻥이요>를 비롯해, 지금처럼 가가호호 수도시설이 채 구비되지 못했던 시절 물을 미리 조금 넣어야 비로소 시원한 지하수를 퍼 올릴 수 있었던 펌프 식 수도를 형상화한 <1980년 여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작업들은 ‘모기’에서처럼 ‘추억과 기억으로 빚어진 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작업의 연속성에 관한 필연적인 구동체임과 동시에 그의 작품을 포괄하는 또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한다. 이것은 또한 삶의 한 장면을 담아온 노동식 개인의 서사를 바탕으로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색깔이 보다 진하고 명료하게 배어들게 하는 중요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외에도 우리나라 시골 어디에서나 흔하게 피고 자라던 민들레홀씨를 꺾어 불며, 그 날아가는 모습에 즐거워했던 옛 기억을 담은 <민들레 홀씨 되어>, 마치 다정한 연인이 금방이라도 앉았다갈 것처럼 낭만적인 벤치와 자전거, 서구식 가로등이 놓여 있는 <첫 눈 오는 날>, 아이들로부터 '방구차'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던 <소독차>, 한겨울 땔감 냄새로 인해 연실 마른기침을 하면서도 각자 가져온 도시락과 온몸에 온기를 전해주던 교실 연탄난로를 형상화한 <콜록콜록>, 사내아이라면 유년시절 손에서 떼지 못했던 비행기를 주요 소재로 한 <떴다떴다 비행기>, <곡예비행> 등도 과 같은 작품들 역시 ‘모기’에서 마냥 작가의 기억을, 소소한 일상의 한 단면을 뿌리삼아 의지하며 자란 언어로 풀이해도 문제는 없다. 모두 추억과 회상에 상상을 버무린 작업이니 말이다.
노동식 작가의 근작들은 지난날의 설치작업에서 드러난 흐름에 비해 더욱 조밀하게 삼투하는 흔적을 보여준다. 공간의 높이와 넓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공간장악력에 대한 가중치가 여전한 가운데, 모험과 도전정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비상하려는 모습을 담은 낙하산이 공간에 흐르고 거대한 손가락과 얼굴의 일부분이 모기와 접촉하는 장면을 통해 작가 특유의 재치와 재미가 한층 강화되어 실체화를 이끄는 면모를 발견토록 한다. 특히 실제 크기보다 거대한 손가락이 하나의 기구처럼 설정되어 있다는 것은 다분히 비실제적인 요소로 남지만, 그러한 상징의 강조가 되레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차원과는 달리 약 450여 마리에 달하는 모기들은 우리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상황, 다시 말해 회상과 기억을 반추하되 상상력을 자극하는 촉매로서 기능한다. 더구나 이 작품은 세밀함과 규모의 웅장함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바로 노동식이 제시하는 동화적 상상의 미학이다.■
197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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