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원
untitled 3 acrylic on linen, 72.5x90.5cm, 2013
이진원
untitled acrylic on linen, 45.5x38cm, 2013
이진원
forest acrylic on canvas, 40.5x50.5cm, 2013
이진원
untitled acrylic on linen, 72.5x90.5cm, 2013
이진원 작가의 작품 속의 예술, 정신성과 자연
Art, Spirituality and Nature in Yi Jinwon’s Works
홍가이
I.
한국 화가 이진원 최근 작품은 모두 예술과 정신성, 자연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는 “Wood in Winter”(65 x 81 cm, 2008)와 “Breath”(191 x 129 cm, 2005), “무제”(191 x 129 cm, 2004), “바다”(174 x 125 cm, 2006), 그리고 “바다”(35 x 27 cm, 2003) 등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Sea” 라는 큰 그림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틀림없이 해변, 잔잔한 바다, 그리고 해가 떠 있는 흐릿한 하늘로 구성된 바다풍경이다. 그러나 해는 높이 떴는데도 짙은 안개는 걷히지 않은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해 보인다. 이런 짙은 연무는 땅 바다 하늘을 가리지 않고 온 세계를 덮어버린 모양이라 화면은 완전히 평평해 보인다. 하늘과 바다, 땅이 모여서 한 장의 평평한 판이 된 것처럼. 이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무 움직임이 없는, 완전한 잔잔함이다. 바람도 없고 물결도 없고 바다에서 헤엄치거나 해변에서 산책하는 사람도 없다.
바다 위에는 고깃배조차 없다. 빛이 짙은 안개로 인해 해도 엷어 보이며, 허연 안개에 흡수되는 많은 광선들이 안개를 담홍색으로 염색한다. 이 작품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으려면 “still”(잔잔하다), “serene”(평화롭다), 또는 “calm”(고요하다) 등 영어 형용사들이 쓸 만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압도적인 ‘고독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표현함에도 불하고 기본적으로 따스한 기운을 뿜어낸다.
이 그림이 담은 바다풍경은 이 지구의 많은 대양이나 내륙 바다 아무데서나 찾을 수 있는 매우 평범한 바다풍경이다. 이진원이 그려낸 풍경은 어느 바다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바다풍경을 그리는 이유를 어느 한 특별한 곳의 한 특별한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러한 바다풍경이 드러낼 수 있는 한없이 다양한 분위기 중에 특별한 분위기를 내는 바다풍경을 담아내기로 한 것이다. 같은 바다라 하더라도, 바다풍경을 깜깜하게, 거친 바다가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가 하늘을 찌르는 장면을 연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의 바다는 압도적인 공포감을 줄 것이다. 또는, 바다가 잔잔하고 안개도 없이, 색조는 차가운 하얀색과 파란색, 해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으되 하늘은 맑고 해를 둘러싸는 안개 없이 그린다면 바다풍경 분위기가 아무 따뜻함이 없는, ‘썰렁한’ 고독함의 분위기가 될 것이다.
작가가 그려낸 정적과 절대적 고요함에는 다분한 의도가 내제 되어있다. 작가가 그려낸 ‘잔잔함’과 ‘고요함’의 느낌은 靜 이라는 한자로 표현할 수 있다. 해변가에 잎이 무성한 탁자가 하나 놓여 있는 바다풍경 그림을 통해서도 작가는 완전한 잔잔함, 즉 靜의 깊은 조용함을 표현한다.
大學에서는 이렇게 유교나 불교, 도교 등 동양의 정신 수양법들은 하나같이 궁극적인 목적이 Oneness with Universe, the perfect community or communing, or connectivity인 정신적 탐구에서 수양을 한다. 이진원 작가의 이 그림은, 바로 잔잔함과 고요함의 마음, 즉 합일(合一)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인 靜을 드러내는 매우 정신적인 작품이다.
이것은 장자가 齊物論이라고 이르는 것, 즉 바로 “하나도 아니면서도 둘도 아니라”고 의미하는 불교의 관념인 不一不二이다. 다시 말해, 천지만물은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두루 관통한다; 장자의 나비의 꿈처럼 나비 같은 벌레조차 장자 같은 사람과 어떤 본질적인 연관이 있다.
사실 바로 이런 (노자와 장자의 중국 도교 철학에서 볼 수 있는) 齊物論을 전제로 해야 “무제”(191 x 129 cm, 2007)같은 크기의 또 다른 2007년 작품 ‘무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2004년 작품에는 사람의 윤곽으로 보이는 형태가 진한 녹차색의 어두운 배경에서 빛나는 연두색 잔디밭으로 달려가고 있다. 실루엣만 보이는 이 모습은 짙게 어두운 배경에도 속하기도 하고 잔디밭, 또는 싹트는 보리밭에 속하기도 한다. 이 인간의 모습과 배경, 전경이 다 서로 관통하듯이. 어쩌면 이진원 작가는 온 몸으로 자연과의 밀접하고 완전한 관계를 맺으며, 이런 관계에서 앞서 말한 ‘잔잔하게’ 고요하고 더할 수 없이 평화로운 그림들이 흘러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그림들은 작가의 눈이라는 하나뿐인 기관을 통한 자연의 시각의 지각적인 경험이 아니라 작가와 자연(또는 기(氣))의 상호적 존재론적 관통에서 비롯된다. 이진원 작가가 그리는 그림은 시각의 지각만으로 표현할 수 없다. 작가는 자연과의 명상적인 관계에 빠져들어 靜을 찾아내며, 이러한 바다풍경 속에 靜의 마음이나 상태를 드러낸다.
이진원 작가는 작품 속에서 이렇게 동양의 정신적 주제를 다루면서 동양의 전통적인 필법과 한지의 독특한 물성, 수채화 물감 같이 두꺼운 종이에 스며드는 먹물 등을 이용한다. 작가가 온 화면을 앞서 말한 바래고 흐린 백분빛으로 전 화면을 칠하는 것은 서양식 유화 물감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Breathing”(191 x 129, cm, 2005) 등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는 동양의 필법의 틀림없는 흔적이 더더욱 뚜렷하다. 이 작품은 길게 늘어뜨린 뿌리와 가는 줄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또는 아래로부터 위로 한 줄의 획으로 그린 것 같은 어떤 식물의 그림이다. 다시 말해, 지저분하게 늘어뜨린 뿌리와 가는 줄기, 그리고 잎사귀는 애매모호한 상호간의 관통 속에서 그려져 선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작가가 그리는 선에는 길고 가는 다리 같은 직선성이 있으면서도 이 직선성은 ‘몸통’이라고 부르기에 너무 굵지만 잎이 무성한 윗부분일지도 모르는 모습으로 번진다. 잎이 무성한 식물 윗부분들은 서로 얽혀 있는 것 같으나 혼란한 불화의 얽힘은 아니다. 식물들은 사이 좋은 조화 속에서, 장자의 齊物論의 뜻으로 서로 얽히거나 관통한 것이다. 이것은 혼란한 얽힘은 아니고 상호간에 공명되고 서로 호흡이 맞추어진 관통이기 때문에 식물과 길게 늘어뜨린 뿌리 주변의 물방울조차 식물과 윗부분처럼 끝없는 얽힘과 율동적인 춤의 결과물처럼 보이는, 길게 늘어뜨린 뿌리 주변의 작은 물방울을 둘러싸는 쾌적한 기운이 난다. 그림의 윗부분이 어떤 힘찬 상호간의 공명을 지적하는 것 같지 않는가? 이것도 역시 각종 명상이 추구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자연과의 합일(合一), 어떤 완전한 연관성 등을 드러낸다. 이진원 작가는 그러한 정신적 기복을 소박하게, 우아하게, 그리고 진정성있게 표현한다. “Wintry Wood”(66 x 81 cm, 2008) 같은 그의 그림을 보자. 작가는 소박하면서도 신중한 감각으로, 시각적이면서 청각적으로도 어떤 완전한 평화로움, 자연과의 합일에서 유래되는 안심을 그려낸다. 땅거미가 지기 직전에 내려앉는 해의 마지막 볕이 숲을 비추면서 밤의 어두움을 들일 때처럼 어떤 대단히 뚜렷하고 조화롭게 울리는 음악 – 말하자면 자연의 합창곡이 – 들려 온다. “Wintry Wood”의 아름답게 길고 다리 같은 나무를 살펴보자. 더없이 행복한 합일감이 화면을 지배하면서 화면 사각의 가장자리를 넘쳐 우주 속으로 번져 나간다.
인류의 정신적 탐구의 진수를 이렇게 소박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 아름다움에 부치는 송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기술을 위주로 하는 현대 문명에서는 자연이 우리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마음껏 이용하는 물건이나 되어 버린 것이다.
정신 세계의 위기는 인문주의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지식층의 정신적 갈망의 현상; 즉 함부르크나 파리, 베를린, 보스턴, 뉴욕 등 서양의 주요 도시에 스타벅스보다 명상원, 선 수련원 등이 더 많은 현상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서양 사회의 5% 내외의 소수의 사람들만 일요일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잘 보여 주듯이 개신교나 천주교 등 서양의 전통적인 종교는 서양인들의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현대 미술도 역시 근대 인류에게 아무런 정신적인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칸트가 생전의 마지막 대표작에서 말했듯이 예술은 인류의 정신적 탐구와 무관하지는 않다: “예술은 완전한 공동체를 향한 매우 기본적인 인간의 열망의 표현이다. 바로 이런 열망은 인간의 정신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바탕이다.” 서양의 현대 미술과 아방가르드 미술, (아서 단토가 말한) 탈역사적 미술 등은 (인간이라고 불릴 만한) 인간마다 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교육을 받은 서양인들이 교회는 물론, 미술관이나 비엔날레도 안 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서양의 미술계는 완전히 자립적이고 독재적이며 주변 사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양 미술계의 하나인 존재 이유는 탈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적인 책동을 하기 위해서다. 이진원 작가 같은 작가는 부패한 파리, 뉴욕, 베를린 등 이른바 국제적 미술의 중심지에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런 중심들의 최신 유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일에 몰두해 왔다.. 서양의 헛된 화려함의 그림자 속에서 작가들의 꾸준한 노력은 가까운 미래에 보상을 거두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작가들의 (동양식 회화를 통한) 정신적 탐구를 담은 작품은 바로 전세계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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