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 Masse du Sensible 감각덩어리
2014.02.12 ▶ 2014.02.18
2014.02.12 ▶ 2014.02.18
현주
mould Digital C printing, Diasec, 120x120cm, 2013
현주
mould 혼합재료, urethane paint, stainless steel, 2013
현주
0.03 Condom, stainless steel, 40x40x36cm, 2014
현주
oo- Digital C printing, Diasec, 100x100cm, 2010
현주
Chair Table red oak, Tung Oil, water, 40x40x75cm, 2014
현주
Chair Table Digital C printing, Diasec, 120x120cm, 2014
현주
Drawing1 fabric, red thread, 42x42cm, 2013
치유를 위한 양가적 세계
현주의 작업을 처음 마주하는 관객 대부분은 약간의 경계심과 긴장감을 갖게 된다. 그 주된 이유는 다소 노골적으로 보이는 몸의 표현 때문이다. 음밀한 부위를 드러낸 여성, 하반신 혹은 머리가 잘려나간 나체의 여성, 몸의 일부분을 연상시키는 군체(群體),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을 의심케 하는 주형(鑄型)에 몸을 넣은 여성, 성(性)적 자극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가구는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금기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선다. 현주의 작업은 분명히 공적 공간에서 보고, 보여지는 것이 불편한 이미지(image)와 매체를 포함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장 강력한 금기의 대상인 인간-여성-의 몸이 놓여있다.
현주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기억의 흔적을 표현하는 데에 몰두하면서부터 몸에 집중하게 되었다. 작가에 따르면 생각은 몸과 연결되고 몸의 감각은 감정으로 연결되기에 몸과 정신, 감정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문명은 이 둘을 무관한 것으로 분리시켰다. 이에 작가는 마음과 몸에 대한 형이상, 하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보편성을 회의(懷疑)하는 동시에 경계의 침투를 제안한다. 작가는 몸이야말로 세계의 구조와 관계를 경험하며 모든 철학과 정신을 체현한다고 믿는다. 몸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대표한다. 인간은 몸으로 살아가며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고 반응한다. 몸은 사회적 가치들을 표현하고 그것에 지배받지만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 뛰어넘는다.
작가는 몸을 압박하는 코르셋과 뾰족한 하이힐처럼 몸의 물리적인 흔적과 경험을 드러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몸의 표면에 남는 흔적뿐만 아니라 몸의 깊숙한 곳-내면-에 남는 흔적을 표현하기 위해 감정이나 상상을 고취시키는 작업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고 이것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양가성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양가적 세계에 들어선 작가의 최종 종착지는 치유의 실현이다. 도발적으로 보이는 작품들은 결코 도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치유를 위한 것이다. 이 세상의 존재들은 모두 양가적 속성을 갖는다. 특히 인간의 몸과 감각, 정신, 그리고 인간의 창조물은 모두 양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생명을 얻는 순간 죽음의 운명을 얻는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증오하고, 창조하면서 파괴한다. 금기를 만드는 동시에 욕망하고 위반하며, 복종하면서 반항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세계의 존재와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상처받는다. 이에 현주는 세계의 가장 솔직한 모습인 양가성을 받아들이고 인위적인 경계를 넘나들 때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0.03> 시리즈와 <거푸집 mould> 시리즈는 이러한 작가의 지향점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 중 부조와 환조로 동시에 제작된 <0.03> 시리즈는 오카모토(Okamoto) 콘돔(condom) 안에 폴리에틸렌(polyethylene)을 채워 굳힌 후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로 캐스팅(casting)한 것이다. 그런데 대표적인 남성용품인 콘돔을 매체로 사용했음에도 완성된 작품은 –매우 사실적으로 느껴지는-여성 유방의 형태이다. 남성과 여성이 각각 눈밭에서 소변을 본 후, 소변 때문에 눈이 녹아 생긴 구멍의 형태를 캐스팅하여 성적 상징의 역전을 보여준 헬렌 채드윅(Helen Chadwick)의 <소변 꽃 Piss Flowers>(1991-1992)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작업은 성적 정체성에 관한 인습적이고 보편적인 고정 관념을 일시에 뒤집는다. 이후 <0.03> 시리즈는 여러 개의 개체가 군집을 이루는 것으로 진화하여 여러 개의 유방을 가진 풍요와 양육의 상징인 지모신으로 변모한다. 남성적 상징이 여성적 상징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한편 <0.03> 조각의 군체(群體)를 머리에 쓰고 있는 여성의 사진인
사실 <0.03> 시리즈는 –그 외의 작품들 역시-많은 부분에서 전략적 본질주의(operational essentialism)를 추구했던 1970년대 페미니스트(feminist)들의 작업과 교집합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형태에 있어서는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낸시 아자라(Nancy Azara), 벳시 데몬(Betsy Damon) 등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현주의 시선은 여성에게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페미니즘적인 작업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너무 한정적인 정의내리기이다. 전술했듯이 치유를 위해 세계에 존재하는 양가성을 확인하고 세계를 나누어 놓은 경계에 침투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다. 콘돔은 남성의 피부를 감싸는 것이지만 여성의 피부와 맞닿는 것이기도 한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몸과 모두 접촉하는 경계 아닌 경계이다. 즉 작가가 그동안 금기시된 육체성을 부각시키고 성적 주제, 여성의 욕망 등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콘돔과 여성의 유방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언컨대 <0.03>은 유연한 관계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작업이다.
<거푸집> 시리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이 작품은 라이프 캐스팅(life casting)으로 제작된 거푸집의 외부 표면을 캐스팅 한 것이다. 즉 인체의 캐스팅이 아니라 거푸집의 캐스팅으로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또한 현주의 거푸집은 하나의 독립된 형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몸을 감싸기 위한 것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푸집> 시리즈는 스스로의 내면을 치유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즉 <거푸집>은 일시적인 경계로서 기능하는 차단막이자 보호막이며 성장을 위한 인큐베이터(incubator)이다. 그것은 창으로부터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주는 갑옷, 바느질을 용이하게 하면서 손을 보호해주는 골무와 같다. 동시에 상처의 치료를 위한 붕대 혹은 깁스(gips)이기도 한다. 또한 아직 세계에 나갈 준비가 덜 된 존재를 다독여주는 과도기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푸집>은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공간이다. 때가 되면 다시 밖으로 나와야 한다. 평생 그 안에 숨어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만든 거푸집은 언제나 몸의 일부만을 가려주는데 이 역시 세계와 존재의 관계가 결코 끊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존재는 살아 있는 동안 다른 존재, 그리고 세계와 결코 완전히 단절될 수 없다.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죽은 후에 들어가는 관(棺)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는 성충이 되기 위해 고치(cocoon)를 만들고 스스로 그것을 허무는 나비와도 같다.
한편 <거푸집>을 입고 있는 인체는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진정한 치유와 성장을 위해서는 묵묵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함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반대의 의미도 포함된다. 그것은 현대인들을 압박하고 억압하는 사회적 경계와 틀을 상징한다. 또한 실제로는 개인주의에 고립되어 누군가 자신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인간의 양가적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의자-탁자 Chair Table> 시리즈는 이처럼 모순적으로 보이는 양가적 속성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이 작품은 각각 의자와 탁자, 의자와 서랍탁자의 속성을 모두 가진 –두 개의-가구와 그것의 이미지를 이용한 합성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의자에는 혀의 모양을 한 돌기가 튀어나와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의자의 내부에 물이 담겨 있다. 두 개의 역할을 다 하는, 매우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 가구들은 사실 모순적이고 비실용적이다. 의자와 탁자의 기능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면 사용자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사용자는 의자나 탁자 둘 중 하나의 기능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모순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도 작가는 치유의 작용을 잊지 않는다. 서랍탁자의 내부에 담긴 물에 그 해답이 있다. 물은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하며 그 형태는 유동적이고 경계가 모호하다. 또한 노란 빛을 띠는 물은 구체적으로 어머니의 양수를 의미하는데 양수 역시 임신 중에 태아를 보호하고 출산 시에 분만을 도와주는 생명의 상징이다. 양수가 담겨 있는 의자 안에 들어가 있는 인체는 세상에 나갈 순간을 기다리는 태아와도 같으며 그 순간 <의자-탁자>는 또 하나의 <거푸집>으로 전환된다.
최근 들어 작가는 <자수 드로잉 Drawing Fabric> 시리즈를 통해 치유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A3 사이즈의 천에 컴퓨터 자수로 거푸집을 쓴 여성의 모습을 드로잉한 것이다. 바느질은 상처를 봉합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치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자수를 놓는 바느질의 행위는 천에 구멍을 내어 실과 천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의 와해와 결합,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양가적 반전은 존재한다. 실과 천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늘로 천을 찌르는 행위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것은 상처 내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선행되는 상처 내기처럼 양가적인 상황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상처를 받지 않는 존재에게 치유란 불필요하다.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감각을 갖고 있으며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상처를 받고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반대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슬픔을 경험한 존재만이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모순적이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태생적으로 미술은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동시적이다. 미술은 스스로 경계를 넘나든다. 미술은 한 사람의 내면과 외부 세계가 만나며 물질과 정신이 만나는 순간을 창조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하며 양가성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를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미술이다. 현주의 작업 역시 내면과의 대화이자 관객과의 대화이자 세계와의 만남이다. 자신을 보호하고 치유하기 위한 보호막이지만 성찰을 위한 상처내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업을 진행하면서 현주가 양가성을 온 몸으로, 정신으로 체험하는 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그 필연적 과정에서 몸과 내면-정신-이 치유된다. 세계가 치유된다. ■ 이문정
1984년 출생
송영규: I am nowhere
갤러리 그림손
2024.10.30 ~ 2024.11.25
김지혜 : SOMEWHERE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갤러리 도스
2024.11.20 ~ 2024.11.26
Rolling Eyes: Proposals for Media Façade 눈 홉뜨기: 미디어 파사드를 위한 제안들
대안공간 루프
2024.11.13 ~ 2024.11.26
선과 색의 시선 Perspective of Lines and Colors
필갤러리
2024.10.10 ~ 2024.11.27
제15회 畵歌 《플롯: 풀과 벌의 이야기 Plot: The Story of Wild Grasses and Bees》
한원미술관
2024.08.29 ~ 2024.11.29
오종 개인전 《white》
페리지갤러리
2024.10.11 ~ 2024.11.30
여세동보 與世同寶: 세상 함께 보배 삼아
간송미술관
2024.09.03 ~ 2024.12.01
2024 광주비엔날레 기념특별전 《시천여민 侍天與民》
광주시립미술관
2024.09.06 ~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