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환: BABEL
2014.03.19 ▶ 2014.03.24
초대일시ㅣ 2014년 03월 22일 토요일 05:00pm
2014.03.19 ▶ 2014.03.24
초대일시ㅣ 2014년 03월 22일 토요일 05:00pm
최영환
BABEL #1 Archival Pigment Print, 120cmx80cm, 2013,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3 Archival Pigment Print, 120cmx80cm, 2013,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6 Archival Pigment Print, 84cmx56cm, 2013,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8 Archival Pigment Print, 84cmx56cm, 2011,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10 Archival Pigment Print, 84cmx56cm, 2013,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11 Archival Pigment Print, 150cmx100cm, 2013,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13 Archival Pigment Print, 84cmx56cm, 2011,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14 Archival Pigment Print, 150cmx100cm, 2008,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17 Archival Pigment Print, 120cmx80cm, 2011, 개인소장
최영환
BABEL #20 Archival Pigment Print, 120cmx80cm, 2011, 개인소장
바벨, 절망의 도상학과 해방의 희미한 암시들
심상용(미술사학,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바벨-세상’의 조형적 계보학
최영환은 세상을 어둡게 묘사하는 작가가 아니라, 세상의 어두움을 보는 작가다. 어둡게 묘사하는 것과 어두움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가 주관이나 취향의 문제라면, 후자는 실체와 진실의 차원이다. 영국의 신세대작가 안토니 미칼레프(Antony Micallef, 1975-)의 표현을 빌자면, 세상은 ‘서서히 폭력과 포르노로 변신해가는 달콤한 디즈니 영화’와 하등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렇게 변질되어 가는지 알지 못한다. 변질된 세계는 이미 소녀의 기도까지 오염시켰다. 미칼레프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는 기도한다.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이 부디 끝나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 코는 조금 작게 보이게 해주시고, 가슴은 크게 보이게 해주세요.” 소녀의 기도를 간절한 횡설수설로 분열시킨 이 세계는 바벨탑의 세상이다. 그곳에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분열적인 삶을 영위한다. 무지로 인해 덫에 걸리고, 타자화된 욕망은 미혹으로 이끈다. 물론 분열은 질서로 위장하고 있다. 더 큰 절망일수록, 더 화사하며 더 반짝거리는 것들로 치장한 탓에, 분열과 절망은 잘 인식되지 않는다. 거창하고 위엄있는 것들로 가득한 바벨 - 세상에서 인간은 쉽게 길을 잃고, 자신을 상실한다.
최영환이 포착한 바벨 - 세상의 프레임들은 몇 개의 분명한 지점을 공유한다. 첫째는 자주 부재(不在)에 가까이 다가서는 빛의 과도한 결핍이다. 때론 지각에 필요한 최소의 것을 제외한 거의 모든 빛이 소멸된다. 그나마도 반사된 것들일 뿐, 광원은 어디에서도 눈에 띠지 않는다. 주조적 톤은 회색에서 검정 사이를 오가지만, 어둠이 극단적인 단계까지 진전되면서 중간 단계의 톤들마저 위협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최영환이 뷰 파인터로 보는 세계는 전체를 휘감아 도는 무거운 어두움에 눌려 있다. 이 행성은 분명 더 밝아져야만 할 어떤 곳이다. 잿빛 구름으로 덮인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어야 할 판이다. 내리누르는 불길한 회색 톤은 화사한 색들로 덧입혀져야만 한다. 하지만 여명의 기미는 너무 희미하다.
두 번째는 계보학적으로 바벨탑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유산에 해당할 것으로, 즉 신(神)의 경지를 향한 욕망의 부산물들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것들, 대도시의 고층빌딩들,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미사일과 포신들, 깃발, 치켜 뜬 시선, 들뜬 감각, 권좌를 향한 탐욕, … 바벨탑 - 세상에서 유일한 선(善)이요 미덕은 자고(自高), 곧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아의 과잉 충천과 이를 향한 의지의 비상한 표명이다. 나다나엘이 말했던 것처럼, 갈릴리에선 결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게 이 문명의 신조요 강령이다. 이는 최영환과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여전히 끓어오르는 고백이기도 하다 : “그 - 최영환 자신 - 는 자꾸 세상의 주인이 되려하고 혼자 완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존하는 곳에 탑을 올려 움켜쥐려하고, 외부의 개입에 대항하여 성벽을 쌓는다.” 본성적으로 교만한 자아에 대해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 1741-1800)가 묘사한 바가 옳다 : “악한 생각들의 샘물인 이 마음이 얼마나 흘러넘치는지, 자아가 표면에 떠 있는 동안에서 여전히 아래로부터 끓어오릅니다!”
바벨 - 세상과 인간의 교만한 내면에 대한 최영환의 성찰은 낭만주의가 이토록 번창하고, 그 분위기가 하늘을 찌를 듯 고조된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고색창연한 바로크적 향수쯤으로 과소평가될 수도 있다. 낭만주의 자체가 이미 신적 존재인 인간의 위대성에 올리는 봉헌 아니던가. 낭만주의 이후 숱한 시인과 미술가들의 작품에 담긴 궁극적인 메시지가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경계가 철폐된 것으로 비롯된 자축의 향연이었음을 누가 모르랴! 니코스 카잔차키스(Níkos Kazantzakís, 1883-1957)가 자신의 영웅 프리드리히 니체의 정조를 표출하면서 썼던 글에 신의 경지에 오르는 것에 전 인격을 투여하는 정신상태가 요약되어 있다 : “싸우며, 창조하며 물질을 영(전신)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할 자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할 것이다.” 하지만, 카잔차키스의 정신적 스승인 니체는 모든 의지가 선하다는 ‘위험의 황홀한 평형상태’에 의해 스스로 파멸하고 말았다. 니체는 자신의 의지로 신을 거부했고, 카잔차키스는 구원자로서 자신을 선택했다. 그리고 물론, 여전히 쇼펜하우어나 버나드 쇼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길버트 채스터턴(Gilbert K. Chesterton, 1874-1936)은 그것들에서 낭만주의의 광기를 제대로 파악해낸 많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다 : “만일 니체가 바보로 생을 마치지 않았다면, 그의 사상이 그렇게 마감되었을 것이다.”
낭만주의적 광기가 남긴 기발한 아이디어 더미들에서 자주 역력한 정신적 무기력이 꽃피었다는 사실은 21세기의 벽두인 오늘날에도 전혀 변함이 없다. 오늘날 글로벌 예술무대의 스타 가운데 한명인 무라카미 타가시 같은 키치작가조차도 마치 니체를 연상케 하는 자신의 ‘예술투쟁론’을 썼는데, 그것은 예술이 ‘미래를 위해 엄청난 모험’에 다름 아니라는 그럴싸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모험을 통해 정작 획득해야 하는 것이 명예와 달러일 뿐이라는 단서를 달긴하겠지만 말이다. 그에 의하면, 예술적 가치란 ‘회사의 실적과 무관하게 주가만 오르면 그만이라는 투자자의 속마음처럼 실체 없는 허구에서 태어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계보를 들먹이면서 일신의 명예와 돈벌이를 이토록 미화하는 것을 보면, 니체와 그의 신봉자들의 기분이 어떨지 의문이다. 바벨-세상에서 예술의 초상도 갈수록 기만으로 일그러진다. 그것 - 예술 - 은 한때 진실의 편일 것으로 기대됐지만, 오늘날엔 노골적으로 거짓의 가신 노릇을 자처한다.
바벨, 절망의 도상학과 해방의 희미한 암시들
그럼에도 예술의 본질적인 순기능은 ‘진리의 비은폐’와 관련되어 있다. 드러난 것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것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이 아첨, 전략, 마케팅, 기술 같은 것들과 궁극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진리와 진실에 대한 직관적인 반응 때문이다. 이것은 최영환의 세계가 인식하는 부름(calling)의 다른 이름이자, 현재 도모해나가는 사명(mission)이기도 하다. 그가 어두운 세상을 보는 것은 진실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위장된 밝음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개척할 수 있다는 바벨탑의 신화 자체가 폭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최영환은 거짓에 기반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본 세상을 보도록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그는 바벨 - 세상의 진실을 시각화한다. 일상은 초과된 자아가 저질러놓은 부조리로 가득 차있다. 정의의 부재는 ‘형용불가(ineffable)’하지 않다. 그것들은 때론 낮게 드리운 구름과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의 형상을 통해, 때론 도심의 쇼윈도우나 변두리의 유휴지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눈을 뜬 사람들은 삶의 주변에 널린 어두움을 직관하리라. 삶의 골목들에서 모락거리는 악(惡)을 감지하고, 대로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망을 목격할 것이다. 매일 매순간의 실존으로부터 죽음의 장엄미사곡이 연주된다는 것은 결코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있다. 최영환의 <레퀴엠> 연작이 종말에 대한 서시가 아니었듯, 그의 <바벨> 연작도 종말론의 시각적 삽화 이상이다. 최영환이 바벨탑의 어두운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그것 안에서 밝힘(lighting)이라는 빛(light)의 동사적 작용이 보다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최영환에게 바벨 - 세상의 어두움은 비관하거나 고발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더 치열한 절망 속에서 빛을 갈망하게 되는 조건일 뿐이다. 그의 <레퀴엠> 연작이 절망이나 체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것으로서의 죽음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무너진 바벨탑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언어들이 혼잡한 시대, 여러 나라들로 흩어진 시대, 실패와 분열과 전쟁으로 얼룩진 역사의 시점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최영환은 무너져내린 바벨의 도상학 안에 얼핏얼핏, 자유와 해방의 희미한 암시들을 남겨놓기를 잊지 않는다. 욕망과 기만의 계보학적 목록을 구성하면서, 그 목록들의 행간에 진리와 치유의 기호들이 작용하도록 배려한다. 이 세계는 기만적인 승리주의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비관적이고 무신론적인 실존주의에서 발원하는 탄식과 무기력으로 주저앉지 않고, 유물론적 행동주의가 귀착되곤 하는 비난과 고발로도 경사(傾斜)되지 않는다. 이것이 최영환의 세계가 가지는 진정한 차별성이요 의미다. 그는 밝고 화사한 것들을 내세움으로써 거짓을 말하는 이 시대의 더 많은 작가들과 달리 어두운 세상을 직시함으로써 빛과 진리의 필요를 역설하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선택하는 것을 정죄하시고, 인간이 정죄하는 것을 선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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