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천
숨 Breath 철, 유압프레스, 130x285x80cm, 2011
임승천
1전시실(상실 Missing) 전시전경 2014
임승천
무제 Untitled 혼합재료, 66x36x11cm, 2014
임승천
노시보 Nocebo 화학수지에 아크릴채색, 110x18x27cm, 2014
임승천
노시보 Nocebo 화학수지에 아크릴채색, 110x200x230cm, 2014
임승천
페르소나 Persona 화학수지에 아크릴채색, 20x50x60cm, 2014
임승천
고리 Link 혼합재료, 103x16x25cm, 2014
임승천
무제 2014
임승천
무제 2014
임승천
순환 Circle 혼합재료, 220x220x270cm, 2014
성곡미술관은 ’2013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수상기념전, <임승천: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를 개최합니다. 특유의 상상력과 탄탄한 가설구조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로 바라보고 바로 잡으려는 임승천 작가의 건강한 시선과 치밀한 연출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1.
임승천은 세상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른바 가설구조(假說構造)다. 개연성이 충분한 실화(實話)적 신화(神話), 허구를 창조한다. 작가가 이러한 픽션(fiction)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이런저런 세상의 병리적 징후를 비판적으로 진단하기 위함이다. 특히 특정 이익집단과 자본, 권력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된 일방통행식 시스템과 그러한 시스템에 순응하는 현대인들의 무력감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고자 함이다.
임승천의 6번째 개인전이기도 한 이번 수상전은 ‘네 가지 언어’라는 타이틀로 펼치는 일종의 옴니버스(omnibus)식 전시다. 지난 대부분의 작업이 그러했듯 모두 가설이다. 짧지만 플롯(plot)이 분명하고 탄탄한 단편소설을 보는 듯하다. 밀도 높은 상상력과 독일표현주의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는 관객반응중심의 연출이 돋보인다. 네 가지의 서로 다른 키워드를 각각 다른 공간에서 각기 다른 상황으로 연출했다. 극적인 상황이 강조된 이번 전시는 그동안의 임승천 작업과 전시방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2.
1전시실(Missing)은 가설을 풀어나가는 의식(儀式)의 출발점으로 보인다. 포유류의 원초적인 호흡을 연상시키는 불편한 기계음이 전시장에 울려 퍼진다. 몸이 비대해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거대한 물고기의 파국적 울부짖음은 채우고 또 채워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끝없는 인간욕망을 돌아보게 한다. 센서에 의해 작동하는, 움직이는(kinetic) 물고기가 자아내는 시각적/청각적 몸트림은 과도한 욕망으로 비대해진 거대 물고기의 또다른, 끝 모를 욕구충동으로 다가온다. 다리가 묶인 채 1, 2층에 산재해 있는 사면(四面)인물상들과 함께 이번 전시 전체를 아우르는 주된 모티프로 작용하고 있다. 이야기의 출발점이지만, 현대인들의 과도하게 왜곡된 욕정과 그로인한 병리현상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뻣뻣하게 경직된 몸, 물질지향으로 획일화되어 있는 인물군상들은 행복과 결핍의 집합적 상징대리물로 현대인의 집단 무의식을 내포하고 있어 보인다. 비대한 물고기와 함께 ‘실종(Missing)’공간에는 ‘표류자’와 ‘피를 쥐고 있는 소녀’, ‘버터플라이’가 동시에 등장한다. 견고한 철제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물고기는 주변 인물들의 피와 꿈이라는 유기질, 희망을 빨아먹고 사는 일종의 흡혈귀다. 얼굴을 벽에 처박은 채 채워지지 않는 욕정에 절망스러워한다. 불행하게도 물고기에게 날개, 희망을 빼앗긴 표류자는 상실의 감정을 애써 감춘 채 멍하니 어딘 가를 응시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1전시실 입구에 웅크리고 있는 소녀, ‘버터플라이’의 비쩍 마른 등에는 기다랗고 처참하게 갈라진 틈이 눈으로 만져진다. 마치 변태(變態)한 나비의 빈 껍질과도 같이 공허하고 쾡한 모습은 누군가에게 생명질을 모두 빨려버린 듯한 형국이다. 타율에 의한 꿈의 상실, 혹은 스스로의 과도한 욕구충동에 포획되어 꿈을 팔아버리고 결국 좀비처럼 되어버린 미래의 인간흔적이기도 하다. 전시공간 중앙의 푸른색 비옷을 걸친, ‘피를 쥐고 있는 소녀’는 보이지 않는 두터운 벽에 갇힌 듯 애절한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꽉 쥔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선혈은 깊은 상처와 복수의 감정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 다른 인물상과는 달리 발가벗겨진 모습이 아닌 이 소녀에게 있어 우비는, 비록 그것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유일한 방어기제이자, 보호막일 것이다.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욕망이 충족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궁금증과 불안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모습이다.
2전시실(Nocebo)에서는 노시보 효과를 모티프로 제작, 연출한 ‘언어의 숲’이라는 이중의 잔혹극이 펼쳐진다. 겁에 질린 듯 얼굴을 가리고 본래의 속심을 숨기고 있는 듯한 거인이 여인과 마주하고 있다. 여인은 벌거벗은 몸으로 어떤 진실을 은폐하려는 듯, 위장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유혹하듯 남성을 마주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사로잡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 여인의 거짓된 유혹으로 억울하게도 저주를 받게 된 남성은 몸이 계속 커지고 돌처럼 굳어진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설화, 혹은 전설을 모티프로 제작, 연출한 공간이다. 임승천은 금기, 혹은 전래의 신념이라는 것이 지닌 양가성, 허구성, 자의성을 갈파(喝破)한다. 세상의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진실에 대한 일방성과 그것의 폭력성을 믿음과 저주라고 하는 양가적인 가치로 지적하고 있다. 왜곡된 이기적 욕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고 상대가 파멸해가는 과정을 위장된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중의 잔인함을 지적한다. 과도한 인간욕망과 거짓을 먹고 자란 ‘시대의 변종’으로서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는 듯하다. 특정 이익집단에 의해 현상이 변질되어가거나 비뚤어져가는 세태를 꼬집은 작품으로 이해된다. 거짓과 위선이 배태한 변종을 도처에서 만난다. 원인제공자의 입장은 아닌지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볼 일이다. 거짓된 말의 가공할 폐해와 말의 진정성을 묵상하는 공간이다.
3전시실(Link)에 들어서면 본연의 감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사회라고 하는 인공의 틀, 즉 타율에 의해 조장되는 가공된 현상, 또는 그것을 관성적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거짓된 인격(persona)을 마주한다. 상황별로 세팅된 희로애락의 가면을 번갈아가며 각각의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가야만 하는 서글픈 현실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순수한 자화상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표백된 마스크에 가려져 있다. 정해진 기준과 일정한 규율에 의해 반응해야하는 은폐된 기쁨과 슬픔의 감정, 주변 상황에 맞게 표정을 세팅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을 비웃고 있다. 자신의 기준이나 감정이 아닌 세상의 그것을 따라야 하는, 위장되고 포장된 웃음으로 살아야 하는 현세태를 꼬집는다.
1전시실에 이어 군데군데 군락(群落)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는 사면상들은 현대사회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혹은 분명하게 보이는 끈, 연결고리, 관계 등을 들춰내고 있다. 마치 계획된 시나리오에 의해 예비되고 예견된 듯한 연쇄작용과도 같은 네트워크의 고리, 그물망의 위장된 속성과 그 안에서 발생, 경험 가능한 끈끈한 연대의 개연성을 지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물들의 다리 발목부분을 단단히 포박한 것은 필요악과도 같은 이러한 억압적 관계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희로애락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사면상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다. 인물들의 머리는 각기 다른 크기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결코 채울 수 없는 인간욕정의 부피를 상징한다. 인간 스스로 비우지 못하고 떨쳐내지 못한 엄연한 현실로서의 욕망의 그릇이다. 가늠할 수 없는, 계량할 수 없는 그것의 부피와 한정 없음을 그러나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유한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4전시실(Circle)에서 만나는 마지막 작품, ‘순환(Circle)’은 사회의 허상과도 같은 실상을 잔상(殘像)의 원리를 이용해서 입증하려는 임승천의 세심한 노력으로 보인다. 세상에 가려진 진실과 우리가 가진 위대한 착각과 환영을 들추어내고 걷잡으려는 노력이다. 서커스 공연을 연상시키는 천막 속에서 벌어지는 축제 형식으로 연출했다. ‘순환’은 조트로프(Zoetrope)라는 영화의 초기방식을 원용한 작가의 새로운 연출방식이다. 변화는 부분의 재배열에 의해 발생하며 새로운 인식의 재배열이 이루어질 때 현실인식 패러다임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작업으로 이해된다.
큰 변화가 없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인류의 역사, 인간의 삶은 보기에 따라 일정한 반복을 거듭하며 진화해왔다. 과연 삶은 움직인다. 고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지 않는다. 임승천의 ‘순환’은 어쩌면 대단히 공허한, 나아가 상식적인, 이른바 뻔한 형식구조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작 당사자들이 기계적으로 단순 행위를 반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덧없고 공허한, 바니타스(vanitas) 형식으로 보인다. 케이크 모양으로 구성된 시스템의 세계는 환경적 조건들이 무시된 채 그러할 수밖에 없는 획일적 종속구조를 아날로그적인 판타지 형식으로 선사한다.
냉혹한 성과중심의 사회편재를 암시하듯 작품상단의 ‘시스템 지배자’들은 청기, 백기, 황기를 번갈아 들면서 타인과의 경쟁을 미친 듯 부추긴다. 청백기가 우열을 가르는 기준 깃발이라면 황색기는 자신들의 수직적 시스템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의미로 보인다. 이들의 모습은 동서양 여러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들의 모습을 결합시킨 일종의 아상블라주 조각이다. 마치 칼을 쥔 듯한 모습으로 단호하면서도 탐욕스런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기계적으로 깃발을 들어대는 모습에서 이들 지배자들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자라기보다는 관성(慣性)적 판단에 근거하여 시스템을 유지, 관리하는 이런저런 힘의 최정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이한 형상의 눈과 입을 놀리며 쉼 없이 무언가를 전달하는 등 기괴한 감시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시스템 관리자’, 명품 브랜드 벽 앞에 서서 명품 속옷을 자랑하듯 내보이며 캉캉을 추고 있는 ‘시스템의 향유자’, 망치를 들고 브랜드 벽을 파괴하려는 최하단의 ‘시스템 파괴자’에 이르기까지 ‘순환’은 총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기계의 일부처럼 상호 분리되어 있으나, 움직임은 대단히 규칙적이며 순차적(arithmetic)으로 이어진다. 권력의 집중방식과 운영원리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하단의 ‘시스템 파괴자’들이 모두 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보란 듯 전면을 향해 있는 상단의 그룹들에 대항하려는, 이들의 견고한 시스템을 아래로부터 공략하려는 강력한 의지로 읽혀진다.
3.
임승천의 작업은 텍스트와 함께 이루어지되, 이미지 중심의 연출로 관객의 몰입도와 집중력을 우선 고려하는 특징이 있다.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고 극대화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핀조명도 사용한다. 시와 소설은 물론 텍스트를 읽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정서와 이미지 우선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일반인의 변화된 지각방식을 고려했다. 마치 표현주의 시(詩)를 만났을 때 행간을 유추하고 메워가며 감상하듯, 임승천의 작업은 여러 독립상들 사이사이의 간극과 긴장감, 행간의 의미를 간파해야 하는 가벼운 부담이 있다. 이미지와 함께 임승천이 구사하는 주요 작법은 사운드다. 이야기와 사운드를 결합한 그의 작업은 감상에 있어 공감각적 지각을 요구한다. 작업의 영감은 주로 소설과 영화로부터 받는다. 신화나 전설도 주요 영감원이다. 특히 애니메이션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또다른 세상, 차원이 다른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나는 뜨거운 접점이다.
이번 수상전에서 임승천이 선보이는 네 개의 키워드는 ‘실종(Missing), 노시보(Nocebo), 고리(Link), 순환(Circle)’ 등이다. 작가의 지난 고민과 관심이 선형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까지의 전시에서 주목했던 세상을 살아내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한 반성적 고찰과 더불어 삶의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삶을 규정지으려는 이런저런 시스템을 직간접적으로 들락거리며 세상을 줌인/아웃(zoom-in/out)시켜 나갔다. 아예 통째로 축소시키기도 하고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등 삶에 대한 수평적 고찰로부터 전지적 관점을 넘나들며 자신의 시점을 달리 두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임승천의 노력이 비교적 폭넓은 공감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사회의 기본 조건과 본질적 가치들을 특유의 상상력으로 강조하고 환기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피하고 싶은 당대의 현실이슈를 묵묵히 되짚어온 작가의 실천적 노력은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의 역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임승천은 이런저런 의제(議題)들을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소설적 구성방식과 극적인 연출로 풀어냄으로써 관객들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작가의 이러한 소통방식은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하는 일종의 자기비판적 사회진단프로젝트로 보인다. 쉽게 끝나지 않을,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인 셈이다.
임승천의 조각은 잿빛이다. 그의 언어도 잿빛이다. 그가 건드리는 사회 또한 잿빛이다. 임승천의 연출은 잿빛으로 변해가는 세상에 대한 번제(燔祭)일지도 모르겠다. 전시된 인물들의 표정이나 자세, 디테일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임승천이 이들 조상(彫像)들을 주요 등장인물로 하여 전달하고자하는 이야기, 혹은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곱씹어 보자. 이전의 전시와 달리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 여성을 다수 등장시키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남녀가 공존하면서 빚어내는 긴장과 호흡이 흥미진진하다. 그가 지어내고 빚어낼 다음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임승천의 에피소드와 연출이 현재진행형의, 살아 숨 쉬는 삶의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1973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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