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ression - 마음속에 새겨진 풍경
2010.03.24 ▶ 2010.03.30
2010.03.24 ▶ 2010.03.30
전 호
1월의 금강산 Watercolor on Arches, 162x112cm, 2009
전 호
몽셀미셀의 아침 Watercolor on Arches, 53x40.9cm, 2003
전 호
성산 일출봉 Watercolor on Arches, 72.7x53cm, 2009
전 호
장미 Watercolor on Arches, 53x40.9cm, 2010
[ 전호 화백의 53년 화업 - 작품집 출판기념 특별기획전 ]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 한국수채화의 새 지평을 연 ‘전호’ 화백의 작품집 출판 기념 초대전이 2010년 3월24일(수)~3월30(화)일 까지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전호 화백이 걸어온 53년의 화업을 하나로 묶어 선보이는 작품집 출판기념 특별전시로, 색채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통해 실제 자연의 풍경을 재현하는 기본적 조형 틀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느껴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재해석 하여 구사하는 작품세계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전호 화백 특유의 선염 기법을 통한 예민한 미적 감수성과 세련된 조형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 평론글
전 호의 작품세계
수채화의 지평을 확장하는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선염기법
신항섭(미술평론가)
수채화는 감성적인 표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고 표상하는 과정은 수채화의 감각적인 표현과 유사하다.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을 때 수채화는 즉자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표현의 즉자성은 일회적인 기법상의 특성에 기인한다. 감각적인 표현임에도 미세하고 섬세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기에 예리한 감성적인 표현에 능숙한 작품을 보면 신경세포가 전율하는 듯싶은 짜릿한 미적 쾌감을 맛보게 된다.
전 호(全 虎)는 타고난 감수성을 바탕으로 풍부한 시각적인 인상의 수채화를 통해 일찍이 독자적인 형식미에 도달했다. 수채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부족한 현실에서 자기신념에 의지하여 외길을 걸어온 그의 행보를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수채화에 대한 편견 속에서도 개별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강구하여 마침내 그 자신은 물론 한국 수채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단순히 자신의 작품세계의 심화 및 외연을 넓히는데 뿐만 아니라, 한국 수채화 화단의 전체적인 입지를 확고히 하고 또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창의적인 작가로서의 창작활동과 수채화 인구의 저변확대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그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전통적인 사실묘사 중심의 조형개념을 타파하고 수채화 고유의 물성을 이용한 선염기법을 발전시켜 개별적인 형식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의 수채화는 아주 간결한 인상이다. 선염기법을 활용하여 짐짓 개방적이면서도 대담한 필치로 형상을 요약하는 그의 수채화는 군더더기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산뜻하다. 생략과 절제로 요약되는 그의 조형언어는 현실상의 압축이자 함축이라는 방법을 적용한다. 다시 말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을 취하면서도 실은 많은 부분을 생략하거나 단순화한다. 따라서 전체상으로는 현실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묘사를 지양함으로써 개략적인 이미지로 압축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선염기법을 위주로 하는 작품은 더욱 간명하다.
그럼에도 작품을 보면서 결코 허전하다거나 싱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간결한 인상과는 달리 그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언정 간결한 이미지 속에 현실을 내포하고 있는 까닭이다. 세부적인 묘사를 지양하는 까닭에 오히려 눈에 보이는 현실을 함축하는데 집중할 수 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개별적인 형식만을 의식한 생략과 단순화가 아니라, 조형적인 개념 및 회화적인 사상을 보다 선명히 부각시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이는 현실상과 화화적인 이상 사이에 놓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다. 즉 현실상과 회화적인 이상을 통합하여 그 중간 형태의 조형적인 형식미를 모색하는데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현실적인 감각을 뛰어넘는 보다 자유로운 조형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단순화함으로써 실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감각을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감각이 반영된 사실성은 여전히 화면에 충만하다.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재해석이기에 그렇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포괄적이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전체적인 인상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부에 대한 지각능력이 지극히 예민함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표현을 지양한다. 그러기에 언제나 전체를 보며 개략적인 이미지를 추구하는 까닭에 시원한 인상이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결코 세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부적인 이미지 묘사를 뛰어넘는 사실성을 작품 속에 내재시키고자 할 따름이다. 사물의 형태에 대한 예민한 지각능력은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윤곽선에 나타난다. 밑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소재의 윤곽을 날카롭게 표현하는 장미를 소재로 하는 일련의 정물화를 보면 타고난 기교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기술에 의탁하지 않은 채 보다 자유로운 형상의 변주를 즐기려는 입장이다.
그는 색채표현에서도 굳이 현실적인 색채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림이란 어차피 현실과 다른 일루전의 세계일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한 결과이다. 그러기에 색채구사가 자유롭다. 현실에 근거하면서도 실제로는 보다 회화적인 색채이미지를 선호한다.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색채이미지, 또는 그 자신의 회화적인 이상미를 실현하는데 적합한 색채이미지를 탐색하는 것이리라. 결코 시각적인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색채의 발색을 억제하는 편이다. 수채화의 맑고 맑은 색채이미지를 강조하는 경향도 아니다. 다만 내면세계를 투영하는데 적합한 색채가 선택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삶에 대한 깊은 응시에서 비롯되는 색채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색채를 선호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의 발로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풍경화와 정물화로 나뉜다. 풍경화는 해경, 즉 바다풍경과 산 풍경, 그리고 해외여행에서 만난 이국풍경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대상에 따라 표현방법이 다르다. 바닷가 풍경은 전형적인 수평구도로서 광활한 바다와 높은 하늘을 대비시키면서 시야를 끝없이 확장시킨다. 무엇보다도 낮은 구도의 원경은 대지와 바다 그리고 하늘이 어우러지는 장엄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이에 반해 산을 중심으로 하는 풍경은 촌가라든가 산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 삶을 조망케 한다. 특히 촌가를 배경으로 하는 산촌의 설경에서 지팡이를 짚고 눈길을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에서는 새삼 너그러운 대자연의 품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이 자연을 대상을 하는 풍경화는 시각적인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 철학적인 사유가 읽혀지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경쾌한 이미지의 수채화임에도 생략적인 간결한 형태 및 중후한 색채 이미지가 그러한 내적인 정서를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한편 베네치아, 파리, 모스크바 등 해외여행의 인상을 표현한 외국풍경은 이국적인 정서 및 낭만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유럽여행에서 만난 중세시대 건물들에 담긴 역사성 및 이국적인 풍정을 현실감 있게 표현한다. 건물의 형태와 더불어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함으로써 생동감, 현장감을 이끌어낸다. 고도시의 풍경은 인위적인 직선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많기에 선염기법과 선묘를 병행한다. 섬세한 필치의 윤곽선으로 건물의 형태를 잡고 채색으로 마무리하는 식이다.
여기에서 그는 극단적인 명암기법을 활용하여 명쾌한 이미지의 풍경을 보여준다. 건물의 외벽이 하얀 소지 상태, 즉 채색을 생략한 채로 나타나기도 한다. 부분적으로 이처럼 채색을 생략함으로써 극단적인 명암효과와 더불어 명료한 시각적인 인상을 심어준다. 하얀 상태로 비어둔 건물은 정상적인 시선에는 기괴할 따름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처럼 하얀 백지상태의 이미지가 함께 해도 전혀 시각적인 불화를 조성하지 않는다. 같은 형태, 유사한 색깔의 건물을 빈틈없이 묘사할 경우 시각적인 긴장감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처럼 부분적으로 채색을 생략함으로써 선명하고 명쾌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시각적인 개방감과 더불어 정신 및 감정의 해방을 느끼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풍경화의 경우 작품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형태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작품도 있다. 2006년 작 ‘노르망디의 추억’은 단지 뚜렷한 윤곽과 어두운 실루엣 형식으로 형태를 나타낼 뿐 세부적인 수식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실성이 약화되지 않는다.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물이 빠진 바닷가 멀리로 날카로운 첨탑과 중세의 건물이 섬과 한 덩어리를 이룬 몽셀미셀 풍경은 즐겨 그리는 소재이다. 작품 전체가 암갈색의 단색조로만 표현되는 이 작품은 사실적인 묘사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의 비구상에 가까운 표현인데도 현실감이 살아 있기에 그렇다.
어쩌면 실루엣과 같은 단색조의 간명한 이미지로 압축해낼 수 있는 것은 심상이 명확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그 풍경을 더 이상 마주하지 않고도 능히 그 형상을 재현할 수 있을 만큼 그 실상을 선명히 심상으로 변환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실제를 압축하고 요약할 수 있는 조형감각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태묘사가 보이지 않는데도 그로부터 가공된 현실이 아닌, 실제의 풍경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이에 연유한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눈에 보이는 사실의 재현에 연연하지 않고 심상을 받아쓰는 형태로 작업한다. 심상에는 필경 그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회화적인 사상이 둥지를 틀게 마련이다. 경험은 그 전체상을 지배하는 형태감각을 위해 필요하고, 회화적인 사상은 실제를 압축하고 요약하는 조형적인 해석을 위해 필요하다. 물론 더불어 오랜 작업을 통해 익힌 숙련된 손의 감각, 즉 조형적인 기술이 뒤따라야 한다. 심상이 명확하더라도 실제를 압축하는 조형감각이 따르지 못하면 사실성이 약화되고 마는 까닭이다.
실루엣 형식의 지극히 간결한 이미지로 완성되는 작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삶의 무게, 진실성 같은 정서가 감지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림이란 어차피 그 자신의 인생관의 표현, 즉 삶에 대한 철학과 사상의 표현이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그림을 통해 무언가 사색의 실마리를 잡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사유의 흔적이란 다름 아닌 삶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삶에서 겪는 희로애락이 작품 속에 담기게 마련이다.
어쩌면 그는 보이는 사실보다는 일상생활에 반응하는 감정표현에 더 의미를 두는지 모른다. 사실적인 묘사로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 반면에 사실적인 형태묘사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면 보다 자유로운 표현적인 이미지가 가능해진다. 선염기법을 중시하는 것도 이처럼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선염기법은 구체적인 형태묘사와는 다른 희로애락의 감정표현이 용이하다. 바꾸어 말해 정서적인 효과를 나타내는데 적합한 표현기법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는 보이는 사실은 전체상으로 국한한다. 세부를 생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형태묘사보다는 내면적인 세계 및 정서적인 표현에 더 큰 의미를 둔다. 그의 그림을 보면 감상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에 따라 다양한 세계를 보여준다. 물감이 번져나가는 선염기법은 무한한 정신 및 감정의 유희를 가능케 하기에 그렇다. 즉, 의식의 확장 및 감정의 해방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꿈과 사랑과 낭만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행복을 꿈꾸게 되고, 달콤한 사랑을 그리게 되며, 낭만적인 이국에의 여행을 동경하게 된다. 거기에는 미지에의 동경을 자극하는 꿈과 사랑과 낭만적인 정서가 가득 담겨 있다. 현실풍경이지만 현실을 극복한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환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림 속에 실현하려는 것은 현실을 초월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다. 이상은 언제나 조금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기 십상이다. 승화된 현실이 곧 이상향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의 풍경화에서 하늘의 표현, 즉 구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은 절대자유를 구가한다. 막히는데 없이 무한한 자유의 비행을 가능케 하는 하늘의 주인인 구름은 인간에게는 영원한 선망의 대상이다. 그는 선망의 대상인 구름을 통해 우리의 꿈과 사랑과 낭만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다양한 표정을 지닌 구름이야말로 희로애락의 감정표현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따라서 드넓은 하늘에 갖가지 추상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구름을 보면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특히 넓은 들녘이나 바닷가 풍경일 경우에는 하늘과 구름이 거의 삼분의 이를 차지한다. 수평구도의 풍경화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보다는 구름표현에 큰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적인 구도가 아닐까. 하늘은 시야의 확장을 통해 심신의 해방감을 맛보게 한다. 그 하늘을 갖가지 모양으로 수놓은 구름에다 그 자신의 심경을 반영하고 있다면 비약일까. 아니,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구름은 시각적인 이해를 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구름은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표현일 수 있다. 한 예술가로서 겪는 여러 가지 희로애락의 감정이 구름을 통해 펼쳐지고 있는지 모른다.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위한 구름이 아니라, 그 자신만의 감정세계를 담아내는 표현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구름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흉낼 수 없는 장중한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드라마를 은유한다. 그러한 구름의 이미지에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희로애락의 감정을 오버랩시키는 것은 아닐까.
그의 풍경화는 서정성이 짙다. 어느 작품이나 한 편의 서정시를 읽는 느낌이다. 현실을 압축하고 요약하는 조형어법에서 시적인 함축 및 절제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지양하여 실루엣처럼 단순화시키는 작품의 경우에는 시적인 긴장이 더욱 뚜렷하다. 그가 그림 속에 투영하는 시적인 이미지는 서정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꿈과 같이 달콤하고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는 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심미적인 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정물화는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장미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은 그 자신의 화풍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정물은 소재를 바로 눈앞에 두고 보게 됨에 따라 형태는 풍경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장미꽃 모양이 사실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백장미의 경우 꽃의 형태묘사가 부분적으로 생략되고 있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꽃 한 송이를 놓고 볼 때 절반은 아예 꽃의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절반가량은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종이 상태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풍경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빛이 직접적으로 닿는 부분, 또는 시각적인 명암차이라는 필요에 의해 채색을 생략하는 기법이 정물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화병에 꽂혀 있는 백장미는 비표현적인 부분, 즉 채색을 생략한 부분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게 된다. 실제로 묘사한 부분, 즉 채색을 한 부분에도 그저 음영을 나타내는 정도로만 채색을 덧붙이는 식이다. 이렇듯이 아예 소지 상태로 두는 데도 전체상으로는 사실적으로 보인다. 백장미의 경우 겨우 삼분의 일 정도만 형태묘사를 하고 있는데도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붉은 장미나 노란 장미의 경우에는 좀 다르다. 빛이 직접적으로 닿는 부분을 소지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꽃의 색깔에 따라 전체를 동일한 색채로 덮는다. 그리하여 꽃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형국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는 의도적으로 생략과 절제 또는 단순화라는 방식으로 간결한 형상에 도달한다. 그러나 간결하지만 사실성은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비록 부분적으로 묘사할 뿐이나 그 부분적인 묘사 부분에서 사실적인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실제처럼 묘사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실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성이란 일종의 생동감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표현이야말로 사실성이다.
그가 그린 장미는 실제를 초월하는 그 자신만의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회화적인 조형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음영 부분에 의해 드러나는 장미꽃의 형태를 보면 기술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조형적인 세련미가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밑그림 없이 일회적인 표현으로만 사실성이 넘치는 장미꽃을 그린다. 구체적인 형태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화사하면서도 우아한 시각적인 이미지로 그 모습을 바꾸는 장미꽃은 숙련된 손의 기술과 세련된 미적 감각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렇다. 그의 장미꽃에는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일종의 숨김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완전히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 상상의 여지가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이미지를 유발하는 것이리라.
장미꽃 자체의 고상하고 세련된 형태미와 함께 추상적인 이미지로 처리되는 배경 또한 남다른 색채감각의 소산이다. 장미꽃을 안고 있는 화병의 형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두운 색조로 처리되는 화병은 농도 짙은 선염기법으로 표현된다. 화병의 형태는 물론 재질이 드러나지 않은 채 단지 화병일 뿐이라는 가정의 이미지로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이 꽃병의 형태를 묘사하지 않음으로써 되레 생략적인 이미지의 장미꽃의 존재를 더욱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부각시킨다. 만일 꽃병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면 시각적인 긴장감은 사라지고,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이미지 또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는 장미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정물화에서 수채화가 가지고 있는 표현적인 특징을 명쾌히 살리면서 개별적인 형식미에 도달하고 있다. 선염법이라는 수채화 특유의 표현기법을 살린 장미꽃 그림은 현실적인 미와는 확실히 차별화된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 자신의 미적 감수성이 포착해낸 장미꽃의 신비이자 환상의 세계인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장미꽃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던 이상적인 미에 대한 현현인지 모른다. 장미 스스로가 꿈꾸어온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그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그의 수채화는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생을 관조하게 만드는 사색의 힘이 담겨 있다. 즉 감각적인 조형세계를 뛰어넘는 삶의 연륜과 무게가 표현되고 있다. 기교를 극복하고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한 회화적인 이상경을 연출하려는 것이다.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시각적인 이미지는 수채화 특유의 선염기법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예민한 미적 감수성과 세련된 조형감각으로 선염기법에 의탁하여 수채화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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