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Between Layers
2010.03.18 ▶ 2010.05.09
2010.03.18 ▶ 2010.05.09
한성필
Hommage chromogenic print, 2009
한성필
Light of Magritte chromogenic print, 2009
한성필
Magical Watermill chromogenic print, 2009
한성필
Melting chromogenic print, 2008
한성필
Plastic surgery chromogenic print, 2009
한성필
The Ivy Space chromogenic print, 2009
한성필
The Wonderland Circus chromogenic print, 2009
한성필
Overlapped in Time chromogenic print, 2009
한성필
Wrapping Project 갤러리 잔다리 외관 랩핑, 2010
한성필
Wrapping Project 갤러리 잔다리 외관 랩핑, 2010
이미지의 유쾌한 마법
「파사드」 연작을 통해 실재와 재현, 진짜와 가짜의 혼동에서 오는 인식론적 즐거움과 환영의 효과에 천착해 온 한성필이 신작 「In Between Layers」를 선보인다. 전작에 등장했던 건물의 수많은 '파사드'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건물 보수공사 기간 동안 초라한 외관을 은폐하여 실제의 전면을 대신하는 임시적 파사드이고, 둘째는 처음부터 건물의 일부로 당당하게 자리 잡은 지속형 파사드이다. 첫 번째 유형의 파사드는 공사가 끝나면 사라지게 될 운명이라는 점에서 덧없고 유한한 파사드이자, 배후에 실재를 감추고 있는 가면으로서의 파사드이기도 하다. 그들은 실재와 흡사할 뿐만 아니라 낡고 오래되어 훼손된 원형보다 더 실재다운 가짜들이다. 한편 두 번째 유형의 파사드는 단조롭고 공허한 건물 벽에 들어 선 '벽화'로서의 가짜, 건물의 형태나 구조와 상관없이 자율성을 보장받은 실제 벽면으로서의 가짜들이다. 공공미술의 기능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번 전시에서도 이 두 가지 유형의 파사드가 함께 등장하고 있다.
한성필의 작업이 가져다주는 시각적 즐거움은 진짜와 가짜의 은밀한 공모에 의지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잠시 활동했던 모리스 앙리 오랑주(Maurice Henri Orange)의 데생 「사전(私錢)꾼들」은 양자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메타포이다. 이 데생에서 위조주화를 만드는 모조의 명수들의 우두머리가 방금 생산된 주화를 살펴보더니 "어떤 멍청이가 진짜 동전을 만들었지?"라고 호통을 친다. 이 에피소드는 진짜와 가짜의 관계에 대한 우스운 진실을 말해준다. 사전꾼들의 노동은 가짜 주화, 그것도 진짜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진짜에 가까운 가짜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전(私錢)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진짜 주화와 아무리 흡사하더라도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사전은 그 어떤 달인의 손을 거치더라도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다. 진짜와 구분이 되지 않는 완벽한 주화를 만든 이 달인은 그래서 '멍청이'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진짜 동전을 만들어 낸 이 사전꾼이 진정 '멍청이'인가? 오히려 위조의 이상은 '진짜'를 만들어 내는 데 있으며, 이 '멍청이'는 그 이상을 실현한 자가 아닌가?
이와 유사한 얘기는 우리 고전에도 있다. 신라 때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렸다는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앉으려다 부딪쳐 떨어져 죽었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이 천재 화가의 노동 역시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요컨대 사전꾼들처럼 진짜와 흡사한 가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인데, 진짜 동전을 만들어버린 위조의 달인처럼 진짜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그림을 그려내어 애꿎은 새들만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 혼동을 눈의 무능이나 착시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위조의 정교함이나 화가의 천재성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평범한 눈으로는 도무지 분간해낼 수 없을 만큼 탁월한 모조품이 있는 것이다. 이 탁월한 가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원래 미메시스 예술의 원칙이다.
'멍청이'로 취급받은 '위대한' 사전꾼은 사실 진짜의 권위에 희생당한 사람이기도 하다. 위조주화가 갖는 범죄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의 솜씨는 오히려 존경받을 만하다. 요컨대 진짜와 가짜의 구분에는 윤리적 잣대가 항상 개입하는 것이다. 진짜는 선, 가짜는 악의 축에 속한다. 그것이 진짜와 가짜, 참과 거짓, 현실과 재현, 원형과 복제와 같은 이분법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 구조를 지탱해 온 내밀한 원칙이다. 그러나 가짜 없이는 진짜의 권위도 없다. 참은 거짓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자신의 진실성을 내세울 수 있으며, 복제가 없다면 원형의 유일무이성에 대한 주장도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을 것이다. 우리는 모조품 덕분에 원본의 가치를 제대로 안다. 다른 한편으로 모조, 재현, 복제와 같은 모방의 친족들은 실재를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면서 쾌감을 제공한다. 모방이 제공하는 쾌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공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공리가 한성필의 작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보자.
우선 유한성을 갖는 임시적 파사드. 「Laputa」는 아치형 구조물과 첨탑으로 이루어진 고딕양식의 성당 건물을 보여주고 있다. 벽면은 세월의 침식과 풍화에 노출되어 훼손된 모습이고, 건물의 왼쪽 벽면에 설치된 가림막은 우측 벽면과 대칭을 이룬 채 앞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다. 실제 벽면과 외관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 가림막 위쪽에는 공사 중임을 말해주는 철골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 가림막은 아마도 공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실제 벽면을 촬영한 사진임에 틀림없다. 벽돌 표면 구석구석까지 묻어있는 두터운 먼지 층과 오른 쪽의 실제 벽면을 비교해 보기만 하더라도 이를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요컨대 복제된 사진이 실제와 대등한 자격으로 건물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왼쪽의 가짜가 유한한 설치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수십, 수백 장의 격자형 사진을 붙여 만든 남대문의 모습을 담은 「Plastic Surgery」작품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가짜 남대문은 불에 타버려 복원 공사에 들어간 남대문의 흉측한 몰골을 가린 채 실재를 대신하고 있다. 웅장한 자태의 남대문 사진 뒤쪽 어디엔가는 공사 중인 실제 남대문이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본래 재현의 역할은 같은 시공간에 동시에 출현할 수 없는 실재의 한계를 보완하는 데 있었다. 통치권자의 초상이 공공기관에 걸림으로써 그 공간을 통치의 영역으로 변환시키는 것이 그 예이다. 한편 유적의 신성함은 자기 위치에서 나온다. 「Laputa」에서의 성당처럼 남대문 또한 장소를 옮겨갈 수 없다. 그래서 수백 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가짜 남대문의 신성함은 수백 년간 자기 위치를 지켜온 실제 남대문의 완강한 장소성에 빚지고 있다. 짙은 코발트빛의 하늘이 매우 낯설고 격자 형태의 사진이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대문 사진은 실제의 남대문이 갖는 신성함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Melting」 역시 임시형 파사드에 속한다. 건물 전면에 드리워진 커튼에는 입구와 창문, 발코니가 왜곡된 형태로 그려져 있어 건물로서 기능할 수 없는 모습이다.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형상과도 같이 심하게 뒤틀린 창문은 열 수도, 닫을 수도 없고, 물결처럼 춤추는 발코니로는 나갈 수조차 없다.
현실과 허구, 실재와 재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양자에 위계를 부여해 온 인식 전통에 비추어 보자면 후자는 본질이 결여된 결핍으로서의 세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재현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자율적인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또한 온전한 '세계'인 것이다. 「Light of Magritte」에서 보듯이 재현은 현실에 종속된 불완전한 세계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열리는 또 다른 세계, 즉 이미지로서의 세계이다. 이 작품 속에는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장면이 거대한 벽에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커튼이 추가되어 있다. 낯과 밤, 빛과 어둠이 하나의 공간 속에 공존하고 있는 이 기이한 장면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모습이다. 이 거대한 화폭이 위치해 있는 현실 또한 그렇다. 거리를 비추고 있는 가로등과 바닥에 깔린 그림자는 어둠을 상징하지만 장시간 노출로 촬영한 하늘은 청명한 대낮과도 같다. 그런 점에서 "빛의 제국"은 「Light of Magritte」에 와서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양쪽에서 가리고 있는 거대한 커튼에는 주름이 잡혀있어 은은한 어둠속에 잠긴 호수 위의 풍경을 열고(혹은 닫고) 있다. 그렇게 "빛의 제국"이 속해 있는 세계가 커튼 사이로 열린다. 커튼 너머의 세계는 이 거대한 화폭이 놓인 세계와 유사관계로 맺어져 있다. 요컨대 건물 벽을 '구겨가면서' 열어젖힌 세계는 커튼 바깥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인 셈이다.
환영의 효과를 활용한 '눈속임 회화(Trompe-l'oeil)'가 건물의 일부로 자리 잡은 유형을 보자. 「Back to the Future」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매우 기이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거대한 두 건축물 사이에서 뛰쳐나오는 마차이다. 두 마리의 백마는 내리막길을 폭주하면서 내려오는 중인데, 흥미롭게도 이 마차의 뒤쪽에는 기관이 달려있어 수증기가 뿜어 나오고 있다. 왼쪽 건물의 중앙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가로등은 이 장면이 장시간 노출로 촬영되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질주하는 마차는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이 아니라 벽면에 그려진 그림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현재와 과거, 순간과 지속을 절묘하게 결합해 놓은 이 장면에서 실재와 그림의 경계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두 건물 사이에 수직으로 놓여있는 사다리는 그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사다리가 걸려있는 아치형 구조물은 무엇이며, 그 구조물 뒤편으로 펼쳐진 건물의 배후모습은 또 무엇인가. 혹은, 왼쪽 건물의 측면, 즉 마차의 배경이 되고 있는 건물 외벽은 어디까지가 실재인가. 이처럼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실재와 흡사한 가짜, 뒤집어 말하자면 가짜의 염치없는 주장을 묵살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실재의 관계로부터 시각적 쾌감이 발생한다.
「Bon Marché」에서도 이러한 메커니즘은 동일하게 작동한다. 서양의 어느 마을 광장에 펼쳐진 장터의 모습, 우측 하단에는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지만 정작 장터 사람들은 비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 이 장면이 그려진 거대한 화폭의 경계를 찾아내기란 만만치 않다. 우선 장이 열린 공간, 즉 목조 건물 전체는 화폭 속에 있음이 분명하다. 오른쪽 구석의 어둠과 왼쪽 건물의 상단을 비추는 인공조명 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장면은 한밤에 촬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장터는 대낮처럼 밝다. 따라서 장터를 비추는 조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 중앙의 하단 어딘가에서 나오고 있을 것이다. 목조건물의 뒤편에서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내는 석조건물들이 화폭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목조건물 지붕의 꼭대기에 "1888"이라 적힌 깃발이 뒤쪽 건물 벽과 중첩되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요컨대 건물의 창과 펄럭이는 커튼, 벽을 타고 오르는 식물 모두가 그림인 것이다. 장이 열린 목조건물의 밖으로 나와 길가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 또한 뒤쪽의 건물 벽에 그려진 그림에 속한다. 아이의 머리 위 건물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이 거대한 화폭이 단순한 평면이 아니라 건물의 외벽임을 알려주고 있다. 중첩된 건물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The Wonderland Circus」의 화폭도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공간을 가장하기 위해 건물의 우 중앙은 원근법의 효과를 살려 창문이 소실점을 향해 수렴하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마치 가짜 벽에 걸려 있는 것처럼 거대한 휘장이 아래로 펼쳐져 있고 그 속에 그려진 광대의 모습은 주름 때문에 구겨져 있다. 그림 속에 그려진 또 다른 그림, 화폭 속의 화폭이 도처에 놓여 있는 셈이다. 심지어는 왼쪽 건물의 창도 액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화폭은 하나뿐이며 모든 것은 이 신비한 가짜의 세계에 속한다.
환영의 효과를 유발하는 '눈속임 회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대상과 주제에 따라 몇 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 우선 평면을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데 몰두하는 유형이 있다. 마치 원근법의 놀라운 효과를 처음 발견했던 르네상스 초기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이 유형은 단지 원근법을 공간의 묘사에만 적용시킨다. 「Magical Watermill」처럼 다양한 형태의 직사각형이 시선의 주변으로 밀려나면서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일정한 규칙을 갖고 작아지게 그려내듯이 말이다. 여기에서 공간은 규격화되고, 평면 위에 배치된 사물들은 정확한 좌표를 지닌 채 마치 모눈종이 위에 그려진 설계도면의 요소들처럼 보인다.
한편 「Paparazzi」처럼 화면 속에 이야기를 끌어들여 환영의 효과를 망각하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다. 건물의 전면에는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물에서나 볼 수 있는 아치형 회랑이 있고, 계단 주위에는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벽에 걸린 붉은 색 휘장과 건물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 건물이 마치 유서 깊은 문화유적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건물 우측 상단의 거대한 창에는 반대편 벽에서 반사된 형태의 성당건물이 그럴 듯하게 그려져 있으며, 이 모습은 맞은편에 위치한 실제 성당건물의 반영처럼 보인다. 우측 하단의 배낭 맨 남자가 무언가를 촬영하는 모습은 건물에 그려진 그림 전체가 실제로 유명한 유적지임을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환영의 효과는 '진실'에 가까워지면서 망각된다.
아예 허구성을 극대화시켜 그림 전체가 진정한 '눈속임 회화'임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환영은 어떤 점에서 '사라진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실제 현실과의 간극이 너무도 분명하여 자신을 '실재'로 내세우는 그림의 리얼리티가 더 이상 신뢰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Swimming in the Sky」가 그 예로, 여기에서는 환영의 효과가 사라지고 시각적 즐거움만이 남는다. 거대한 벽면에는 각가지 형태의 푸른색 도형이 그려져 있고 사각형 속에서 물안경을 쓴 여자가 유유히 물속을 헤엄치고 있다. 이 벽면은 전체가 거대한 풀장인 셈이다. 벽 위쪽의 푸른 바탕은 실제 하늘임에 분명하지만 바로 아래쪽의 푸른 바탕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벽면에 매달린 거대한 물방울은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어 이 장면 전체를 허구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하늘의 경계와 맞닿아 있는 벽 속 푸른 공간의 현실성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공간은 하늘인가, 혹은 물인가. 수영하는 여인은 하늘을 날고 있는가, 아니면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가. 하늘과 물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러한 의구심이 뒤섞이면서 이 장면 전체는 터무니없는 허구가 되는 것이다.
이제 작가는 스스로 막힌 건물 벽에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공간의 마법사가 된다. 「The Ivy Space」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 붉은 벽돌과 담쟁이로 이루어진 건축물 「空間 SPACE」의 벽에는 내부 공간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을 붙여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 붙어 있다. 이 구조물은 막힌 벽면의 답답함을 순화시키고, '공간'이라는 건축물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작가 본인이 구상해낸 것이다. 공간은 막힌 평면이 아님에도 「空間SPACE」 건물 벽은 막혀 있다. 자가당착적인 건물의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수단으로 작가는 건물 내부의 곳곳을 촬영한 사진을 붙여 평면으로서의 벽을 '공간'으로 변환시키려 한다. 그렇게 해서 이제 「空間SPACE」 건물은 내부를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공간'이 된다. 물론 이 또한 '물리적으로는' 공간이라 할 수 없지만 유사의 마법 덕분에 우리의 시선은 평면 위에서 공간을 본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건물 반대편의 풍경이 보이고, 건물 내부의 사무실과 서가, 계단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성필은 유사와 모방, 재현과 실재, 환영과 허구 등 시각예술의 근본 문제와 맞닿아 있는 개념들의 관계를 집요하게 탐색해 왔다. 이 개념들을 지탱하는 것은 눈의 미신이나 재현의 마법, 이미지의 주술과 같은 비과학적인 요소들임에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지식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한성필의 사진은 지식의 범위를 훌쩍 넘어서 있는 이 '신비한' 영역들의 가치를 되묻는다. 우리의 눈은 시각적 환영에 속는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에서 이런 '눈속임'은 정교해지고 있다. 그것은 분명 주술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선의 착란은 치유되어야 하는가? 플라톤은 예술을 본질이 결여된 무엇으로 간주함으로써 이미지를 인식수단의 열등한 단계로 강등시켰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서 이 '결핍'으로부터 감각의 떨림을 경험하고 인식의 쾌감을 끌어내는가? 그런 점에서 한성필의 사진은 시각예술이 끌어들이는 즐겁고 유쾌한 '속임수'와 '착란'의 구조를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박평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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