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수
고사(高士) 화선지에 수묵담채, 1973
박노수
달과 소년 한지에 채색, 1970
박노수
류하(柳下) 한지에 채색, 128x324cm(8폭병풍), 1960
박노수
류하(柳下)(Under The Tree) 화선지에 수묵담채, 97x179cm, 1970
박노수
백로(白鷺) 한지에 채색, 135x330cm(8폭병풍), 1974
박노수
산 화선지에 수묵담채, 1980
박노수
산山(Mountains) 화선지에 수묵담채, 159x222cm, 1988
박노수
선소운(仙簫韻_B) 한지에 채색, 180x150cm, 1955
박노수
수렵(狩獵) 한지에 채색, 210x180cm, 1961
박노수
월하의 허(月下의 虛) 한지에 채색, 207x179cm, 1962
‘한국화’ 아카데미즘의 기수: 박노수 창작의 미술사적 맥락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인 암각화에서 시작된 한국 회화는 고대와 중세 단계를 거치면서 특유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11세기 후반의 고려 중기 경부터는 문인화론의 기반 위에서 시·서·화 융합의 엘리트 예술과 고도의 정신문화로서 심화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 중세성의 갱신을 통해 근대 이행의 기반을 조성하기도 했다. ‘동화(東畵)’로서의 자각도 미약하나마 이 시기에 대두되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시대적 과제로 삼아 담론화하며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대세 속에서 근대 일본에 의해 ‘미술’로 개화되고 재편되는 1890년대 부터였다. 전통회화인 수묵채색화는 서양화의 유화와 분립된 상태로 일본화와 공존하기 위해 ‘동양화’로 개편되어 근대화를 모색했으며, 남종과 북종 또는 수묵과 채색의 이원 체제로 전개되었다. 산수화는 수묵이 중심이었으며, 인물화와 화조화는 채색 중심으로 다루어졌다. 수묵산수화는 근대 일본의 신남화를 참고하며 전개되었다면, 채색인물화조화는 신일본화를 중앙 양식으로 삼아 추구되었다.
이러한 변모는 1910년의 총독부 통치기를 전후하여 본격화되었으며, 서구적 모더니즘으로의 ‘개조’와 동양적 모더니즘으로의 ‘갱생’을 통해 근대성을 추구하였다. 특히 1930·40년대에 이르러 탈아주의(脫亞主義)에서 흥아주의(興亞主義)로의 전환에 수반되어 서구적 근대를 초극하기 위해 ‘대동아’의 고전 및 전통의 부흥론과 결부된 동양적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신동양화론’이 대두되어 수묵채색화의 향후 전개에 이념적· 조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윤희순(1906~1947)은 “미술의 세계화를 위해 동양회화의 유심적· 정신주의적 특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하여 새로운 동양적 회화인 ‘신동양화’로 발전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조선 미술의 독특한 미적 구성이 조화와 균형으로 통일된 온대성 기후와, 대륙과 섬나라의 특질을 포용한 반도적 지형과 같은 자연환경으로 부터 전반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면서, 조선 고유의 예술품으로 거론 한 고구려 벽화와 신라의 화강암 예술, 고려 자기, 이조의 목기와 나전, 자수, 초상화 및 화원화를 통해 호쾌함과 견고함, 청초함, 소박함, 화미함, 신묘함 등을 각각의 특색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반도의 미는 본질적인 형태와 선으로 구성된 예지가 빛나는 미이며 감정이 세련된 미로, 끊임없는 변화와 오묘한 조화로써 웅혼한 구상 아래 미를 포용하는 미의 완성자”라고도 하였다. ‘계몽’과 ‘개조’를 거쳐 ‘동양’으로의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한 ‘갱생’의 담론으로 한국 근대미술의 지향을 재고하면서 새로운 지표를 설정하게 된 것이다
김용준과 이태준은 조선시대의 엘리트 예술인 서화의 아취와 격조에서 한국 미술 및 회화의 전통과 특질을 찾고 앞으로의 창작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이들은 표현주의를 기존의 객관성과 사실성에 반발하여 주관성과 정신성 및 선묘적 기법을 강조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경향을 ‘사의’와 동일시하면서 그 소산물인 남종문인화 또는 수묵화와 같은 전통 동양회화를 표현주의 내지는 현대 모더니즘의 원류 및 선구로 보는 우월론에 의거하여, ‘이조미술황폐론’으로 타파와 폐기의 대상이 되었던 남종문인화의 부흥과 함께 서화미를 새롭게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방적 정취’나 ‘조선적 정조’를 지니고 있는 한국 미술의 특질로 이들은 ‘이조풍의 유생취(儒生臭)’풍기는 전통 남종문인화의 ‘고담한 맛’과 ‘청아하고 한아한 맛‘ ’선묘적 여운의 미’와 ‘고박(枯朴)함’과 ‘여유 및 운치’를 꼽았다. 문인화의 사의적 측면과 함께 수묵 갈필의 담백함과 소산(疏散)한 아취, 그리고 여백미 등이 자아내는 선비문화의 품격에 주목한 것이다. 김용준과 이태준이 추사 김정희의 서화세계를 숭상했던 것도 이러한 사의적인 정신미와 농축된 필의와 형상의 간일미(簡逸美)를 전통미술의 ‘정화’이며 ‘극치’인 문인화와 서예의 ‘본질적 특색’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부패한 서양의 ‘속(俗)’을 동양의 ‘아(雅)’로 초극하고 서화의 고전미와 선비의 문아미로 근대를 재창출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한국 미술의 정신이며 본질이고 미적 결정체인 고전적· 전통적 특질에 대한 관심과 언술은, 동양미술 또는 조선미술의 근대성 구현을 집단적으로 창조해 내기 위해 결집된 전통계승과 고전부흥의 맥락에서 개진된 것으로, 수묵채색화 동양적 모더니즘의 동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1920년대의 조선미전 동양화부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 서화미술회 출신의 1세대 동양화가들은 30·40년대를 통해 장년으로서 일가를 이루며 활동하였다. 서양화에 비해 양적인 열세에서도 이상범과 변관식, 노수현, 이용우, 김은호, 최우석 등은 ‘10대 명가’로 성장하여 ‘미술’로서 개량화된 관전 양식을 심화시키면서, 흥아주의와 결부되어 대두된 신고전주의의 맥락에서 북종화나 남종화의 매재와 기법의 전통적인 요소를 활용하는 등, 동양화의 갱생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화숙이나 개인 화실에서 2세대의 배출을 통해 동양화를 증식시키기도 했다.
김은호 화숙 출신인 동양화 2세대 장우성(1912~2005)은 신고전주의 화풍의 채색인물화에서 1940년대 초에 <청춘일기>와 <화실>로 조선미전의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연속 2회 수상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배경을 생략한 주제 중심의 집중된 구성력과 함께 윤곽선의 강화로 사실적인 인체 묘사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으며, 도시적인 신감각의 색감과 통일된 색조 구사로 한층 더 조형적인 회화성을 발휘하였다. 김은호가 1937년경부터 윤곽선과 옷주름 표현에서 고고유사묘와 분금법 등의 전통화법을 사용하는 등, 인물화에서의 고전적 기법을 활용하며 신동양화의 구현에 힘쓴 경향을 심화시킨 것이다.
식민지 근대기를 통해 ‘동양화’로 편성되어 서구적 모더니즘에서 동양적 모더니즘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근대화를 추진한 수묵채색화는 1945년의 8.15 광복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미국과 소련 등의 전승국들에 의해 갑자기 주어진 3년간의 해방공간은 건국의 주도권 쟁탈을 위한 극심한 좌우 이념의 대립과 이에 따른 미술단체의 이합집산과 분열을 야기하는 등, 정치 과잉의 시기로 창작활동의 부진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통해 이화여대와 조선대, 서울대, 홍익대 등에 미술대학이 차례로 설립되고 ‘동양화’전공의 엘리트 수묵채색화가를 본격적으로 육성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민족미술을 수립하자는 자각이 팽배해졌다.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열망과 결부되어 일어난 민족미술에 대한 자각과 수립 방향은 ‘식민지 잔재의 일소’, ‘일본색의 제거’, ‘조선적 특질과 전통유산의 계승’, ‘세계화’ 등의 화두를 통해 표명되었다. 이러한 담론들은 탈식민과 반일을 표방하면서도 방법적으로는 1930년대 이래의 동양적 모더니즘을 계승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며, 신설 미술대학의 교육을 통해 과제화되고 아카데미즘화 되었다. 특히 김용준과 장우성에 의해, 1946년 9월에 설립된 서울대 미대 ‘동양화’ 전공의 ‘제 1 회화과’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화단의 새로운 등용문 역할을 하기 위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다음 해 열린 문교부 주최의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약칭) ‘동양화부’를 통해 확산되었다.
신설된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로 창작방향 설정에 고심했던 장우성은 수묵채색화 동양적 모더니즘의 핵심을 이룬 윤희순의 신동양화론과 김용준의 신문인화론에 토대를 두고 사의적 표현성을 새롭게 모색하며 ‘탈동양화’를 시도하였다. 그의 1949년 작품 <회고>는 김용준으로부터 “앞으로의 조선화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정당한 길을 처음 열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장우성의 인물화풍은 기존의 신고전주의적인 세밀한 윤곽선과 호분을 섞은 저채색에 의한 섬세우미한 묘사에서 소묘식의 수묵 선조가 강화된 단아한 수묵담채풍으로 점차 변했으며, 이러한 양식을 반영한 <성모자>에서처럼 옷주름 선에서 종래의 예리하면서 섬세하고 설명적으로 구사했던 것에 비해 좀 더 굵고 직선적이며 간결하면서 표현의 구성요소로서 주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수묵선묘의 주체화가 서울대 동양화과 인물 소묘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정부 수립 직후부터는 김화경이 일본색채를 제거·순화하고 “대한민족이 가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미술을 건설·창조하기” 위해 ‘동양화’를 ‘한화(韓畵)’로 개칭하고 전통성과 현실성, 현대성을 지닌 새로운 정체성을 이룩하자고 했듯이, 국가주의에 의한 ‘한국화’ 수립을 본격화하게 된다.
박노수(1927~ )는 서울대 미대 제 1회화과 1회 입학생이었으며, 수묵채색화로 국전 최초의 대통령상 수상자가 되었고, 해방후 1세대인 이른바 ‘전후파’로는 첫 번째 추천작가가 된 선두주자였다. 이상범의 청전화숙에서 화업을 닦았던 그는 1946년 9월 입학 후 두 달 뒤에 열린 1회 조선미술가협회전에 대학생으로 유일하게 <가을>을 출품하면서 이미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9년 1회 국전에서, 기존의 일본화적인 동양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적 색채’를 지닌 수묵채색화의 길을 모색하는 장우성의 훈도를 받은 신진으로 조명을 받게 된다.
박노수의 이러한 창작 방향과 경향은 미술대 스승인 김용준과 장우성에 의해 주도된 수묵채색화의 동양적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근대기 수묵채색화의 심미적 주제로 김은호에 의해 대두된 여인상을 초기에 주로 다루었던 그는, 동양적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선묘와 채색의 주체화와 조형화를 통해 남종화와 북종화 또는 수묵화와 채색화의 이원적 대립관계를 융합하면서 전통의 계승과 현대성의 구현을 미술사적 과제로 삼고 자신의 조형세계로 승화하여 추구하였다. 1955년 4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선소운>에서 구사한 짙은 채색과 선묘적 구성의 뛰어난 조화력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그의 이와 같은 전통 화법의 대립적 요소들의 융합에 의한 현대화의 모색은, 새로운 조형적 격조와 함께 동양적 모더니즘에서 한국적 모더니즘, 즉 ‘신동양화’에서 ‘한국화’로의 전환을 선도하면서 이 분야 아카데미즘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홍선표(이화여대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1927년 충남 연기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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