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내일 Everlasting Tomorrow
2014.11.06 ▶ 2014.12.28
2014.11.06 ▶ 2014.12.28
유근택
산수, 어떤 유령들 한지에 수묵채색, 270x100cm, 2014
유근택
산수, 떠 내려온 한지에 수묵채색, 270x100cm, 2014
유근택
말하는 벽 한지에 수묵채색, 180x200cm, 2014
유근택
달밤 한지에 수묵채색, 139x147cm, 2014
유근택
앞산 한지에 수묵채색, 90.5x72.5cm, 2013
유근택
두 사람 한지에 수묵채색, 146x118cm, 2014
유근택
아침 한지에 수묵채색, 133x104cm, 2013
유근택
어떤 탁자 한지에 수묵채색, 104x134cm, 2014
또 다른 진화, 유근택의 '끝없는 내일' - 유근택이 다져온 '일상'과 '정서'
"나에게 일상은 아주 징글징글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런 놀라움이 항상 공존하는 세계, 그게 제가 바라보고 탐색하고 천착해온 삶의 공간이자 그림의 공간입니다." 유근택은 2013년에 『지독한 풍경-유근택 그림을 말하다』의 출판을 기념하는 전시 행사의 자리에서 '일상'에 대한 자신의 관점, 혹은 '일상'과 자신과의 관계를 이와 같이 명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유근택의 작품세계에서 두드러지는 주제의 흐름은 '일상', '정서', '교감' 등으로 함축되어 왔다. 이 중에서도 '일상'이라는 주제는 좀 더 각별한 의미의 층이 내재되어 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겠다. 일상이라는 모티프가 창작의 영역에서 흔하디흔한 것으로 여겨지는 요즘의 상황 속에서 유근택의 '일상'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주제가 이처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이 되도록 만든 선봉에 유근택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학습기에 해당하는 1980년대 중반기부터 1990년대에 걸친 미술계의 분위기는 민중미술과 수묵화운동이 차츰 소진되어가는 한편,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원주의의 의미가 거론되면서 창작활동의 주체가 단체에서 개인으로 조금씩 중심 이동을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즉,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해 집중했던 민중미술의 거대 담론이 지나가는 와중이었고, 동양화의 정신성에 집중하는 관습화된 시도들이 헛바퀴를 도는 등 전반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근택은 이러한 과도기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려 자신과 관계 맺은 체험적 깨우침을 통해 시대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창작의 지향점과 표현방법론을 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역사의 실체라는 것이 결국 개인의 구체적인 일상의 축적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생생히 깨닫고 '일상' 속 '지금', '여기'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또한 동양화의 정체 상태를 풀기 위한 방법으로, 유근택은 지필묵(紙筆墨)으로부터 동양화의 정신성을 끌어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표현 재료로서의 특성과 수묵이 갖는 물성적 효과에 더욱 주목하고자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지필묵 이외의 다양한 재료들을 수용하고, 공감각적인 연출 방식을 적용하는 등의 실험과 모색을 통해 시대의 감성에 맞는 매체로의 전환에 매진해 나갔다.「할머니」(1995),「냇물 혹은 추억」(1998),「다섯 개의 정원」(2000) 등은 이 시기에 전개된 유근택의 확장된 의식과 방법론을 읽을 수 있는 몇몇 예로, 동시대인의 실재하는 삶의 풍경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루고 있으며, 동양화에서 추구하는 긴 선 대신 짧은 선을 쓰고 호분을 섞어 형상을 지우듯 모호하게 표현하는 등의 참신한 시도들이 두드러진다. 이와 함께 그가 직접 기획한 1996년의 『일상의 힘』전이나 2002년의 『여기, 있음』전, 같은 해에 박병춘과 공동 기획한 『동풍』전 등의 전시는 개인의 일상 속 이야기들이 갖는 의미와 힘을 공론의 장으로 들고 나온 계기가 되어 미술계에 적잖은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성, 관념성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시공간의 현실성을 이식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시해 나갔던 그의 행보는 시대와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동양화단의 해묵은 과제를 시의 적절하게 풀어나간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되었으며, 그와 같은 관점의 전환을 통해 이후의 동양화단은 개인의 일상 속 현실을 자유자재로 수용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하겠다.
유근택은 이후 개인의 삶 속에 누적된 시간성과 정서의 문제를 드러내는 관점으로 진전해 나갔다. 즉, 대상 그대로의 모습을 포착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그 관계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나간 감정의 층위들까지 함께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이러한 관계에 대한 관심은 동양미술이 관계 중심적 사고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양화의 현대화를 위한 그의 관심이 단순히 주제의 환기나 형식적 틀의 확장에 머물지 않고 보다 근원적이고 내밀한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정서의 표현을 위해 자신의 일상을 더욱 세밀히 관찰하면서 시간의 변화에 따른 대상의 변화와 감정의 변화를 추적하는 등 자신의 주관을 개입시키고 재해석하는 방식을 병치해 나갔다. 그 결과 화면에는 현실의 장면 위에 또 다른 차원의 정서적 표층이 겹쳐진 것처럼 풍경과 정서가, 현실과 비현실이, 순간과 영원이 서로 이질적인 양상으로 공존하면서 독특한 정취와 수많은 서사를 전해준다.「앞산 연작」(2000~2002),「어쩔 수 없는 난제들」(2002) 등은 대상에 대한 지독한 관찰과 탐구를 통해 시시각각 변모하는 대상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것은 대상과 작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감정, 교감, 에너지 등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통상적인 표현 방식에서의 비례감이나 원근법 등에 근거하지 않고 자의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유근택은 동양화에서 관념성의 무게를 덜어내고, 일상-정서-교감 등으로 이어지는 관점의 심층적 이동을 거치면서 개인의 현실에 연원하는 다양한 감정들의 발현을 재료에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표현해왔다.
다시 만난 길목, '끝없는 내일'
유근택은 지난 2년 동안 다시 새로운 시각을 펼쳐 나가는 데에 고심을 거듭해왔다. 이번 전시,『끝없는 내일 (Everlasting Tomorrow)』展은 바로 그러한 고심의 결과를 보여주는 새로운 발언들로 가득하다. 이는 그가 2011년에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하고 돌아온 이후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폭이 보다 넓어지고 깊어진 데에서 연원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기형적인 상황들, 예를 들면, 거시적으로는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부터 소통이 부족한 가족, 공동체, 사회의 상황, 그리고 크고 작은 재난에 이르기까지 불합리와 부조리, 모순들이 우리 사회의 체계 속에 버젓이 자생하고 있고, 그것이 개인의 삶의 구조에 맞물려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심도 있게 통찰하고 있다. 바로 그렇듯 전시의 제목인 '끝없는 내일 (Everlasting Tomorrow)'은 현실의 평범함, 비루함이 내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교차하면서 끝없이 지속되는 우리 삶의 기묘한 순환 구조를 상징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첫 선을 보이는 대형「산수」연작과「말하는 벽」연작 등을 비롯하여, 모두 신작으로 출품된「앞산」,「숲」, 실내 풍경 연작 등에서 이러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가로 2.7m, 세로 1m 크기의 대형 산수풍경화「산수」연작은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단양군에 걸쳐있는 인공호수인 충주호의 풍광을 다룬 것으로, 총 10점이 전시장 1층 공간의 독특한 환경 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수'라는 소재는 동양미술의 핵심을 이루는 관념적 대상이자 개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무게가 중첩되어 있는 하나의 장(場)이다. 유근택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통틀어 처음으로 이 어려운 화두를 다루면서 다시 한 번 '관념의 현실적 수용'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학생들과 수학여행으로 충주호에 방문했을 때, 물이 빠져 흉측해진 풍경 아래에서 방문객들이 여흥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낯설고 이질적이며 기괴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처럼 경외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통해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치유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와 현실 속 산수풍경의 기대 밖의 모습이 상충하는 상황이라든가, 산 아래에 인위적으로 호수를 만들어 동양의 풍경에 서양의 문물이 밀고 들어와 뒤섞여 있는 듯한 생경한 장면 등이 있는 그대로 실재하는 한국의 산수풍경이라고 설명한다. 이 연작들은 호수 위의 하늘과 산수풍경이 수면 위에 투명하게 비춰져 서로의 풍경이 데칼코마니처럼 마주하고 있는 기이한 모습인데, 이들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표현되어 어느 쪽이 진경(眞景)인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름다운 경치와 그것의 뒤집힌 장면이 동시에 담긴 산수풍경은 마치 수면 아래 감춰져 있던 숱한 부조리가 밖으로 드러난 것과 같이 실제와 허상, 진실과 거짓, 정상과 비정상이 충돌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투사이기도 하며,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양면성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는 벽」연작은 사간동 근처의 담장을 소재로 한 것으로, 도심 속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작가는 모양이 모두 다른 돌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긴 벽을 보면서 어느 날 그 돌들이 수군거리는 듯한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연작은 그러한 심상의 관찰을 담은 것인데, 등하교 길의 어린이들이 담장 아래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도 마치 벽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은 상상으로 이어지고, 벽 속에 갇힌 듯, 혹은 벽이 품은 듯 형상의 구분이 모호한 나약한 어른의 모습이 투영되는 등, 생명을 가진 또 다른 차원의 벽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이와 더불어 벽이 상징하는 시각을 통해 우리 사회와 개인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중의적 관점 또한 엿보인다. 즉, 개개인이 단위가 되어 저마다의 발언에 집중하면서도 소통에는 무관심한 채 군집을 이루며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담장처럼 세대간, 계층 간, 사회 간에 벽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 연작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순수하지만 나약한 개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하며, 벽을 따라 가야 하는 개인의 상황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기이한 동행, 얽힘과 대립의 순환 관계를 가늠하게 한다.
한편, 2000년경에 시간과 호흡의 템포를 실험했던「앞산」연작이 2013년에 좀 더 확장된 시각으로 돌아왔다. 모두 작가가 살고 있는 복도식 아파트 6층에서 바라본 앞산의 다양한 풍광의 변화와 서사를 다루고 있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면의 감정들이 앞산의 표정을 매번 새롭게 결정하고, 이는 어느덧 그의 삶의 두터운 기록으로 남아 개인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는 이처럼 유사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다루면서 유기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감성선들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작가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실내 풍경 연작,「외출」연작,「숲」연작 등에서 시간의 변화에 따른 일상의 풍경과 그 위에 덧입혀진 작가의 내면 풍경이 섬세하게 교차되어 있다. 유근택의 화폭에는 여전히 다양한 재료의 혼합이 진행되고 있다. 종이 위에 수묵과 호분, 아크릴, 과슈, 콘테, 템페라 등이 형과 색의 원료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구체화하고 수많은 차원의 층위들을 전해준다. 유근택은 동양화에 개인과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친연적 시선을 담고자 살아 숨 쉬는 현실을 일관되게 다루어왔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둘러싼 매순간의 상황과 그 상황 속의 대상들을 충실히 읽고 느끼면서 살아있는 감성을 수록하는 구도의 행위를 통해 완성되어온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대처라기보다는 동양화 고유의 가치를 시대의 논리 안에서 가장 적절하게 엮어나가기 위한 고민과 탐색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결과라고 하겠다. 유근택은 이번 전시에서도 멈추지 않는 저력과 뚝심으로 새로운 예술 의지를 가득히 펼쳐 보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인'의 모습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 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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