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수
우연한-1 나무액자,프라스틱 인형, 73x31x15cm, 2008, 개인소장
민정수
예기치 않은-3 나무액자,프라스틱 인형, 25x34x9cm, 2008, 개인소장
삶의 부스러기들로 이어진 몸과 사물
이선영(미술평론가)
20여개가 넘는 서로 다른 액자 안을 인형과 오브제로 가득 채운 작품들은 고풍스러운 틀을 무대로 연출된 인형극 같은 모습이다. 인형과 사물들은 실제로 움직이거나 이동하지는 않지만 매우 역동적이다. 이 역동성은 구성에 힘입은 바 크다. 인형극의 주인공들은 극중 성격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아니다. 대신 수많은 출처를 가진 인형이나 사물들이 본래의 온전한 형태를 잃고 잘려져 기이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내밀한 것을 인터뷰 하다’라는 부제의 이 전시는, 작은 인형들을 반지에 올려 반지 케이스에 담아 전시했던 2006년의 첫 개인전을 필두로, 수년간 자신의 조각 작업에 인형을 활용해온 결과물이다. 통상적으로 액자는 미술작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보편적인 기호이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틀의 내부를 채우는 것은 순도 높은 물감이 아니라, 잡다한 삶의 부스러기들이다.
플라스틱 오브제의 생경한 색깔이나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단편들은, 객관적인 것을 반영하거나 주관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예술의 야심찬 어법을 비켜나, 스스로 ‘터무니없는 이야기’(1회 개인전 부제)나 ‘내밀한 것’(본 전시)으로 간주한다. 인형들은 비록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모습이지만, 작품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으로 두드러진다. 인형과 사물은 비슷한 재질과 스케일을 가지며 상품으로부터 추출된 단편들이다. 그러나 관객은 인형이 잘려있을 때와 사물이 잘려있을 때 다른 느낌을 받는다. 인간의 형상을 본뜬 인형들은 다른 사물과는 달리, 주술에 가까운 분위기를 가지기 때문이다. 절단과 재조합이라는 방식은 인형 자체가 가지는 기괴함을 증폭시키면서, 무심하게 사용되거나 폐기되는 일상적 물건의 차용 역시, 억압된 무의식을 유출시킨다.
민정수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현대미술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구식의 액자틀은 물론이거니와, 장난감, 강철봉, 조화, 구슬, 전자제품 부속, 스프링, 인조 잔디, 시계부품, 석쇠, 촛대, 돋보기, 옷걸이 등 거의 무차별적이다. 대체로 인형의 소품으로 어울릴 수 있는 작고 밀도가 높은 대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작가는 물감이나 대리석 덩어리 같은 재료의 순도가 아니라, 잡다한 사물의 파격적인 조합에 의해 획득한 밀도와 강도를 택한다. 액자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림처럼 바탕 면이 견고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벽에 걸리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액자 안의 다양한 사물들을 관객의 전면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 인형과 사물들은 액자의 경계를 사방에서 넘나들 뿐 아니라, 앞뒤로도 튀어나오는 등, 종횡무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3차원적인 공간감을 내포한 회화적 속성의 설치작품이다. 작품들은 전시장 모서리에도 설치했으며, 조명 뒤로 떨어지는 그림자도 작품의 중요한 속성이다. 액자의 바탕에 해당하는 면에는 철물이 많이 활용된다. 석쇠, 하수도 부속품, 멸치 거름망, 냄비 뚜껑 등 자세히 보지 않으면 뭔지 알 수 없는 작은 철물들이 인형들을 모아주고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품은 5개의 제목으로 구별된 시리즈로 되어 있다. [strangeness] 시리즈는 전자제품의 회로도와 연결된 인형들로, 머리에 금속 핀이나 전선이 가득 꽂혀 있는 모습이 자동인형이나 로봇같은 특징을 보여준다. 인형들에는 금속들이 박혀있으며, 소품들도 플러그나 쇠 바구니 등이 활용된다. [unexpected] 시리즈에서는 인형들이 인조잔디나 조화 같은 식물성과 결합된다. 액자를 채우거나 인형의 몸통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strangeness] 시리즈의 사이보그풍의 인형들처럼 잡종 생명체이다.
잔디 위에 흩뿌려있는 인형의 신체 부위들. 찻잔 속에 구겨 넣은 머리, 인형 표면 위에 붙은 작은 오브제들이 잡초 같은 생명력과 저마다의 기괴함을 뽐낸다. [doubleness] 시리즈는 이중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집이나 스피커로 된 머리, 다리로 만들어진 옷걸이, 뱀이나 개구리 등과 조합된 몸, 뱃속으로 들어가는 돼지 등의 괴물이 출몰한다. 이중적인 이미지는 스케일에 차이를 둠으로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가령 몸에 비해 엄청나게 큰 팔 다리를 가진 인형의 엄지발가락에 머리가 붙어 있는 식이다. [trifling]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시시하고 하찮은 것들이 모여 있다. 수많은 종류의 플라스틱 인형과 오브제들이 빽빽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인형 자체도 이질적인 것들로 조합된다. 차이가 큰 사물들 끼리 만날 때 증식하려는 힘은 더욱 커지며, 액자든 뭐든 경계를 무시하고 나아간다.
[accident]는 다른 시리즈에 비해 단촐한 편이다. 다른 사물과의 만남 보다는 인형들끼리의 조합이 두드러진다. 몸과 몸, 몸과 다른 기관들이 연결되곤 하며, 좁은 액자 밖으로 튕겨 나오는 분절된 선의 흐름이 특징이다. 민정수의 작품 재료는 장난감이나 도구, 부속품 등으로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두 딸을 둔 어머니이기도 한 작가가 작업실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서, 아이들 장난감이나 살림 도구를 자르고 조립하는데 몰두하는 광경은 뭔가 엽기적인 면이 있다. 특히 민정수가 주로 활용하는 인형은 일상 속에 내재된 기괴함을 들추는데 핵심적인 소재이다. 일상과 기괴함은 서로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프로이트는 ‘밀랍인형이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및 자동인형’에서 기괴함the uncanny을 보았는데, 인형의 기괴함은 생명 없는 것과 생명 있는 것 사이의 경계에 관한 불확실성에서 야기된다.
기계이며 상품이고, 대부분 여성적 성을 가지는 인형들은 인위적으로 조립된 것보다는 자연적 순수성을, 코드화된 사물로서의 상품 보다는 그것의 초월을, 그리고 유일의 보편적인 인간으로 군림해온 남성을 우위에 놓고 구축된 전통적인 미학과는 거리가 있다. 민정수의 작품은 구별되는 다양한 차원의 경계를 위반함으로서, 동일성을 이루는 낯선 타자들을 불러낸다. 그 점에서 그녀는 초현실주의의 노선을 따른다. 경계의 위반을 통해 경이로움과 기괴함을 창출했던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자동)인형이나 마네킹에 대한 선호가 강했다. 치밀한 사전 계획 없이 오브제들을 쌓아놓고 즉흥적으로 조합하는 것이나, 우연히 발견된 사물들을 다루는 수집광적인 태도도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 남성작가들로 이루어진 초현실주의가 인형을 대하는 방식은 죽음과 폭력, 강박관념의 세계와 가까웠다.
초현실주의의 한스 벨머같은 작가도 인형을 자르고 조합하지만, 타자(대부분 여성과 아이)의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희열, 가령 사도마조히즘적인 성도착성을 느끼게 한다. 반면 민정수의 작품에서 인형을 자르고 붙이는 행위는 죽음과 공포, 파괴 따위의 어두운 충동보다는 밝고 긍정적인 면이 강하다. 민정수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인공물의 경계가 무너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 자체가 사회 문화적인 구성물일 뿐이라는 것을 예시하는 듯하다. 기계의 회로도에서 태어난 인형들이 등장하는 [strangeness] 시리즈는 ‘사이보그 페미니즘’을 주장한 다나 해러웨이가 지적하듯, 통찰의 원천이자 순수의 약속인 자연의 확실성을 사라지게 한다. 여기에서 자연 및 실재 자체가 일시적인 합의에 불과한 것이다. 신체는 텍스트가 되어 어떤 구성요소도 다른 구성요소와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이미 잡종 생명체로서 유연한 정체성을 가진다. 사이보그적 주체성은 ‘불온하고도 즐겁게 짝짓는 신호’(해러웨이)인 것이다. 육체는 사이보그처럼 관리되고 설계되며 부분적이고 모순적인 정체성을 채용한다. 침범과 변이로 자아와 타자의 경계는 사라지며, 인간이 중심무대를 차지하는 이성적으로 계몽된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것은 ‘어머니 없이 과학기술로서만 이루어지는 창조이자, 죽음 없는 자아의 개념’(할 포스터)을 약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체로 근대 남성 작가의 작품들에서 여성 사이보그는 불길한 도상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사이보그들은 유혹과 위협을 암시하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보의 상징이든 퇴행의 상징이든, 기계와 인형의 복합체에 투사된 가부장적 환상을 예시한다.
여성적 사이보그가 남성의 통제를 벗어난 힘을 예시한다면, 반대로 여성에게 그것은 불길함이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것은 질서를 강제하는 지배적 체계가 우연성을 재난으로 여기지만, 주어진 질서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우연은 해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복합되는 민정수의 작품에서 발산되는 활기는 우연성에 힘입은 바 크다. 그것은 사물들에 강제된 역할을 벗어나 다른 질서에 편입시키기를 즐겼던 초현실주의처럼, ‘이성이 만들어낸 인간과 물건을 불신하도록 만들기 위해’(브르통) 동원된다. 합리주의가 각인된 평범한 사물들은 욕망과 환상의 무대에서 전무후무한 기능을 부여받는다. 우연히 발견한 것을 수집하고 내키는 대로 자르고 연결하는 행위에는 모종의 욕망이 엉켜 있으며, 이 욕망은 새롭게 배열된 단편의 총체들을 생산한다.
이 점에서 민정수의 작품은 ‘욕망하는 기계’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제를 연상시킨다. 저자들은 [앙티 외디푸스]에서 기계를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한다. 민정수의 작품은 절단 된 사물이 등장하고, 그것이 일련의 체계를 이루며, 또 다른 체계와 연결되며 소통한다. 절단의 결과 만들어진 부분적 대상들이 흐름을 만들고, 하나의 개체 또는 신체로부터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옮아간다. 인간과 사물은 단편이라는 점에서 같은 반열에 놓이며 상호 접속 된다. 민정수의 작품에서 인간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 역시 기계적이다. [앙티 외디푸스]적 용어로 말하면 이 모두는 욕망하는 기계들이다. 저자들은 린드너의 그림 [소년과 기계]의 예를 들면서, 자기의 작은 욕망하는 기계들을 기술적인 사회적 기계에 접속시켜 작동시킨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욕망은 기계요, 욕망의 대상 역시 연결된 기계이며 기계적 배열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술적인 사회기계들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작가는 오브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예술작품은 바로 욕망하는 기계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모든 방향에서, 또 모든 방면에서 그것들이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능력이다. 바로 이 힘에 의하여 그것들은 많은 구조들을 동시에 횡단하고 지배하는 기계가 된다. 기계는 연속체의 힘을 보여준다. 끝없이 다른 단편으로 이행하는 민정수의 작품에서 연결고리들은 어떤 명료한 의미나 상징으로 엮여 있지 않다. 연결들은 사전 계획 없이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단편들의 우연한 관계들로 만들어진 작품에서 기호는 탈 영토화 되고 기표의 흐름만이 남는다. 욕망은 이 기표들의 흐름을 따라 이동한다.
[앙티 외디푸스]의 저자들에 의하면, 욕망이란 인물들이나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편력하는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욕망은 자기가 합류하는 온갖 성질의 진동들과 흐름들을 대상으로 한다. 욕망은 항상 유목하며 이동한다. 오직 욕망만이 목표 없이 존재하면서 살아있다. 욕망을 생산하는 것, 이것이 기호의 유일한 사명이다. 욕망에 결여되고 있는 것은 고정된 주체이다. 고정된 주체는 억압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욕망의 유목을 표현하는 민정수의 작품은 자아가 가두어놓고 억제하고 있는 인물 이전의 단일체들을 해방시키려 한다. 그것은 자기 동일의 조건들에 미치지 못하는 바로 그곳에서 분열과 절단을 더 세밀하게 확립하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을 묶어 욕망하는 기계들을 조립한다.
또한 민정수의 작품은 이것저것 긁어모아 작품을 만드는 브리콜라주 스타일을 가진다. 레비 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를 여러 가지 특성이 잘 결부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라고 정의한다. 즉 그것은 다양하고 모양이 기괴하지만 제한된 자재와 규준의 소유요, 단편들을 항상 새로운 단편화 속에 들어가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생산하는 작업과 생산되는 것, 도구 전체와 만들어지는 것 전체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는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 오로지 이것이 저것을, 혹은 저것이 이것을 생산하고 그리하여 기계들을 연결시키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정신 분열자처럼 이접(離接) 속에 있다. 몸뚱이에 붙은 거대한 팔, 발가락만한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민정수의 작품은 한 항에서 다른 항으로 표류하면서 그 자체의 종합을 수행한다.
여기에서 유기체의 개체적 통일이나 기계의 구조적 통일이 파괴되고, 기계와 욕망 사이에 직접적인 유대가 나타난다. 기계는 욕망의 핵심에 이행하여 기계는 욕망하는 것이 되고, 욕망은 기계화된다. 이 전체는 부분들을 통일하지도 전체화하지도 않으며 실제로 구별되는 하나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부분들에 곁들여진다. 민정수의 작품에서 몸, 또는 사물의 단편화는 결여나 상실이 아니라, 분열과 증식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타자와의 접합 부위를 늘리기 위해 개체적 통일성은 와해된다. 그것은 타자와의 흥겨운 유대를 지향한다. 위계적인 질서를 전복하는 위반의 충동은 단순한 무질서를 넘어 축제로 고양된다. 세계를 향해 열린 몸은 기성 질서의 단조로움을 깨고 자유로운 혼합을 야기한다. 그것은 기성의 독단적 질서를 허무는 유쾌한 대화이며, 열린 세계를 향한 유희적 몸짓이다.
1965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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