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용
Hardbacks 2017, Oil on canvas, 30x90cm (5 pieces), 45x90cm (2 pieces)
이진용
Hardbacks 2017, Oil on panel, 60x80cm (4 pieces)
이진용
Hardbacks 2012, Oil on canvas, 200x80cm
이진용
Hardbacks, 2017, Oil on panel, 110x80cm (4 pieces)
이진용
Continuum 2017, Mixed media, 91x80cm (3 pieces)
이진용
Continuum 2017, Mixed media, 91x80cm (4 pieces)
이진용
Continuum 2017, Mixed media, 120x120cm
이진용
Big Dipper 2014-2017, Mixed media, Size variable
이진용
Hardbacks 2016-2017, Oil on canvas, 91x73cm (3 pieces), 91x91cm, 91x65cm
이진용
Hardbacks 2017, Oil on canvas, 53x73cm (11 pieces)
이진용
Hardbacks 2017, Oil on canvas, 130.5x194cm
이진용
Hardbacks 2017, Oil on panel, 80x60.5cm
이진용
Type 2017, Mixed media, Size variable (2)
이진용
Type 2017, Mixed media, Size variable
작고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윤재갑(HOW Art Museum 관장)
문학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은 형상사유(形象思惟)를 추구합니다. 아무리 정확한 개념이나 논리로도 형상 자체의 풍부한 내용을 대체하거나 담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론적 틀이 치밀해지고 정확해질수록 사유가 형상을 속박하여 개념화되거나 도식화되기 십상입니다. ‘수학적이며 과학적인 보편타당한 인식의 정초’를 세우려 했던 칸트(Immanuel Kant)에게 수많은 예술학도들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편타당하다고 믿는 과학 이론도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증명불가일 뿐이고 단지 추측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태초에 조그만 양자들이 충돌하여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과학 이론은 ‘빛이 있으라 해서 빛이 생겼다’라는 종교적 신념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칸트의 철학이 인식 주체의 자기불안을 치유하기 위해 ‘이성의 윤리학’을 구축한 것이었다면, 존재하는 모든 타자를 존중하고 그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중시한 스피노자나 루소, 니체, 장자 등은 ‘감성의 윤리학’을 옹호합니다. 이들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합니다. 장자는 ‘나와 나 아닌 것이 더 이상 대립되지 않는 상태가 ‘도’라고 까지 말합니다. 인간과 자연, 나와 너, 감정과 이성이 위계적이지 않고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통되는 거대한 관계의 미학을 형성합니다.
예술이 형상사유를 추구한다는 말은 종교의 초월성이나 과학의 보편성과는 달리 피와 살을 가진 ‘감성의 윤리학’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이나 타자의 희노애락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편과 초월에 투항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게까지 온기를 불어넣어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살아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밥솥 안의 밥알들이 한 알 한 알 곧추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음악이나 시, 그림에서 느끼는 각성이나 전율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형-상-사유>가 위계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고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입니다. 形은 개별 사물의 존재를, 象은 주체가 인식한 개별 사물의 이미지를, 思惟는 형과 상의 상호 추상으로 생긴 보편적 개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형상사유는 <개체-주체-보편>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내재적이고 완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로는, 회화는 매체의 특성상 형상사유와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추상화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인간의 망막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는 구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구의 추상화와는 달리 형상회화론에서는 구상과 추상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얘기입니다. 재현의 문제와 관련된 모든 그림에는 구상과 추상이 근본적으로 공존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제가 이진용 작가를 이해하는 몇 가지 단초들입니다. 그의 작업들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상도 아니고 사실주의도 아닙니다. 작가 스스로도 작품 속의 어떤 책도 현실 속의 어떤 책을 보고 그린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작업실에는 사방 빼곡히 책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사실입니다. 그는 수많은 책의 체취를 맡고 그것을 그림 속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시각과 망막에 의존해 그린 게 아니라 오감으로 그린 것입니다. 동양회화론에는 이런 정황을 가장 적절히 설명하는 화론이 있습니다. 사형취상(捨形取象)이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사물의 외형을 버리고 내재된 이미지는 취한다는 말입니다. 형태를 버린다는 말은 외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형태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사물의 형태를 잘게 쪼개고 쪼개서 원, 삼각형, 원기둥으로 환원한 뒤, 선과 색채로만 화면을 채운 서구의 추상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입니다. 서구식 추상이 보편이 개체를 살해하고 구상과 대립한 것이라면, 사형취상에는 개체와 보편이, 구상과 추상이 평등하고 화목하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차를 음미하고 향의 체취를 느끼듯이 봐야 합니다. 망막과 시각에만 의존하거나,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에 젖은 사람들은 이진용 작가의 일부만 보기 십상입니다. 시는 소리 내서 읽어봐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고,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두 눈을 감듯이, 오히려 눈을 감고 오감으로 느껴야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형상사유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온 몸으로 타자와 사물들의 떨림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진용 작가가 사물들을 대하거나 작업을 하는 태도도 그렇습니다. 작고 사소한 사물들에 온 정성을 쏟는 것입니다. 온 정성을 다해 화면에 옮겨놓았습니다. 저 역시 추상과 보편에 내재된 한계와 폭력을 절감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이진용 선생의 작업들이 더 반갑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글로 쓰자니 참 어렵습니다. 부디 저의 글도 이진용 선생의 작업처럼 봐주십시오.
이진용의 활자 시리즈
(해독할 수 없는 문자, 해독을 넘어선 문자, 마음으로 보는 문자, 우주를 이루는 문자)
김순응 : 활자(活字) 시리즈는 조각입니까, 회화입니까. 이 작가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로서 처음 보여준 작품은 조각이었습니다. 회화를 선보인 것은 2008년으로 기억합니다. 조각과 회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다, 최근에는 활자를 소재로 한 작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진용 : 조각 그림(Sculpture painting)입니다. 만들고 그리는 것이지요. 저는 옛 이집트인들이 상형문자를 돌에 새기듯,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쐐기문자를 점토에 새기듯, 중국인들이 갑골문자를 거북 껍데기나 소의 뼈에 새기듯, 한자(漢字)를 하나하나 새겨 붙이고 그 위에 물감을 입힙니다. 손으로 더듬어 만족할만한 느낌이 나오고 눈으로 보아 오래된 세월이 드러날 때까지 매만집니다.
조각이든 그림이든 제 작업은 물방울로 바위에 구멍 뚫기입니다. 한 개의 물방울은 미약하지만, 무한 반복 떨어져서 끝내는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제 작업은 반복과 시간으로 완성됩니다.
김순응 : 문자(文字)를 만들고 그리는 뜻이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많은 문자가 있습니다. 특별히 한자(漢字)여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이진용 : 문(文)은 글과 무늬라는 뜻으로 같이 쓰였습니다. 나중에 무늬(紋)는 떨어져 나옵니다. 문자는 인간이 그리는 무늬 중에 가장 중요한 기호이고 문명(文明)과 문화(文化)는 그 기호의 집합(축적)체입니다. 문자는 본래 그림에서 나왔습니다. 한자는 아직도 그림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자입니다. 그래서 한자는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보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옛날 한자 활자를 수집해왔습니다. 그 활자들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에 대해 생각했고, 예술, 문명, 우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오른, 언어로 옮길 수 없는 무엇들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김순응 : 이 작가의 문자 작품은 멀리서 보면 무수히 많은 점들의 집합으로 보입니다. 다가가 보면 문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시 멀어지면 문자는 모습을 감추고, 추상화되면서 단지 하나의 구성원으로서의 세포처럼 아득해 집니다. 가까이서의 모습과 멀리서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이진용 : 문자는 태초에 그림에서 나와서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형태로 진화하였습니다. 추상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 0과 1로 이루어진 컴퓨터 언어입니다. 더 이상 추상화 될 수 없는 음(陰)과 양(陽), 유(有)와 무(無), No와 Yes만으로 이루어진 언어가 모여서 조화를 부려 인공지능(AI)을 만듭니다. 저는 어떻게 이런 원소(元素)들이 모여 요술을 부리는 지 궁금합니다.
최초의 추상화가라는 칸딘스키는 “원자가 더 작은 구조로 나누어진다는 것은 내게 있어 세계의 붕괴와도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물리학은 양자역학에까지 이르렀습니다만 누구도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김순응 : 노자(老子)는 우주를 유무상생(有無相生)으로 파악하고 주역은 음양(陰陽)의 조화로 봅니다.
이진용 : 우주는 무엇입니까. 우주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 자명합니다. 별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빅뱅(Big Bang)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38억 년 전 바늘 끝처럼 작은 점이 폭발, 팽창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물질들과 에너지가 우주를 만들고 우주를 끊임없이 팽창시키고 있습니다.
빅뱅과 더불어 처음으로 수소원자(H)가 생겨났습니다. 수소는 양성자, 전자가 각각 하나로 이루어진 원자번호 1번의 원자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들도 빅뱅으로 만들어진 원자들이 결합하여 만들어 냈습니다. 별과 인간은 한 몸입니다. 세계의 근원은 물(水, H2O)이라고 말한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Thales, BC 624-BC 545)의 말이 거의 맞았습니다.
김순응 : 근원은 너무 작아서 인간이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은 원자를 볼 수 없고 컴퓨터를 쓰면서도 0과 1이라는 근원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식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구는 평균 초속 463m(음속 340m)로 자전하고, 초속 29.76km(음속의 87배)로 공전하지만, 인간은 느끼지 못합니다. 우주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지구 위에서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지구의 자전, 공전, 우주의 팽창은 엄청난 소음을 동반할 터인데 한밤중의 지구는 고요하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의 감각은 실제나 본질에 닿지 못합니다.
이진용 : 저는 사물의 본질, 진실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걸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려고 하고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문자를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성경도 문자의 조합이고 팔만대장경도 문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김순응 : 노자는 세상은 인간이 보고, 아는 것과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인간이 보고, 말하고, 아는 것은 본질이나 진실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이진용 :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무릇 있는바 상(형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만약 모든 형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볼 것 같으면 그때에 완전한 우주의 밝은 빛인 여래(진실)를 볼 수 있느니라.)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김순응 : 우주를 이루는 원자도 에너지도 인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이진용 : 0과 1이 모여서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는 경지는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컴퓨터의 2진법 언어에서 영감을 얻은 해커들(IT)이, 생물의 DNA가 네 가지의 뉴클레오타이드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컴퓨터의 원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생물학(BIO) 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것은 인문학과 과학의 유희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생물은 세포의 집합이고 뇌는 뉴런 뭉치입니다. 단정 지어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작은 것들(원소)이 모여 작동하는 세계가 진실에 가까울 겁니다. 음표를 모아, 베토벤은 ‘운명교향곡’을 만들었고, 모차르트는 ‘플루트 협주곡’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시(詩)도 언어의 집합일 뿐입니다.
김순응 :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粒子)들이 만드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거군요.
이진용 : 그렇습니다. 조각과 그림을 통해서요. 모든 가능성은 입자들의 조합에서 나옵니다. 신기하지 않은가요? 세상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떤 것은 별이 되고, 어떤 것은 식물이 되고, 어떤 것은 광물이 되고, 어떤 것은 동물이 되고, 어떤 것은 인간이 되고. 인간은 또 왜 모두 달라야 하는지. 내가 어떤 조화를 통해서 내가 되었는지. 왜 원자는 여럿이 모이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전혀 다른 것이 되는지.
김순응 : 그러나 원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파장이 대략 500 나노미터 이상의 가시광선만 볼 수 있는데, 원자 사이의 간격은 그보다 1000배 정도는 좁습니다. 시각(視覺)되지 않는 것을 시각예술(Visual art)로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요.
이진용 :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각자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다르게 보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은 사물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비로소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원효는 “마음이 일어나면 수많은 세계가 생겨나고 마음이 꺼지면 수많은 세계가 사라진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고 했습니다.
인간은 꽃에다 온갖 감정을 들이대지만 사물에게는 감정이 없습니다. 꽃은 슬프지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무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그 자리에 있어, 때가 되면 피고, 시들고, 질뿐입니다.
꽃은 실체적, 본질적, 객관적, 보편적인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보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꽃은 각자의 꽃입니다. 내가 부르는 이름 그대로의 꽃만이 꽃입니다. 앞서 우리가 인용한 노자나 부처님의 말씀도 이런 뜻이겠지요.
김순응 : 세계를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인식한다는 말씀이겠지요.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 주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부처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모두 같은 뜻이지요. 우주의 존재나 운행의 방식이나 원칙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중심사상인 ‘공(空)’은 ‘물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것이므로 현상으로는 있어도 실체, 주체, 자성(自性)으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관계론은 양자물리학의 중심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진용 : 현상은 ‘혼돈(Chaos)’입니다.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으면 그 물체는 서 있거나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만 더 있어도 두 물체 사이에 중력이 생겨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달라지겠지만 예측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3개만 되어도 상호관계가 복잡해져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푸앵카레(Jules-Henri Poincare)가 발견한 카오스현상입니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개를 한 번 펄럭이면 뉴욕에 폭풍이 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은 3이라는 숫자조차 넘지 못합니다.
양자역학에 이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하나의 물체가 여기, 저기 동시에 존재합니다. 현상은 관측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관측하여 얻은 결과를 제외한 다른 가능성은 모두 우주에서 사라집니다. 나의 우주와 타자의 우주는 다른 세상입니다. 우주는 불확실성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이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룰은 오로지 신만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원자와 에너지의 집합에 불과한 우주는 이렇게 오묘합니다. 카오스도 수학적으로 들여다보면 프랙탈(fractal)이라는 구조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프랙탈이란 아무리 확대해도 그 자신의 모습이 반복되는 원초적인 도형을 말합니다. 눈송이, 허파, 나뭇가지 등이 자연에 존재하는 프랙탈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결국 물질이나 현상은 깊이 들여다보면 아주 작은 것들의 집합으로 이뤄져있습니다.
김순응 : 이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의 원자이자 프랙탈은 활자인 셈이겠습니다. 네델란드 화가 에스허르(Maurits Cornelis Escher)의 ‘원형극한IV(Circle Limit IV)’이라는 작품에는 천사와 악마가 프랙탈의 형태로 무한히 엉켜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천사와 악마의 프랙탈로 이뤄진 것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이진용 : 제 활자를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어떻게 관찰하느냐는 관찰자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제 활자는 기호로서의 의미나 기능을 잃어버린 하나의 입자일 뿐입니다.
저는 그 입자들을 수직으로 쌓고 수평으로 펼칩니다. 쌓고 펼치기를 반복하면 입자들이 어떤 전체를 이루고, 전체는 다시 다른 전체의 출발점이 되고 부분이 되지요. 제 작품은 제가 만드는 빅뱅입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저는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무언가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언가의 시작과 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본질(진실)은 저와 대상과의 관계 속에만 있고, 관람자가 추구하는 진실은 관람자와 제 작품과의 관계 속에만 있을 것입니다. 감상은 주관의 성역(聖域)입니다. 관찰자의 우주 속에서 저는 사라집니다. 관람객의 우주는 오롯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관람객의 세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노자에 관한 지식은 주로 최진석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에서, 불교에 관한 지식은 백성욱의 ’금강경 강화‘,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 그리고 과학에 관한 지식은 ’김상욱의 과학공부‘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혀둡니다. 네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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