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만다라 Beyond MandaLa
2017.10.25 ▶ 2017.11.05
2017.10.25 ▶ 2017.11.05
전인경
MandaLa 1709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90cm_2017
전인경
MandaLa 1708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65cm_2017
균형과 조화의 행로(行路)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그림을 바라볼 때 인간은 배경(ground)으로부터 형상(figure)을 추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형상-배경의 법칙(figure&ground law)'인데 이 법칙에 따르면 인간은 주어진 그림을 '형상'과 '배경'으로 나누어 지각한다. 이 때 형상은 앞으로 나와 있는 것(전경)으로 보이며 배경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후경)으로 보인다. 이렇게 일단 어떤 것이 배경에 대해서 앞으로 돌출된 것(형상)으로 지각되면 그것은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형상'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회화작품에서 형상을 추출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폴 세잔(Paul Cezanne)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사과'나 남계우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비'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 형상을 주목하는 순간 배경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 시야에서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형상-배경의 법칙'이 원활하게 기능하지 않은 회화작품들이 있다. 전인경의 「만다라」 연작도 그 중 하나인데 여기서는 앞으로 돌출된 것으로 보이는 형상을 추출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차라리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일단 우리 눈에 어떤 '원(圓)'이 보인다. 그 '원'을 형상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형상이라면 가장 앞에 두드러져 보여야 한다. 하지만 그 원이 눈에 들어온 순간에 다른 것들이 최전면에서 우리 눈을 자극한다. 그 원과 겹쳐있는 다른 원들 또는 그 원으로부터 퍼져나가는 율동적인 선들이 보이는 것이다. 박인식(2012)의 서술을 인용하면 여기서는 "빛이 난데없이 만났다가 느닷없이 헤어"진다.
따라서 여기서는 형상과 배경을 구별하고 형상에만 집중하는 소위 의식적 지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전인경의 「만다라」가 요구하는 것은 파울 클레(Paul Klee)가 '산만한 지각'이라 불렀던 지각방식, 즉 화면 전체에 보내는 흩어진 주의력이다. 클레가 다원적, 또는 다성적(polyphonic) 지각으로 불렀던 '산만한 지각'은 형상-배경의 의식적 구분을 넘어선다. 의식적 지각은 대개 선(윤곽)의 안쪽만 보지만 산만한 지각은 선의 안쪽과 바깥쪽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안톤 에렌츠바이크(Anton Ehrenzweig)는 이런 산만한 지각을 "분화(分化) 수준과 미분화(未分化) 수준을 왕래하는 창조적 자아의 리듬"이라고 지칭했다. ● 그런데 이렇게 전인경의 「만다라」 연작에서 형상과 배경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이 작품들이 단조롭다거나 건조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확실히 「만다라」에는 '형상'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나 주목을 요하는 특별한 세부들이 존재한다. 마치 힘들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또는 힘들이 수렴되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 방금 전에 내가 원이라 불렀던 형태의 중심, 또는 전인경이 '빛'이라고 부르는 형태( )의 위치상의 중심들이 그것인데 이 중심들은 대부분 텅 비어있는데도(거기에 어떤 특별한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것을 초점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중심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 초점, 또는 중심은 각별한 시각적 무게를 지닐 뿐만 아니라 시각 장(visual field)을 형성하여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만다라」 연작들 중에는 그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 또는 세 개일 때가 있다.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모든 시각 장은 수많은 중심들로 이루어져 있고 각 중심들은 다른 중심들을 자신에게 복종케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관점을 염두에 두면 「만다라」 연작들에 존재하는 여러 중심들은 주도권을 다투고 있는 상태, 또는 서로를 견제하는 상태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향하는 힘이 존재할 것이고 바깥쪽에서 안을 향하는 힘이 존재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방향이 만나는(충돌하는) 지점들이 있을 것인데 그 지점은 중심들 못지않게 시각적 무게(또 하나의 중심)를 갖는다. ● 물론 이상의 관찰은 「만다라」 연작을 멀리서 관찰할 때의 일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곧 거기에 수많은 작은 중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방금 전에 내가 원이라고 지칭했던 것은 기실 수많은 원들(또는 수많은 빛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작은 중심들 역시 고유의 시각 장을 형성하며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따라서 전인경의 「만다라」를 탐색하는 작업은 가장 광범위한 전체 패턴-대(大)우주-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다양한 구조적인 차원들-소(小)우주-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이 때 전체 패턴에 대한 탐색은 그 하위 패턴들의 탐색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런 탐구는 전체 구조가 분자들로 분해되는 단계에서야 비로소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색채의 문제로 관찰을 확장하기로 하자. 「만다라」 연작의 색채 구조를 관찰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원색(primary color)이라 부르는 색채, 예를 들어 빨강, 노랑, 파랑색들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생활의 필요에 따라 빨간색을 실제로 있는 것으로 상정하지만 현실에는 진정한 의미의 순수빨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 마르탱(F. Saint-Martin)의 말대로 "우리가 세계에서 지각하는 일체의 빨강과 파랑은 항상 서로 다른 것이며, 우리의 마음속에서 형체를 취하는 그 어떤 시각적 개념/지각표상과도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생 마르탱은 색채를 경계를 할당할 수 없는 일종의 극(poles), 또는 위상학적 매스(topological mass)로 간주하자고 제안했다. 색채를 실체적(substantial)인 관점이 아니라 발견적인(heuristic) 관점에서 이해하는 이러한 접근법에 따르면 빨강(또는 파랑)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에너지 집합체-텅 빈 중심 주변에 형성된 에너지 장(field)-에 해당한다. ● 다시 전인경의 「만다라」로 돌아오면 이 작품들에는 두 개, 또는 세 개, 네 개의 색채(의 장)들이 주도권을 다투고 있는 상태, 또는 서로를 견제하는 상태에 있다 이를테면 빨간색 장(red field)과 파란색 장(blue field)이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상호작용하는) 식이다. 장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색채들은 또 다른 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될 것이다. 때때로 전인경의 「만다라」에서는 두 가지 색채의 장이 상호작용하여 생성된 일종의 경계-중간 장이 각별한 위상을 지니기도 한다. 빨강과 파랑, 두 색채의 장 사이에서 형성된 보라색 장(purple field)이 고유의 힘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다라」 연작들에서 원과 원의 상호작용(중첩)을 통해 형성된 빛( )이 하나의 독자적 장 또는 중심으로 다뤄지는 것에 대응한다.
전인경의 「만다라」 연작은 과거에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수직과 수평, 빨강과 파랑, 노랑을 조합-조율하여 창출한 철저한 긴장, 또는 궁극의 평형상태(equilibrium)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회화로 이해할 수 있다. 확실히 전인경의 「만다라」에는 하나의 회화 면에서 상호 이질적인 힘들을 평형상태로 이끄는 정신의 힘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전인경 자신에 따르면 「만다라」 연작은 "나 잘났다고 외치는 아이들을 완벽한 조화, 균형으로 이끌려는 의지"의 소산이다. 2008년에 열린 개인전 『담아 이야기, 담아의 꿈』展 도록에 실린 작가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새벽부터 밀려온다는 밀물/ 그러나 아침까지 바다는 썰물입니다/ 밤새 시린 두발을 담그고/ 이렇게 오랫동안 서있는 까닭은/ 언젠가는 바다가 밀려온다는 아침을 믿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만다라」 연작들이 구현하고 있는 철저한 균형, 완벽한 평형상태는 그 반대편에 카오스, 곧 "중심이 없고 균형이 없는" 궁극의 무질서를 전제로 삼고 있다.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모색한 르네상스 회화가 기실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예술적 대응이었다는 하우저(Arnold Hauser)의 통찰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전인경의 「만다라」는 처음부터 무질서, 파국, 카오스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전인경의 작업에 이산적인(discrete) 요소들-정사각형의 질서를 깨트리는 직사각형, 원의 정형을 깨트리는 비정형들-이 점차 부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Beyond MandaLa」로 명명한 최근의 작업들은 불균형을 아우르는 균형, 완벽한 질서에서 탄생한 무질서를 다루는 회화가 될까? 그렇다면 서사(narrative)를 "하나의 평형상태가 깨진 이후에 또 다른 평형상태를 회복해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한 고전문예론을 따라 전인경의 「Beyond MandaLa」를 '균형의 서사'로 부름직하지 않은가? 마침 이 작가의 최근 작업노트(2017)에는 이런 구절이 보인다. "카오스는 코스모스를 찾는다. 코스모스는 다시 카오스로 흩어진다. 비욘드 만다라(Beyond MandaLa)는 인간과 우주의 고리를 따라 마음의 중심으로 가는 길이다." ■ 홍지석
마음의 중심으로 가는 길
작업의 시작은 세포였다. / 세포는 원형질로 꿈틀거리며 / 분열하고 증식하여, /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 근원의 힘이다. // 그 다음은 우주였다. / 세포를 만든 분자와 / 그 분자를 만든 원자들의 세계. / 우주는 더 깊은 심원으로 / 나를 끌어들였다. // 세포에서 시작해 우주까지 이어진 길은 /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는 길이었고, / 마음의 질서를 찾는 길이었으며, / 조화로운 나를 만나는 길이었다. // '만다(Manda)' 는 산스크리트어로 원형, 본질, 중심을 / '라(La)' 는 소유, 성취, 얻음을 의미한다. / 만다라(MandaLa) 안에서 인간과 우주는 하나다. // 카오스는 코스모스를 찾는다. / 코스모스는 다시 카오스로 흩어진다. / 비욘드 만다라(Beyond MandaLa)는 / 인간과 우주의 고리를 따라 / 마음의 중심으로 가는 길이다. ■ 전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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