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회화전 Lee Jung Hee Paintings
2017.10.16 ▶ 2017.11.24
2017.10.16 ▶ 2017.11.24
찬란한 젊음, 현재의 흔적
어쩌다 그림이 손에 익고 주변의 것들을 그리다 보면 그리는 행위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 같다. 도대체 그리는 일은 무슨 마법을 가지고 있을까?
그림/회화는 인간이 동굴에 거주할 때부터 함께 한 매체이다. 동굴벽화에 보이는 동물과 인간의 군상은 인간이 그리기 시작한 이유를 보여준다. 사냥에 나가기 전 꼭 성공하리라는 다짐과 기원을 담은 그림이자 치열했던 사냥의 기억을 전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의 과정과 흔적을 이미지로 남기고 가족과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수만 년 동안 인간이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진, 영화, 컴퓨터, 비디오카메라 등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면서 회화가 시각예술의 정점을 찍고 이러한 매체에 상좌를 양보한 오늘날에도 그림에 몰두하는 작가들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그 높은 영광의 자리를 바라지 않고 자신만의 탐구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간다.
이정희 작가는 대중매체가 발달하고, 그 매체가 물질문명의 지극한 형태를 실어 나르는 오늘날, 그림이 여전히 삶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마치 복잡한 삶을 단순하게 걸러내려는 듯, 삶의 과정과 흔적을 그림으로 남긴다. 멋있는 가방을 맨 사람, 지하철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 패션이 남다른 이들, 누군가의 새 신발 등등 작은 드로잉으로 포착되는 것들은 이렇게 주변에서 만난 인상의 편린들이다. 그 드로잉들은 차곡차곡 쌓여 마치 이정희의 일기처럼 그의 삶의 기록이 된다.
때로 작가가 바라보는 대상은 작가의 삶의 현장을 넘어 잡지에서 본 이미지로 향한다. 두터운 잡지를 채우고 있는 새로운 패션상품 광고와 유명 아이돌의 사진도 이정희 작가의 레이더에 포착된다. 왜 그런 사진에 주목하는지 물어보면 그냥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아마도 작가의 젊음이 투영된 이미지들이며 현실을 매체에 맞게 환상을 가미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짝이는 광고가 우리 눈을 차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정희 작가는 그 인상과 사진들을 간결한 스케치처럼 처리하거나 캔버스위에 진지하게 재구성한다. 2010년경 시작된 <보그 걸(Vogue Girl)>시리즈는 수많은 스케치를 통해 탐구한 인물에 대한 성찰을 여러 명의 아이돌 군상으로 재해석한 작업이다. 잡지 사진을 토대로 그렸지만 개개인의 묘사는 세부에 구애받지 않고 대범하게 새로운 인물로 변모한다. 길고 짧은 헤어스타일, 컬러풀한 패션, 두려움과 거리가 먼 자신감, 살짝 퇴폐적이기까지 한 젊음까지, 대중매체가 구축한 젊은 문화의 메시지를 걸러낸 또 다른 젊음의 신화를 구축한다. 그들은 이정희가 잡지에서 구해낸 젊음의 초상이자 이정희의 손으로 만든 아바타들이다.
2015년이 지나면서 이정희의 아바타들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젊음의 권태로움을 넘어 불안과 무기력함, 우울함에도 시선을 돌린다. 점점 도시의 풍경보다 작가가 새로 찾은 산과 숲의 풍경,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자신만의 고민에 잠긴 듯 시선을 돌리고 있다. 굵은 붓을 매끄럽게, 즉흥적으로 움직이며 인물의 사실적 묘사와 거리를 둔다. 그 결과 과거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표현적인 장이 형성되는데, 그 안의 이미지는 현실의 충실한 기록이 아니라 작가가 느끼는 현실을 기존 매체의 이미지에 기대어 가공한 흔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지금 여기에 살아서 붓을 움직이는 작가의 현재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통해 걸러지고 아픈 젊음과 불안한 현실을 넘어서는 과정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정희의 최근 작업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물질주의 속에서도 여전히 찬란한 젊음의 흔적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매체에 유통되는 젊음의 이미지들을 주관화하고 누구나 겪었을 아픈 젊음을 현재의 시각으로 보편화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젊은 작가라는 사실이 믿기기 않을 정도의 세련된 붓놀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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