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보초 Picture Guard
2017.12.04 ▶ 2017.12.30
2017.12.04 ▶ 2017.12.30
김지원
M.B 리넨에 유채_41×32cm_2017
김지원
위장 camouflage 리넨에 유채_91×117cm_2016
김지원
위장 camouflage 리넨에 유채_91×117cm_2016
김지원
맨드라미 Mendrami 리넨에 유채_100×100cm_2017
김지원
무제 Untitled 리넨에 유채_34×24cm_2017
김지원
그림보초 picture guard 종이에 연필, 과슈_26×18.5cm_2017
그리고 또 그리고
동시대 미술계에서 서양화가 김지원이 차지하는 자리는 매우 특별한데, 이런 사실과는 별도로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그의 작품은 의미가 크다. 2009년이다. 갤러리 분도에 내가 소속되면서 처음 만나서 전시서문을 썼던 전시가 그의 개인전이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썼다. 이후에 나는 선생이 새롭게 발표하는 그림들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봐왔다. 그 역시 내가 쓴 평문들을 읽을 여건은 되었다. 그리고 9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서 전시를 벌인다. 그때 벌인 선생의 개인전이 나에겐 일종의 출발점이었고, 이번 여름 느닷없는 슬럼프를 겪었던 내게 다시 돌아온 그의 전시 『그림 보초』 또한, 내 글쓰기의 새로운 출발이다.
전시를 벌이기 전에 선생의 한예종 교수 연구실에 가서 내가 본 그의 신작은 내게 놀라움을 주었다. 많은 화가들이 연작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도상을 계속 그린다. 김지원의 그림은 그런 작업들과는 달리 그리기의 반복이 이루어진다. 하나의 시리얼이 사전에 계획된 그림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는 계산된 의도, 부단한 끈기, 강도 높은 집중력, 그리고 그 집중의 상태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추어 보는 힘을 다룰 줄 안다. 슬근슬근 완성될 것 같은 선생의 드로잉 작업 또한 굉장한 고통 뒤에 나온 결과다. 엇비슷하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는 내 글쓰기는 무뎌진 관찰의 곤란함 끝에 속도감이 붙었다.
선생이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안 물어봤다. 그가 이전부터 종종 선보여 왔던 '밀덕'으로서의 면모는 전시 표제 『그림 보초』를 품고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뭔가 한층 더 심오하다. 그가 우연히 구한 미군 부대 실탄 사격연습용 표적을 주조한 입체 작업의 제목을 그대로 쓴 『그림 보초』는 작가의 군 시절을 상기시키는 한 편, 화가로서 회화의 본질을 지키겠다는 자아 정체성이 겹쳐 있다. 예전에 복무했던 전방 포병부대를 홀연히 들른 작가의 인상에 남은 벙커를 화폭에 옮긴 「위장」 연작은 반복된 그리기를 실현한다. 이런 시도는 「M.B.」연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제목부터 딴 인물을 떠올리게끔 하는 엠비는 화가 막스 베커만(Max Beckmann)의 이니셜이다. 그림에는 나치 치하에서 퇴폐미술가로 찍힌 그가 독일을 벗어나 북해 바닷가를 거닐던 쓸쓸한 뒷모습이 담겨 있다. 김지원의 학제적 스승일 수도 있는 베커만도 그림 보초로 살다간 사람라고 보는 건 그럴 듯하다.
이 모든 그림은 하나의 도상을 조금씩 다른 붓놀림과 크기로 반복하는 실험을 거쳤다. 이런 그림을 계속 그려갈 때 작가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였더라면 그 과정은 반성문을 써내려가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겠다. (내가 몇 번 써봐서 아는데)똑같은 내용을 몇 장씩 적어야하는 반성문은 첫 본과 뒤따르는 본의 글꼴이 다르다. 생각을 통해 쓰는 게 아니라 인지를 통해 움직이는 손놀림은 또 다른 경지를 부른다. 실은 우연과 다름이 배제되어야 하는 반복 작업은 규율과 정돈에 대한 순응이다. 원본 이외의 다른 이미지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체로 충분한 일차적 이미지는 작가의 기억 위에 눈앞에 현현한 그의 그림이 덧대어져 갱신의 변증법을 구축한다.
이것이 모순일 수도 있다. 하나의 그림은 다른 그림 밖에 존재하는 독자성을 온전히 가진다. 하지만 한 작품은 딴 작품을 살펴보도록 안내하는 기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작가는 여기서 무엇을 그렸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이 뿜어내는 미술의 본질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추가로, 「맨드라미」 연작에 관하여. 그의 이 대단한 그림들은 선생의 홀가분한 듯한 다른 작품들보다 좀 더 은밀하고 외롭고 슬프다. 붉은 색조가 나타내는 열기의 정점은 그 정념을 드러내기보다 뭔가를 숨기기에 알맞은 은신처 또는 벙커를 마련한다. 작가는 이 작업을 완성해가면서 결코 표현하기 힘든 무엇을 계속 떠올리는데, 그 모든 것을 맨드라미의 붉은 꽃잎과 푸른 이파리마다 서려 놓았다. 이것이 지난 9년 사이에 내가 선생의 작품을 봐오며 조금씩 쌓은 생각이다. ■ 윤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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