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달빛, 눈빛 – 홍지윤개인전
2018.02.01 ▶ 2018.02.25
초대일시ㅣ 2018년 02월 01일 목요일 05:00pm
2018.02.01 ▶ 2018.02.25
초대일시ㅣ 2018년 02월 01일 목요일 05:00pm
전시 포스터
홍지윤
별들의 편지 나를 위해 남은 너 162x130cm, acrylic on canvas, 2015
홍지윤
빛나는 열정 Brillant Passion 평창동계올림픽기념 광화문 미디어 파사드, 2017
홍지윤
빛나는 열정 Brillant Passion 평창동계올림픽기념 광화문 미디어 파사드, screenshot 3분 15초, 2017
홍지윤
빛나는 열정 Brillant Passion 종목별 픽토그램_평창동계올림픽기념 광화문 미디어 파사드 비디오
홍지윤
꽃별눈밤 116x80cm, ink on Korean mulberry paper, 2015
홍지윤
백만송이 장미 The Million roses 장지에 수묵채색, 가변설치 each, 150x210cm, Colored ink painting on Korean paper, 2004
홍지윤
생멸 450 x 210cm, 수묵채색, 장지, acrylic ink on rice paper, 2009
홍지윤
인생다채_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맑고도 푸른 한줌의 물 160x132cm, acrylic on canvas, 2010
대담
화양연화(花樣年華). 삶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을 그리고 싶어서일까?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자 온통 총천연색 꽃 그림들이다. 홍지윤 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한눈에 그의 작품임을 알아볼 수 있는 꽃들이다. 작업실이 자리한 서울 원효로 골목에서부터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와 원불교 교당이 나란히 서 있는 골목 맞은편 나무 담장 위로 그의 꽃그림과 빨간 연통이 먼저 눈에 띄었다. 식당으로 쓰였던 건물의 연통을 치우는 대신 빨간색으로 칠했다 한다. 작업실 탁자와 조명등 그리고 소품까지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용되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작업실만이 아니다. 전시나 갖가지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마다 그는 건물 내부나 외부를 자신의 색깔로 꽉 채운다. 길이 2미터가 넘는 화폭에 호방한 필치로 그린 거대한 꽃 한 송이가 공간을 압도하기도 한다.
Q. 강렬한 작품 때문에 기가 세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겠어요.
A. 저 스스로는 되게 얌전하다고 생각해요. 자주 위축되고 상처도 잘 받죠. 그래서 사람도 잘 만나지않고 거의 매일 혼자 지냅니다. 제 안에 지류가 많은 것 같아요. 수녀와 마녀가 함께 살고 있죠. 실제로 수녀님들이 가르치는 초등학교도 다녔어요
Q. 요즘은 아시안퓨전이란 말을 쓰시던데요. 어떤 의미가 있나요?
A. 저는 제 자신의 작품에 ‘아시안 퓨전’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동양과 서양, 수묵과 채색 등 서로 대비되는 요소를 융합하되 그 근저에는 우랄알타이어족을 관통하는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거리낌 없이 서로 통하는 원융무애 정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제 그림을 보면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가 그렸다고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아요. 여백의 미를 중시하며 수묵담채로 그리는 정통 동양화와 달리 제 작품은 요란한 형광색으로 화면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정통 동양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이단이 없을 거에요. 그런데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서-화(詩-書-畵)를 하나로 융합하는 동양화의 특징, 한 획 한 획에서 돌이킬 수 없는 묵필의 힘을 느낄 수 있을 거에요. 또 저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 시를 먼저 씁니다. 이제까지 쓴 시가 900여 편에 이르죠. 즉 시가 일종의 스케치인 셈인데, 제시가 그림 옆에 자리 잡고, 때론 글씨가 그림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글씨와 그림의 근원은 하나라는 동양화의 서화동원(書畵同源) 정신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Q. 작업실을 둘러보니 먹과 아크릴물감, 서양화 붓과 동양화 모필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요소를 섞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A. 서로 다른 요소들을 섞다보면, 어떤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즐겨 씁니다.
2000년 연세대가 개설한 교육기관인 ‘디지털헐리우드’에서 3D 애니메이션을 배운 게 제 작품의 폭을 넓히는 데 분기점이 된 것 같아요. 재활치료를 받던 어머니를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홍익대 동양화과 연구조교로 출근하던 길에 플래카드를 보고 무작정 등록했죠.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시기에 ‘디지털’ ‘헐리우드’라는 말이 붙으니 뭔가 대단하고 멋있어 보였어요. 그 전에는 이메일도 못 보낼 정도로 디지털과 관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전통화론과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주로 수묵추상을 그렸습니다.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송수남 선생님이 그림 이전에 공부가 필요하다며 책을 많이 읽게 했고, 대학에서 전통화론을 강의하기도 했죠. 그러나 디지털헐리우드에서 공부한 후 저는 동양의 오랜 전통인 수묵화와 최신 기술인 3D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수묵영상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장자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새 붕(鵬)이 그가 수묵으로 그린 강과 산 위를 날아 어딘가로 향하는 16분짜리 작품에서 당시 어머니가 돌아가신것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풀어 놓았던 것입니다.
Q.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신 것 같아요.
A. 2002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만든 작품으로, 새를 통해 어머니와 나를 하나로 만들면서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너무 슬퍼서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않고 일만 했어요. 패션디자이너였던 어머니는 철두철미하고 부지런하셨는데 저보고는 ‘너는 대충살아라. 춤추면서 살아라’고 하셨죠. 그런데 어느새 저도 엄마와 똑같이 살고 있더라고요. 엄마는 큰딸인 저를 자신의 분신처럼 키우셨습니다. 그 덕에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보그》 같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패션 잡지, 예쁜 천들을 보면서 컸습니다.
Q. 강렬한 색, 글씨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A. 주로 먹으로 작업했던 저는 2007년 〈음유, 낭만, 환상〉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면서 넘실대는 화려한 색감으로 공간을 채웠습니다. 한지에 검은색 먹을 칠하고, 그 위에 노란색 아크릴물감으로 커다란 국화를 그려 넣으면서 “ … 노을 지는 서쪽 하늘 들국화가 서럽다”라고 시를 써 넣었다. 그림과 글씨, 동양과 서양의 매체가 만나고, 아름다움과 슬픔이 교차했습니다. 음과 양, 밝음과 어두움,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하나라는 게 동양정신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홍지윤의 트레이드 마크인 꽃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A. 신흥사에서 열린 어머니 49재 때 올려다본 천장의 단청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꽃의 도상은 정말 완벽했죠. 그때부터 제 작품에 색과 꽃이 등장했고, 2007년 작품부터 더욱 대담해졌습니다. 2006년 뮌헨 문화부 초청으로 1년 동안 독일에서 지내며 작업했어요. 브라질 친구들과 어울리며 천국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너무 슬퍼하니까 엄마가 이곳으로 보내줬나 보다’ 생각하면서 슬픔을 많이 삭일수 있었죠. 그 후 작품이 너무 달라져 ‘그동안은 사기였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사실은 제 안에 양쪽 모습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천 점씩 수묵 작업을 했기에 필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고, 다른 작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퍼포먼스, 설치, 오브제, 사진, 미디어아트, 디자인 작업 등 영역을 계속 넓혀 왔죠.
Q. 골수동양화가로 키워졌지만, 지금의 재료는 전혀 그렇게 쓰고 있지 않습니다.
A. 밝은 색감을 쓰고 싶은데, 동양화에서 쓰는 수묵담채나 분채는 채도가 낮아요. ‘굳이 동양화 물감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아크릴물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마찬가지예요. 주변에 나를 맞추려 하기보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주변도 편안해하는 것 같아요. 그림은 온갖 체제와 사회관계에 억눌려 있던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이 제겐 휴식 같아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나를 관찰하고 나를 만나는 게 재미있고 좋아요. 제 안에 있는 무거움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무거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각자의 삶에 주어진 과제니까요. 무거움이란 추가 있기 때문에 가벼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무거움을 알기에 점점 더 가볍고 어린아이같이 천진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집니다. 아이들한테서 영감도 많이 받지요.
그는 요즘 빨강, 주황, 노랑, 파랑, 초록의 색동 혹은 무지개 빛깔로 꽃과 새를 그린다. 여러 겹의 꽃잎이 모여 한 송이 꽃이 되고, 여러 장의 깃털이 모여 한 마리 새가 되듯 인간도 삶도 사랑도 예술도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독일, 중국, 홍콩 등지에서 20여 차례 개인전을 열어온 그는 여러 군데에서 열리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다발로 준비하고 있었다. 최근의 행보를 짚어보자면 2016년 9월 22일부터 원조각비엔날레, 9월 23일부터 베이징디자인 위크, 9월 26일부터 이란 테헤란에서 열리는 〈DNA of Coreanity〉 전시, 10월 1일부터 서울아트스테이션프로젝트, 10월 25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전시에 참여하면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미디어 파사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고, 11월 1일부터 홍콩에서 〈아주 가벼운 꽃〉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2016 삶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
탑클래스 인터뷰 중에서 발췌
기자 이선주
여정은 끝도 방향도 없다.
1990년대를 사는 미국의 이란성 쌍둥이 남매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tv시트콤
감정이 없으니 고뇌도 없다. 일종의 유토피아 혹은 완벽한 세계에 대한 비유이다. 화장실엔 변기도 없고, 화재가 없으니 불도 없다. 당연히 불타는 키스도 키스에서 연쇄되는 섹스도 없다. 감정이 없으니 그에 따른 혼란도 없다. 그래서 색깔이 없는 흑백의 세상이다. 소묘는 있으되 채색은 없고, 당연히 형태는 있으되 색채는 없으며 고전주의는 있으되 낭만주의는 없다. 이 흑백의 마을사람들은 1990년대를 살던 아이들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배우고,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색을 얻는다.
장미꽃 한 송이로 시작하여 연인들...나중에는 마을 전체가 총천연색이 된다. 그 와중에 색깔을 얻은 사람들에 대한 무채색 인간들의 억압, 공동체 성원의 갈등, 분노나 슬픔 등의 개별적인 감정들도 생겨난다. 인간의 감정은 서정연한 유토피아를 허물고 그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내용이다. 색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나아가 색은 감정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여화를 보면서 했다. 그리고 뭔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
먹(水墨)과 작은 새
홍지윤의 장점은 자유로운 필선의 운용이다. 맺힌데 없는 붓질이 시원하다. 걸음마와 말 다음으로 배운 게 그림인 작가들 대부분이 가진 자유로운 손을 홍지윤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배운’ 작가들의 손은 종종 선입견을 만들기도 하지만, 홍지윤의 필선은 작가의 성격대로 활달하고 직설적이다. 요즈음 그의 그림을 보면, 작가의 기질이나 성정과 그림이 점점 닮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학교라든가 미술제도 그리고 화파(畫派)나 장르가 주는 부담을 벗어버린 듯하다.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부담은 그가 속한 공동체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것이지만, 그 의무의 부과는 개인이 공동체에 잠재적으로라도 얻을 게 있을 때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창작과 관련된 자유가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은 공동체와 작가간의 공모 혹은 절충의 결과이다. 이런 공모와 자기검열을 집단적 개성이라고 부르거나 시대정신이라고 부른다. 혹은 화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뭐라고 부르든 홍지윤은 자신의 기질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맘껏 ‘부담’없이 그려대고 있는 것처럼 보여 맘이 후련하다.
홍지윤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이 2003년 개인전 때였으니까, 벌써 십 수 년 전이다. 그 때 작업실도 몇번 가보고 작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때 홍지윤은 잘 번져서 투명한 수묵 추상으로 정교하고 깊은 공간을 만드는 그림과 작은 화면에 작은 새들을 솜씨있게 그려 보이는 작업들을 선보였다. 남천선생의 제자답게 ‘수묵화 운동’의 수혜와 그늘 속에서 잘 다듬어지고 솜씨를 키워간 작가였다. 글과 글씨와 그림의 균형을 맞추어 간다는 동양의 화론에도 충실해 보였으며, -제법- 현대적인 의미의 추상성과 작가의 개별성을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체제 내의 작가였다. 마구 그려대야 직성이 풀리는 활달한 기질보다는 체제가 주는 집단적 개성의 수혜와 개인적 변형이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었다. 수묵으로 그린 새들을 가지고 초보적인 에니메이션을 제작해서 보여준 것이 이채롭다면 이채로웠다고 할까? 간혹, 젊은 작가들에게서 학교 선생이 되는 것과 화업을 지속하는 것을 수렴하거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홍지윤의 경우도 그랬지 않았나 싶다. 그때, 추상의 수묵으로 한껏 깊은 공간을 만들고 그 위를 날아오르는 작은 새를 그린 작품이 있었다고 기억되는데 작가는 ‘그새’에 자기 자신을 투영했다. 그가 그린 새들은 수묵의 공간을 나는 것이 아니라 수묵의 공간에서 벗어 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그린 새 역시 수묵이었고, 작가는 숙제하는 아이처럼 행복해 뵈지는 않았다.
꽃
2007년은 매우 이채롭고 짧은 호황이 정점에 달했던 해였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2007년 작가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분당에 대단위 단지의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거실 벽에 걸 그림들의 수요가 생겨났으며, 미술권력은 학교에서 시장으로 옮겨가는 듯 보였다. 어린 작가들이 속속 대형 화랑과 계약하고 옥션에서 기록을 갱신하기도 했다. 미술계의 연공서열과 권위는 허물어지고 돈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 했다. 홍지윤에게도 2007년은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슨...음식점도 아닌데, 퓨전동양화라고 자신의 그림에 ‘정체’를 부여하고 <음유낭만환상 吟遊浪漫幻像>이란 제목의 전시를 연다. 이 전시에서 홍지윤은 원색을 날것으로 마구 날리고 숨겨두었던 ‘개인’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슬픔이여 떠나라>같은 신파조의 제목을 달기 시작한다. 수묵의 새는 붉은 꽃을 만나고 2009년 중국 전시에서는 –마침내- 꽃잎처럼 색이 입혀지고 꽃과 새는 헤나처럼 여인의 몸을 장식한다. 그녀의 수묵도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all-over)으로 매화가 되고, 공간에는 그의 시(詩)같은 것이 글씨가 되어 꼼지락거리며 공간을 메운다. <무지개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것들>같은 작품은 제사용 사탕을 펼친 것 같이 유치한 색 바탕에 자작시가 무성의해서 자유로운 필치로 화면을 메우기도 한다. 먹도 버리고 새도 버리고 꽃도 버리고 커다란 화면에 커다란 글씨만 남는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거나 해도 되는 것처럼 자유로워 보인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2007년은 홍지윤의 그림이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그의 기질과 작품이 간격을 줄여 이웃하게 된 해이다. 그가 애써 제약들을 벗어났는지 혹은 여러 가지 제약들이 더 이상 제약이 아닌 세상이 되었거나 개별적 제약, 예컨대 특정 미술운동이나 학파같은 제약이 실효를 다했는지는 알 수없다. 하여튼 원색의 꽃과 자유로운 붓질, 정석이라고 여기는 공간구획이나 구성에서 홍지윤은 전면적으로 벗어났다. 그래서 자유를 얻었다기보다는 해방되었다. 작가 자신도 좀 더 행복해졌을 것이다.
획득형질과 자유
2010년 홍지윤은 서울에서, 2014년 홍콩에서 전시를 연다. 전시제목은
일전에 작가의 작업실에서 인상적인 그림 한 점을 봤다. <비 내리는 골목길>이라는 제목이 붙은 색동꽃과 모란과 그리고 수국과 라일락을 아크릴릭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분홍색 캔버스에 흰색을 주로 사용해서 그리고 20세기 초 중국 시인의 시를 옮겨 적었다. 비가 오는 정막한 골목길에서 라일락 같은 빛깔과 향기와 우수를 지닌 여인이 다가온다는 내용이란다. 이 시가 그림을 그리는데 영감을 준 듯싶다. 이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우선 흰색을 근간으로 색을 배합하여 꽃들을 그렸다는 것이었다. 날것의 원색으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자유롭다고 외치던 작품들과는 다르게 조용히 그냥 앉아있는 듯 했다. 그래서 더 자유로워보였다. 두 번째는 그림의 구도가 전통적인 화훼도(花卉圖)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의 시인의 시가 만들어낸 아련함이 화면을 중성적인 색의 뽀얀 안개와 정석의 구도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 작가의 예술의지가 변했을 수도 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어린 시절부터 작가의 몸에 쌓인 모든 것은 작가의 재산이다. 수목의 깊은 공간도, 활달하고 직선적인 기질이 만든 날것의 색들도, 작가가 가진 문학적인 기질이 만든 시들과 글씨도, 평생 봐왔던 오랜 그림들도 모두 작가가 획득한 형질이고, 그것이 자유롭게 발현되고 화면에 구현될 수 있다는 ‘단초’ 쯤으로 <비 내리는 골목길>이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스쳐 멀어져간다.
담담하게 가진 재주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최종적으로 작가들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프로가 되어야 한다거나, 직업윤리로서의 강령들이 새로운 생각을 제한하고 제도라는 측면에서의 예술이 작업에 ‘매진’할 것을 강요해도, 그 직선의 트랙에서 빗겨나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는 길이 쉽진 않겠으나 ‘그냥’ 그런 작가를 만나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 김영민(전시기획자), 2018.2 월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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