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성, 유현경 2인전 h/er
2018.01.24 ▶ 2018.03.25
2018.01.24 ▶ 2018.03.25
전시 포스터
이윤성
danae cut-in 01 146x95cm, acrylic on canvas, 2015
이윤성
danae cut-in 05 146x125cm, acrylic on canvas, 2015
이윤성
danae cut-in 06 146x121cm, acrylic on canvas, 2015
이윤성
danae blue 261x194cm, oil on canvas, 2015
이윤성
danae pink 261x194cm, oil on canvas, 2015
유현경
은주 180x130cm, oil on canvas, 2017
이윤성
danae Yellow 261x194cm, oil on canvas, 2015
이윤성
torso 01 162x130cm, oil on canvas, 2012
이윤성
torso 07 162x130cm, oil on canvas, 2013
이윤성
torso 09 162x130cm, oil on canvas, 2013
유현경
겨울 과수원 162x227.3cm, oil on canvas, 2011
유현경
무슬림 여성 1 Muslim woman 1 210x135cm, oil on canvas, 2015
유현경
불면 181.8x227.3cm, oil on canvas, 2011
유현경
은주 180x130cm, oil on canavas, 2017
유현경
은주 180x140cm, oil on canvas, 2017
유현경
일반인 남성 모델H_경상남도 밀양 259x162cm, oil on canvas, 2008
유현경
일반인 남성 모델H_경상남도 밀양 259x162cm, oil on canvas, 2008
유현경
일반인 남성 모델H_경상남도 밀양 259x162cm, oil on canvas, 2008
충분치 않은 시간
환경
최근의 ‘포스트 휴먼(post human)’ 혹은 ‘뉴 휴먼(new human)’과 같은 담화에서 보듯 ‘휴먼’은 현재 역사적인 기로에 있는 것 같다. 통제와 규율, 시각성과 언어를 중심으로 한 이성중심주의의 훈육을 통해 통합과 발전에 매진해온 근대적 인간이 한편으로는 전쟁이나 파시즘, 차별과 같은 폭력적 상황을 초래한 것과 결별하듯 최근에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라는 것이 애초에 통합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유기체였으므로 이들을 다시 야생의 생태계로 회귀시키고, 대신 안전과 번영을 위해 기술을 진화 시켜 독립된 객체를 개발하려는 시도들을 하는 듯하다. 생명체가 도대체 어떻게 생물학적 유기체이면서 동시에 기계와 접목하고 윤리적이고도 미학적일 수 있는지, 환경과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이루어져왔고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재차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두 작가 이윤성과 유현경의 작업도 이러한 포스트 휴먼의 시각에서 볼 때 디지털 사회 문화 환경에서 생명체와 데이터들의 상호성이 매체 측면에서 반영되어 있다. 디지털 사회 문화 환경은 회화 혹은 하나의 존재를 단독적으로 보기보다는 여러 매체 중의 하나로, 혹은 여러 연접한 생명체들 중 하나의 현상으로 보게 한다. 어떤 것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정서를 교감하는 주체들(작가와 관객 모두)은 사실상 여러 매체들과 시청각적 정보에 접속하고 있으면서도 개별적이고 고유한 정서들의 혼합체이다.
산만 속에서 찰나적으로만 집중하게 되는 혼합체들은 여러 매체들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이는 기억과 지각과 정서들의 ‘복잡계’이다. 읽고 있는 책의 구절들이 맴도는 와중에 광고 이미지가 머릿속에 팝업 되고, 휴대폰의 SNS상에 올라오는 음식 사진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애완동물 사진 혹은 동영상이 뒤섞인다. 친구들과 메신저로 주고 받는 시시콜콜한 수다와 이모티콘들은 동일한 기호처럼 떠돈다. 평소 즐겨보던 만화나 애니메이션(animation)의 귀엽고도 가증스런 목소리의 캐릭터들과 얼마 전 극장에 가서 본 영화에서 나온 ‘판타스틱’ 한 특수 효과의 스펙터클(spectacle)이 다른 층위에서 조우하며 요즘의 ‘핫’한 드라마에서 두 주인공이 나눈 어색한 키스 장면이라든가 고전 누와르(noir)의 추격과 격투신들에 이어 뉴스인지 사설인지 의견인지 알 수 없는 실시간 인터넷 기사에서의 사건 사고 장면들이 겹쳐진다. 매 순간 어떤 특정 정서들과 느낌이 교차하고 기억과 잠재된 것들이 출몰한다.
이처럼 가분체(dividual)적인 인터페이스와 다차원-혼성체로서의 관람을 그림을 보는 것에 적용해보았다. 시간을 내어 미술관에 간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화려한 색채와 거친 터치(brush stroke)의 그림이 가득하다. 문득 인터넷 스트리밍 사이트에 반복해서 팝업 되는 포르노 광고 속 여성의 얼굴과 표정이 떠오른다. 어떤 작품의 제목을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겨울에 읽은 고전 소설과 그때의 상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렵게 간 고전 형식의 웅장한 건축 내부를 가진 오페라 극장에서 휴식 시간에 다녀왔던 화장실 복도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러한 중첩과 혼성이 ‘관람’이라면, 그 관람에서 감각적이고 지각적인 기억과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정보와 자극이 통합되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반복-베리에이션(variation)된 도상과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표현들은 어떤 서열과 가치의 경중을 떠나서 감각-정서-지식-정보로 합쳐지거나 나열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예술에서는 때로 산만함 가운데 집중과 몰입을 권장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강요가 수반된다. 미적 체험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정 정도 요청되는 ‘시간’의 배려라는 것은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향유하는 시간, 예외성과 소수성의 형태로 출몰하는 특정 순간과의 ‘우발적 마주침’일 것이다.
h/er 를 무대에 올린 그/녀들
두 작가 모두 1985년 생이며, 한 명은 남성이고 다른 한 명은 여성이다. 이 두 작가를 ‘그/녀’로 지칭하려 한다. 둘의 작품에 공통된, 첫 눈에 찾을 수 있는 대상이 여성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her를 기획했다. ‘her’는 영어로 ‘그녀의’라는 소유격이기도 하고 ‘그녀를’이라는 목적격, 즉 대상성과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두 그/녀 작가들이 ‘여성’ 자체에 주목한 것은 아니기에 her에 빗금을 쳐서 h/er라고 하였다. 빗금 뒤의 ‘er’은 독어에서 ‘그’를 의미한다. 빗금이라 지칭한 ‘/’는 ‘빗장’이라고 불리면서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적 주체를 표현할 때 사용된 기호이기도 하지만 이 둘이 회화 구성을 할 때 활용한 요소로도 볼 수 있기에 둘 모두에게 적용했다. 즉 ‘/’은 ‘아니오’를 말하기도 하고, 분열이나 분리-통합의 ‘불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자체로 독립된 사선이기도 하고 디자인적 요소를 갖는 상용구 이기도 하다.
그/녀들의 작가노트를 보거나 작업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들이 무엇을 그렸는지는 둘째 치고 작가별 그리기 방식의 다름이 눈에 띈다. 한 작가는 어떻게 작품을 시작했고 도상이 무엇이고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어떤 구도와 형식을 사용하였는지 제목은 왜 그렇게 지었는지 등을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런 태도 때문인지 그/녀의 작품은 어떤 논리적 체계 하에 제작된 것 같다. 그림 속 도상의 인물들은 과장된 표정과 포즈를 취하며 자신감에 가득 차 보인다.
첫 번째 그/녀는 자신이 10대때인 1998년에 개방된 일본문화 중에 소위 하위 문화라고 일컬어진 망가(manga)와 애니메이션 등에 매료되어 동호회 활동을 하다가 2004년에 미대를 들어갔고 졸업 즈음에 본인 만의 스타일로 ‘멋진 작업이란 것을 해 보자’고 결심했을 때 잘 알고 있었던 망가 스타일을 스스로의 표현 형식으로 삼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멋있다’고 생각한, 서양 미술사에 있어서 고전이자 걸작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컴퓨터 디지털 이미지로 변형, 재구축하여 작업을 시작했는데 2000년대 당시는 디지털 미디어를 둘러싼 ‘뉴 미디어’ 붐이 한창이었고 복제, 패로디(parodie), 디지털 인터페이스 등 다양한 미디어 용어와 개념이 생겨나고 실험들이 이뤄지던 때였기에 이러한 디지털 패로디와 변형은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모에萌え화’ 로 자신의 작업을 일컬으며 오타쿠-화가를 자처한다. 모에 萌え는 이윤성이 '망가, 모에화의 전략으로 고전을 탐구하는 자세'라고 스스로 언급한 말이다. 이에 임근준 aka 이정우(이윤성의 회화에 관한 비평적 메모, 2014)의 설명이 적절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모에적 감정이 단지 미소녀를 성애적으로 현현 하는데에만 쓰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싹트다/타오르다’는 뜻의 오타쿠(망가 • 아니메 따위에 과도하게 열중 하고 집착하는 사람) 신어인 ‘모에’는, 1차적으로 ‘애호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볼 때, 가슴에 솟는 흐뭇한 감정’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제 ‘모에’의 의미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단순한 취향이나 성적 페티시 이상의 뜻이 됐다. 심지어 지하철 노선이나 편의점, 기업 브랜드 등을 ‘모에 의인화’ 해 미소녀나 미소년으로 전치 시키는 일도 허다하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이윤성의 회화적 표현에서 이런 모에적 감정을 되짚어 보았다. 그가 ‘만화적’ 표현을 빌어옴에 필연적인 것은 붓질을 최소화 하는 것이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젖가슴과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의 단단함은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얼굴 표정을 이루는 주된 요소는 눈과 입 모양이지만, 작은 디테일들에 있어서는 또 다른 주관성이 개입했다. 벌린 입 모양의 크기나 형태를 어떻게 하느냐, 코의 그림자 표현에 있어서 뭉툭한 삼각형으로 하느냐 아니면 그 위치를 얼굴로 여겨지는 배경의 중앙에 놓느냐, 머리의 삐친 모양이나 젖꼭지의 분홍빛 색과 같은 세부 사항들의 고려가 그러했다. 그것이 관습적이고 잘 알려진 상용적 표현과 같은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움과 신선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고려들 때문이다. 상용적 표현의 주관적 신선함이란 것은 사실상 ‘소유’의 가장 큰 미덕일 수 있으며 그 애착 어린 소유의 지점을 모에적 감정이 생겨나는 지점으로 보았다.
이윤성의 회화의 특징과 도상의 역할 대해서 장승연(참조의 하이브리드, 2014)은 그가 서양미술사의 관습화된 도상들과 망가 형식을 복합적으로 참조하면서 한국적 도상으로 재창조하고 있다고 언급했는데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인 danae-다나에(그녀의 아버지인 아크리시오스 왕이 외 손자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그녀를 지하 방 안에 가두지만,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에 의해 결국 아들 페르세우스를 낳는다)가 그간 전형적인 서양미술사적 도상(코레지오, 티치아노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부터 네덜란드 바로크 화가인 렘브란트와 1900년이후 클림트까지 즐겨 그린 소재인데 그들의 작품에서 되풀이 되던 전형성이란 하얀 천이 깔린 침대 위에 기대 누워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위주) 이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이윤성은 그 관습을 단숨에 파괴해버리고 있음에 주목했다.
이윤성의 회화적 구성의 측면에 대해서 건축가 정현(구조의 단면, 2014)은 이윤성의 그림이 만화적 평면성의 칸들과 사선의 구성을 활용하지만 도상이나 표현은 그로부터 폭발적으로 탈출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만화에 비유하자면 흔한 쇼넨 망가(소년 만화)—성적 대상화 양식을 소비하는 소년들을 위한—가 아닌, 쇼조 망가(소녀 만화)의 컷 구성에 가깝다. 서양의 코믹스를 기반으로 발전한 일본의 망가 형식이 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층의 소실점에 잡아 두려 했었다면, 다시 망가에서 분화되어 나온 쇼조 망가는 극단적인 평면구성—마치 문학이나 잡지의 텍스트 배열 같다—그 자체이다. 쇼조 망가 에서의 ‘칸의 바깥’이란, 매체의 프레임 안에 둘러싸인 또 다른 칸으로 간주 된다. 칸의 바깥은 안쪽에 그려진 도상 주변을 떠다니는 물방울, 빛, 식물과 같은—감정과 운동감을 나타내는 효과—상징물들을 담음으로써, 클로즈업 된 얼굴과 대비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한편, 두 번째의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관객이 궁금함에 가득 차 대답해 주기를 기다려온 것처럼 보인다. 전시되는 그림들 일부는 그/녀가 20대에 그렸던 것들이다. 당시에 대해 물으면 ‘어렸을’ 때 자신은 무엇을 그리는지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왜 그리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자체에 몰입했고 집중했다고 말한다. 전시를 통해 관객들은 특정 시선으로 그림을 보고 그들이 느낀 것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과 만나면서 작가 본인도 모르거나 납득할 수 없는 지점들이 돌출되었다고 했다. ‘무의식 중에 의도 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에 무언가를 들킨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그림에는 을씨년스런 풍경도 있고 초현실적 공간들도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웅크리거나 엉덩이가 부각되는 자세를 반복하는데 풍자적이기도 하고 난데없이 희극적이기도 하다. 종종 그림의 전면에 남녀의 정사 장면을 넣는 ‘장난’을 치는데 이러한 ‘장난’은 심혈을 기울인 배경의 풍경이나 공간 구성, 회화적 요소들에 비해 어눌하게 표현되었음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회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정사 장면을 주요한 것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녀는 왜 장난 삼아 넣은 장면을 주제로 보는지, 무의식 중에 장난이 아닌 주제 의식이 있었을 지에 대해 궁금하다고 했다. 관객들은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그/녀의 그림은 그간 흥미진진한 관람의 장이 되어 왔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의 그림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주관적인 개인사처럼 들린다.
서른을 전후로 하여 해외 레지던시를 몇 차례 다녀오고, 전시들을 거쳐온 그녀에게서는 어떤 특유의 태도를 볼 수 있는데 가령 작품이란 것을 놓고 스스로도 다양한 관람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다. 그/녀는 스스로에게서 일어나거나 관객으로부터 공명되는 반응들에 대해 딴 소리를 하거나 ‘성숙’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등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그/녀의 회화는 그리하여 능청스러운 것, 직관적으로 불러일으켜지는 충동들이 산란하는 장이 되었다. 개인들의 단독적인 정서들이 순간적으로 조우할 때의 느낌을 다소 추상적으로 다소 표현적으로 회화의 장에 노출해 보고 싶어 했기에 그런 제스처와 흔적으로써의 회화를 관객 앞에 그저 놓아 두는 지점을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작품은 초조해 보이기도 하고 수줍어 보이기도 하며 내내 불안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그림들은 그림 속 도상, 제작 시기, 장소 등의 맥락과 상관없이 매번 ‘발생’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 같다. 사진이나 데이터들을 활용하기보다는 실제 사람, 실제 장소를 대상으로 하며 한 때는 그것을 재빠르게 회화에 담아내는 것에 몰두하기도 했고, 한 때는 모델과 함께 특정 장소를 방문해보기도 하는 등 그것이 ‘발생’하는 상태 자체로 회화면 위에 산란하도록 유도해 버렸다.
2008년에 행한 <100인의 초상화>연작에서 작가는 무작위로 모델을 모으고 한편에서는 대상의 특징을 그려보면서 각기 다른 특성의 ‘사람’을 직접 마주하는 훈련을 한다. 이는 그 이후의 모델 작업에서 비교적 빠르게 회화적으로 대상과 표현을 획득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바탕이 된다. 문맥이 개입되는, 2008년부터 행한 <일반인 남성 모델>연작에서는 ‘일반인’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 속에 남성 모델이 그림 속에 등장하게 되는데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그림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했던 에로틱함이나 화가와의 관계성은 소거된 채로 모델의 자세와 회화적 표현들을 보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관습적 표현에 대한 저항과 반항은 이윤성과 공통된 지점이 있다. 유현경은 최근까지 모델화를 지속하고 있는데 특정 모델은 이제 얼굴이 아닌 전신으로 등장하며 과거보다 긴 호흡으로 작가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최근에는 회화적 표현으로 모델이라는 대상과 마주친 순간에 발생하는 정서들에 주목한 과거와는 달리 대상 자체의 특질을 보다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등 그 과정과 결과에 있어 변화된 지점들이 생기고 있다.
유현경의 작업에 대해서는 2012년 개인전 <거짓말을 하고 있어>, 학고재 전시 때 공개한 작가노트(구글 검색)와 2017년 “청년기를 정리하며”라는 제목으로 쓴 작가노트(인터넷 검색)를 참조하였다. 2012년에는 주로 독일 레지던시 당시 그렸던 초상화들을 설명하였는데, 작가가 주목한 당시의 대기 환경과 대상과의 조우에서 발생하는 정서들에 집중한 표현들이 어떻게 인물화가 정서가 머물고 정서가 발생하는 장치로 변모하게 되는지를 볼 수 있었다. 2017년의 작가노트에서는 그간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관람과 계기들이 비록 엇나간 조우일지언정 그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인다는 고백을 내뱉고 있다. 그러면서 보다 대상 집중적인, 사실적인 묘사로 행하고 있는 현재 모델작업에서 어떤 안정된 정서들이 깊어지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7~2017년의 작업들이 출품된다. 유현경 그림의 특성상 제작 년도가 중요한 편은 아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이들의 배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날의 회화 작가
최근 전시장에서 몇몇 인상적인 그림들을 보았다. 이 두 작가가 ‘회화’라는 매체를 주요하게 사용하고 있기도 하기에 이 두 작가와 더불어 최근 전시를 통해 보게 된 다른 작가들의 회화작품들을 떠올려 보고, 몇몇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주로 그간 서울과 수도권에 위치한 전시장들인 학고재, 아트 스페이스 풀, 아마도 예술공간, 메이크샵 아트스페이스, 두산갤러리, OCI 미술관, 난지 미술 창작 스튜디오 등을 통해서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접했다. 이중에서 평면 작업만 놓고 보자면 박광수, 정덕현, 이우성의 작품들을 흥미롭게 보았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회화도 형식적인 면에서 다양한 모색의 대상이 되어왔다. 인접한 다른 매체인 사진이나 비디오, 3차원 공간 매체, 대중매체와 디자인 등이 회화와 더불어 여러 전시장에서 그 계급적 구분을 모호하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2000년대에 장르나 매체 혼성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탓이기도 하다.
회화적 형식과 구축 방식들, 붓질과 터치 및 색에 있어서는 실로 다양한 재미와 변화들로 인한 자율성을 느낄 수 있었다. 구성면에서는 기존 영화나 드라마의 네러티브적 요소, 한국 민화와 풍속화, 일본 우끼오에나 중국 산수화의 多시점 구성, 시청각 오락 대중매체의 압축되고 상용화된 3차원 구성, 길거리의 간판이나 플래카드에서의 도안된 디자인 요소 등 다양한 시각적 매체와 네러티브 매체, 시간매체들의 형식들이 여러 가지로 활용되거나 차용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아카데미즘적인 미술사에서 정형화시킨 형식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한다든가, 외국의 주요 유명 작가들의 형식들을 무의식적으로 참조 한다든가 하는 측면보다는 현재 한국 내에서 익숙해진 시각 특성과 감각들이 혼합되어 자유롭게, 자의적으로 펼쳐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시청각 매체에서 서로 맥락이 다른 다양한 정보들이 오락적으로, 소비적으로, 나아가 지속적으로 빠르게 공급되는 사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 영화, 게임, 나아가 인터넷 뉴스들이나 개인 블로거들의 이야기, 심지어 의학 정보나 과학 뉴스 등 전문적 담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정보들과 시청각 데이터들이 (인터넷 용어로) 알고리즘(algorithm)의 방식으로 빠르게 소비되면서 동시에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볼 수 있다. 이는 복제 가능한 매체로 디자인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그림과 같은 (복제 불가능한) 예술 매체로 제작하는 경우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고지식한 형식 추구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작가들의 자의성과 자유로움에 드러나게 된다.
두 작가도 형식적 자율성을 만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작가는 그러한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다른 작가는 그러한 산만한 환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벗어나면서 자율성을 획득한다. 그런 와중 둘에게서 비교적 공통적인 특징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둘은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하면 아마도 조소 거리가 될 것이기에 그보다는 그 추구의 태도, 대상에 대한 미적 열정과 그것의 공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퉁’ 치는 편이 낫겠다.
이 둘의 강박적이며 애착 어린 추구로부터 비롯된 반복과 변주의 인물형상들, 즉 h/er(s)는 이들의 그림에서 능청스럽게 등장하기도 하고 다양화되거나 분열된 단일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도상의 측면에서나 일상적 친근함과 관습화 된 보기와 다르지 않은 디지털 알고리즘의 방식에서나 이 인물 형상들은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소재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반복과 변주는 기묘하게도 h/er를 지루하지 않은 이미지로 재탄생 시킨다. 그 탁월한 능력들은 아마도 이 두 작가들의 노하우일 것이다. 이들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다층적이고 순간적인 조우들이 이뤄지는, 반복된 충동의 분출이 펼쳐지는, 직관적이며 통합적인 추상이 현대적 역할을 해내는 장이자 타자화 된 중핵이 드러나는 장이 된다.
이제 왜 인물 형상들이 ‘이상화’되어 등장하며 폭발하고 분출하고 역동적으로 활개를 치는지, 혹은 편안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불안한 응시 속에 사로 잡혀 있는지, 때로는 지극히 표현을 최소화한 자세에 갇혀 있는지를 가늠케 된다. 그 h/er에 부여된 충동들이 매번 어떻게 대상의 정체를 파고 들면서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지를 알 수 있다.
‘직관’적으로 회화를 볼 때,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주인공’에 주목하고 그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네러티브에 집중하게 된다. ‘직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가장 빨리 눈에 띄는 것, 자극적으로 보이는 것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급함’과 같은 상태가 아닌가 싶다. 때문에 직관은 일차적으로 위급함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민첩성이나 순발력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속기 쉽다. 그러나 반복되거나 경험이 쌓이면서 정보와 이성, 감각이 중첩되면 직관 또한 단순한 순발력으로부터 나아가 통합적인 측면을 획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서적 깊이를 가지고 예민하게 수용하고도 빠른 통찰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정서적 깊이, 감각적 예민함, 통찰력 이라는 것은 정해진 기준이 없는 다양성의 영역에 자리하기에 인간은 그것을 주로 ‘예술’이란 매체를 통해서 발현시켜 왔고 향유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작가라는 존재에 대해 혼자 애꿎은 상상을 하는 이라 하기도 하고 금기에 도전하는 자로 여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일반적으로는 시간이 부족하여 집중하지 못한 어떤 영역이나 사회에서 주목 받지 못한 것들, ‘소수적’인 것들을 다뤄 볼 시간을 충분히 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아닌가 싶다. ■ 이병희(독립 큐레이터)
1985년 출생
1985년 출생
송영규: I am nowhere
갤러리 그림손
2024.10.30 ~ 2024.11.25
김지혜 : SOMEWHERE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도 없는
갤러리 도스
2024.11.20 ~ 2024.11.26
Rolling Eyes: Proposals for Media Façade 눈 홉뜨기: 미디어 파사드를 위한 제안들
대안공간 루프
2024.11.13 ~ 2024.11.26
선과 색의 시선 Perspective of Lines and Colors
필갤러리
2024.10.10 ~ 2024.11.27
제15회 畵歌 《플롯: 풀과 벌의 이야기 Plot: The Story of Wild Grasses and Bees》
한원미술관
2024.08.29 ~ 2024.11.29
오종 개인전 《white》
페리지갤러리
2024.10.11 ~ 2024.11.30
여세동보 與世同寶: 세상 함께 보배 삼아
간송미술관
2024.09.03 ~ 2024.12.01
2024 광주비엔날레 기념특별전 《시천여민 侍天與民》
광주시립미술관
2024.09.06 ~ 2024.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