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배
버트 하디 사진에 대한 경의 2016, 캔버스에 아크릴릭, 182x455cm
강요배
깊고 깊은 바다 밑 2015, 캔버스에 아크릴릭, 197x333.3cm
강요배
초록 2013, 캔버스에 아크릴릭, 97x162cm
강요배
거멀창 2009, 캔버스에 아크릴릭, 259x193cm
강요배
젖먹이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160x130cm
강요배
흙 노래 1995, 캔버스에 유채, 162.2x259cm
강요배
시원 (始原) 1989, 종이에 펜과 먹, 38.7x53.2cm
강요배
기아 (飢餓) 1990, 종이에 콘테, 53.2x38.7cm
강요배
가뭄 1991, 종이에 콘테, 34.4x51.2cm
강요배
망보는 소년들 1992,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x162.1cm
강요배
토벌대의 포로 1992, 캔버스에 아크릴릭, 97x162cm
강요배
학살 1992, 캔버스에 아크릴릭, 97x162cm
강요배
광풍 (狂風) 1991, 캔버스에 유채, 145x227cm
강요배
십자가 1992, 캔버스에 유채, 112x193.9cm
강요배
동백꽃 지다 1991,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6x162.1cm
전시 주제
강요배 30년 천착의 결과물을 통해 보는 미술이 현대사를 다루는 방식
이 전시는 ‘동백 이후’와 ‘동백꽃 지다’라는 두 가지 파트로 구성한다. ‘동백 이후’는 1992년부터 2016년까지 26년간 최근 일어난 사건과 제주 4∙3 항쟁을 융합하여 작가가 그린 작품 10여 점이다. ‘동백꽃 지다’는 1989년에서 1992년까지 4년여간 작가가 제주 4∙3 항쟁을 다룬 ‘제주 민주항쟁사’ 연작 50여 점이다. 전시 배열은 ‘동백 이후’를 본 이후 ‘동백꽃 지다’를 볼 수 있도록 구성한다. 역사를 교과서적 편집으로 순서대로 읽어나가기보다 역순으로 짚어 그 뿌리를 살펴보기 위한 시도다.
미술은 고대부터 승리와 영웅을 기념하며 역사와 시대의 사건을 작품에 담아왔다. 하지만 동시대적인 사건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의 시점은 프란시스 고야가 <1808년 5월 3일의 학살>(1814)에서 총구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민중의 비극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마네와 피카소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7~1868)과 <한국에서의 학살>(1951) 등에서 마찬가지로 사건을 재현해냈고 그 시도는 현재에 이르렀다. 강요배 역시 미술이 현대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고찰을 작품을 통해 펼쳐 놓는다. 예술과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시대를 호흡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이 역사와 그 속에서 희생당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다루었고, 앞으로 어떻게 재현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강요배는 제주 4∙3 항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관련한 장소를 끊임없이 답사하고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모아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을 완성한다. 그는 역사화를 그릴 때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경험자들이 남긴 목소리를 자기화한다. 사실에 예술적 상상력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은 묻혀 있는 역사를 끌어내어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강요배의 이러한 작업 방식의 고수는 역사적 사실을 직접 경험한 사람의 기억을 기록, 전달, 공유하고 현재의 문제와 연결시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던지며 미술적 실천을 끌어낸다.
70주년을 맞은 제주 4∙3 항쟁 그리고 예술가의 역할
2018년은 제주 4∙3 항쟁이 70주년을 맞는 해다. 제주 4∙3 항쟁은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섬이라는 특수 환경 속에서 묵인 당하던 것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2000년 1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또 2003년에는 공식적으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가 채택되고, 대량 학살에 대해 정부가 공식으로 사과했다. 3년 전부터는 국가 기념일로 지정받아 4∙3의 의미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제주 4∙3 항쟁을 기릴 수 있게 된 것에는 문화계의 역할이 크다.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제주 사람들도 쉬쉬했던 비극적 사건을 소설, 그림, 영화, 음악 등으로 알렸기 때문이다. 일부 예술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고문을 감수하면서도 작품 제작을 멈추지 않았다. 강요배는 이러한 예술인 활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작가다. 제주 4∙3 항쟁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붉은 동백꽃의 기원인 ‘동백꽃 지다’(1991)를 그린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제주 민중항쟁사’ 전시를 열어 서울 학고재와 제주 세종갤러리, 그리고 대구 단공갤러리를 순회했다. 이 전시는 한국 사회에 제주 4∙3 항쟁의 실체를 바로 알리며 역사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아름다운 제주에서 일어난 잔인한 학살은 일반인들에게도 충격을 주었고 제주를 다시 인식하게 하였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이 제주 4∙3 항쟁에 대한 침묵을 언어로 깨부쉈다면 강요배는 그 언어를 시각화하여 상징으로 변화시켰다.
올해는 제주 4∙3 항쟁 70주년을 맞아 다양한 미술 행사가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다. 대표적인 전시로는 제주도립미술관의 ‘4∙3 70주년 특별전, 포스트 트라우마’와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열리는 ‘4∙3 70주년 동아시아 평화인권전’이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며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삶의 회의를 느낀다. 그렇다면 역사를 잊었을 때 다가올 현실과 감정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역사를 외면하거나 민중의 아픔을 도외시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강요배는 ‘제주 민중항쟁사’ 이후에도 제주 4∙3 항쟁을 다룬 개인전을 꾸준히 열며 1994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4∙3 미술제에 참여하고 있다. 제주 4∙3 항쟁 70주년에 선보이는 강요배 역사화의 총체는 의미가 깊다. 역사에 대한 기억과 이해, 그리고 희생자에 대한 존중과 추모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깨닫게 할 것이다.
작가의 글
4∙3을 그리며
내 고향 제주. 이 스산한 인생의 소년시절을 회상한다.
장구한 세월을 모질게 불어오던 북풍. 그 시린 바람에 살점을 씻긴 채 뼈 마디마디로만 수백년을 자라온 동네 어귀의 팽나무.
잿빛 창공에 거대한 곡선을 이리저리 그으며 바람과 희학질하던 수천, 수백 마리의 시커먼 바람까마귀떼.
제삿날 저녁 어머니를 따라 이웃마을로 들어설 때면 어스름 속 뿌연 하늘을 가로막으며 음산하게 다가오던 높직한 성담.
온갖 사물에 붙은 바람소리, 끊임없이 귓전을 스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귓바람소리.
흑〮회〮갈색의 척박한 땅, 그러나 그 땅을 사람들은 인고로 일구어 맑은 가을이면 축축 늘어진 누런 조이삭들이 밭마다 가득했고, 고구마덩이들이 이랑을 벙글며 맺혔다. 그러한 날에, 갓 찐 고구마를 한 구덕 가운데 놓고 팽나무 마디 같은 손을 한 할머니들이 손자들과 모여 앉으면, 하얀 고구마 속 같이 해학이 피어나는 절제된 풍요도 있었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제주 풍광은 인간의 삶을 부정하지도 치장하지도 아니하였다.
고향을 떠나 20년을 방황하면서 나는 조금씩 사회와 역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땅의 시련보다 더욱 가혹한 것이 역사의 시련이었음을, 어리석게도 이제서야 늦은 공부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혹독한 바람은 수백 년을 두고 외세의 침탈로 몰아쳤다. 참으로 독한 바람은 내가 태어나기 4년 전 오랜 식민지 백성이 해방의 깃발을 휘날리던 날, 저 태평양을 건너와 이 작은 섬을 후려치고 삼키었으니 이 피의 바람이 바로 4∙3이다. 그리고 독한 바람에 맞서 그것을 갈라친 저항이 4∙3이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면 누구나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과거에 대해 검은 장막을 드리우고 산다.
어디 제주도 사람뿐일까? 분단 조국을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가슴속 깊이 울분과 공포가 뒤섞인 알 수 없는 응어리를 묻어둔 채.
이제 제주섬은 여기저기 독버섯들이 피어나듯 외지 자본에 절경들을 장악당한 채, 부정한 풍요의 기운에 휩싸여 떨고있다. 이러한 풍요는 제주의 것이 아니다.
자애로운 땅. 피땀으로 지켜온 선조들의 땅.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선조들을 받들고 기려 그 뜻을 따라 사는 그 후손들의 땅이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맑은 바람을 쏘여 내 가슴속 응어리의 정체를 밝혀보고자 시도한 것이 제주민중항쟁사 연작 그림이다.
그러나 나의 일천한 인생 경험, 그 짧은 호흡으로는 역사의 심연 저 깊이로 잠수해 들어가기가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 실체를 손상하지나 않았는지 심히 걱정스럽다. 제작과정에서 조언을 구하느라 여기저기 말을 퍼뜨린 것이 빈 수레가 요란한 격이 되고 말았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어떤 점에서 상상력을 매개로 세계 사물을 형상적으로 인식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활성적인 상상력의 속성상 늘 새로운 인식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한 차례의 수확이 끝나면 그 밭을 다시 일구어 새로운 씨를 뿌리는 일과도 흡사한 듯하다. 나는 나의 그림밭, 영원한 원시의 손노동의 밭에 한 땅을 남겨둔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4∙3을 경작하기 위하여.
-『동백꽃 지다』, 1992
시간 속에서
사는 동안 절망의 벼랑 한 발자국 앞까지 이르는 수가 있다. 20년 전, 거리에는 함성과 최루 가스 냄새가 가득했고, 30대 후반의 나는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혹, 내 생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면 내가 꼭 해야만 할 일은 무엇인가?’
그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4∙3'을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공포의 장막, 저 너머에 있는.
내 고향 제주, 그 섬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폭압적 살인 기제의 작동, 매몰 협박 감시에 의한 인멸과 봉인, 살아남은 사람들의 울분과 눈물, 그리고 침묵.
물론 나는 그것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 일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니까. 그러나 또한 나는 그 일들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두렵고 어리석었으므로.
‘나약하고 무력한 내가 그 죽음들을 생각하고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이 절망에 빠진 나에게 작은 희망이 될 수도 있었나 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일천한 인생 경험, 짧은 호흡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역사는 불가해하고도 깊은 심연을 이루며 무겁게 흐르고, 나는 단지 그 표면을 보는 게 고작이었다. 곡해하고 오인하다 못해 심지어 훼손하지나 않을까 몹시 걱정되었다.
아직도 나는 4∙3을 채 모른다. 내 상상력은 체험의 진실성 앞에 무릎을 구부린다.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끊임없는 숙고 속에만 있는지 모른다.
2000년 1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또 2003년에는 공식적으로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가 채택되고, 대량 학살에 대해 정부가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아직도 도착된 언설들이 4∙3 혼령과 유족들의 마음을 후벼 파고 있으니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걷어 내는 일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언제나 천하에 가득할 것이다. 절망을 딛고 올라서는 곳에, 새봄의 꽃처럼 생이 있는 게 아닐까?
-『동백꽃 지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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