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준기
re-composed 캔버스에 혼합재료, 한지, 콜라주_162×334cm_2018
민준기
re-copomsed 전시전경,2018
민준기
re-composed 전시전경,2018
1. 민준기는 일상(생활) 속 기억의 한 조각을 발견/발굴하고 감관으로 살펴 표상 화한다. 경험의 저장과 기명의 유지, 유지의 회상이란 온전히 독자적이며, 질량의 가늠조차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작가는 그 개별적인 시간의 세계 속에 안착된 것들을 예술의 주제로 삼는다. 작가 또한 “나의 작업은 일상이며 생활이다.”라며 “지나간 것들의 기억을 재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진을 통해 과거의 순간, 기억들을 담아 추억한다. 과거의 경험, 그것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아련함, 그리고 현재의 자신 또는 누군가가 내 작업의 주된 주제이다.”라고 말한다.
이 주제를 간략하게 함축하면 ‘리얼리즘이 접목된 삶 속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재현’이다. “작업이란 내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주고 또 나를 만드는 중요한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삶 속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재현은 사적 영역이며, 작가가 선택하여 보여주는 이미지들 또한 개인의 영역을 이탈하지 않는다. “그때의 그때를 지금의 내가 다시 만들어낸다.”는 발언은 그렇기에 이해될 수 있다.
주제표명을 위해 먼지 켜켜이 쌓인 기억을 더듬어 그가 선택한 한 장의 사진은 시간의 발견 혹은 발굴의 시작이다. 사진을 덧댄 한지를 낱낱이 찢어 재구성한 일상의 이미지는 삶의 찰나로써 사라지는 어떤 것을 재현하는 통로이다. 이 가운데 찰나로써 사라지는 것들의 재현은 민준기 작업의 핵심이다. 어쩌면 ‘사라지는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만, 그 사라지는 순간이 사진에 의해 정지될 수 있다’와 ‘기억이 그 순간을 되살릴 수도 있지만 기억이 되살리는 순간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부족하거나 왜곡된 두꺼운 시간이다.’과도 맞닿을 수 있다.
‘두꺼운 시간’은 멈춰진 시간 내 작가 자신에 의해 고공되고 조립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하지만 조형에서의 ‘두꺼운 시간’이 대신하는 건 물질로써의 오브제 역할까지 맡는 한지다. 한지는 그저 물질이 아니라 유닛의 기억을 일체화하는 것이며, 하나의 구조물로 구축되는 기억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대상을 고스란히 옮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결과물은 선후의 미적교차다. 다시 말해 작가는 한지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만나게 하고, 순서를 뒤바꾸며 기억 어딘가 접혀 있는 시간과 공간을 소환해 이미지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래의 위치가 온존한 공간과 시간의 혼합을 거쳐 시각화 된 이 한지조각과 이미지는 일종의 자기 방식적 ‘적어나가기’와 다름 아니며, ‘제시’ 및 ‘읽어가기’의 연장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프로세스를 통해 새로운 오늘을 복기한다. 작업의 이유를 찾는다.
2. 민준기의 작업에 부유하는 일상, 기억, 찰나, 재현, 재생이란 명사들은 언뜻 명료하지만 본래 비정형적이면서 추상적인 속성을 띤다. 사진은 또렷함을 증명하려는 반면 그가 다루는 주제와 의식은 사실상 반대이다. 그만큼 매체와 의도의 상반됨을 조형으로 실제화 하는 건 생각만큼 수월하지 않다. 조형과의 간극을 지닌 일반인은 당연하고 예술가 역시 이 지점에서 곤란을 겪기 일쑤다.
상념·개념 또는 의식내용에 버금가는 모든 일상의 요소(어떤 것에 대한 반응과 상황, 현상 등)들이 나와 우리의 지근거리에 다양하게 포석되어 있지만 그것을 미적으로 도출시키는 것 역시 쉬운 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지하는 미적가치와 대상의 징발이란 기실 만민 동일 분동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의 도구인 이성과 논리는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보편화화 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를 묶는 예술가적 직관은 언제나 동일한 결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어떤 것을 재현하고 무언가를 반추토록하며, 자신만의 언표를 통해 메시지를 생성하기 위한 수고를 멈추지 않는다.
민준기도 그렇다. 때론 서정적으로까지 읽히는 여러 작업들은 하나의 논픽션 혹은 에세이처럼 놓이며, 그의 눈과 시선이 닿는 지점에선 실체의미의 불을 지피는 것과 소멸의 단락 사이에서 환유된 삶의 정적이 엿보인다. 그건 나름의 조형과정이나, 어떤 면에선 자신만의 언표를 생성하기 위한 고민이요, 산물이다. 그리고 이 언표는 곧 민준기 식 언어의 시작점이 된다. 또한 기 기술한 일상, 기억, 찰나, 재현, 재생이란 명사들을 기표화 하는 기본 알고리즘이다.
흥미로운 건 미적 태도가 형식이 될 때 감춰진 것들이 비로소 실체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거개의 예술이 그러하듯 굳이 문자화하지 않아도 느껴지고, 알거나 알게 되는 과정에서 머리보다 가슴이 앞설 때 자연스럽게 공감은 생성되는데, 민준기 작업 또한 궁극적으론 그곳을 향해 열려 있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선 그 어떤 불명확한 관념(그것이 사변적일지라도)도 형식미와 미적 태도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 경우 가시성은 공고해질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을 베이스로 한 그의 작업들은 목소리가 크지 않으나, 선택과 조합, 조화를 동반한 시공의 테를 덧댐으로써 공유되는 소리들은 그리 나지막하지 않다. 작업 내부엔 욕망마저 비워버린 무언가가 똬리를 틀고, 시각적 범주에서 벗어나 세상 보기와 상상하기, 적어나기와 읽어가기에 방점을 두고 있는 작가의 의도가 감각적으로 개척되고 있다는 게 보다 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선택-시간-공간-한지-구성-재현이라는 재료를 통한 ‘시간의 건축학’으로부터 하나의 기억술을 더해 조형언어를 구축하는 민준기의 작업은 확장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더디고 더딘 발걸음을 담은 영상작품에선 심각하지 않은 내재율을 보여준다. 상영 시간은 짧으나 긴 여운을 생성하는 이 영상은, 작업의 지속성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자 작업의 일관성과의 개연도 짙다. 왜냐하면 민준기 작업이 내면으로 침잠하는 개인적 미학만을 쫒는 경향이 강한 것은 아니라는 점, 분리된 직관과 이성을 통해 예술성이 무엇으로부터 발현 될 수 있는지 진득하게 되묻는 탓이다.
3. 오늘날 민준기의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내면의 세계와 확장된 메시지가 담긴 세계를 자유롭게 횡단한다. 숱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마주친 장면들, 잃어버릴 듯한 아슬아슬한 기억들을 되살려 나름의 스토리와 목적형 좌표를 사진으로 좌표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만든 자, 보는 자들 간 동시성의 거울이고, 작가에게 있어 그 거울 같은 공간은 그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집약하는 심원한 상징이다. 특히 적막하듯 일렁이는 장면들,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에게 엿보이는 불특정 다수의 멈춰진 귀정, 바다를 배경으로 삶의 어떤 찰나를 드라마처럼 구성한 작업들이 그 횡단의 거리를 보여준다.
민준기는 마치 연출가처럼 하나의 단초로부터 시작된 이런 유형의 작업을 통해 인지되어 넓혀지고 공감할 수 있는 시공을 화면에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시공의 재구성은 단지 가시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사람과 도시, 공간 속에 떠도는 숱한 말들의 결처럼 인식을 통한 현실의 직면, 소통의 미학에 무게를 보여주며, 사진의 기록성, 현장성이 존치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본적으로 사진의 역할도 포기되지 않고 있다. 특히 그 무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으며, 내레이션에 대한 종속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보단 시공의 터전 위에서 발견 혹은 발굴된 장면, 저장되거나 공히 익숙한 사실성을 재생산함으로써 일정한 공유를 도모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사적인 것이지만 보편적 단락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친숙해 발견되지 못한 것의 발견 또는 흔적의 열람을 통한 삶의 지층을 덮고 있는 어딘가를 건드리기 위한 시도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표피적인 현상의 적시가 아닌 존재성에 대한 고찰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실제로 그의 작업들은 분명 이야기가 있고, 그렇기에 드라마처럼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비유된다.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하나의 층위에서 유동한 채 존재너머의 존재까지 열람하게 한다. 이는 지상적인 어떤 형상과의 결합 속에서 위치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써 자리하며 기록의 재구성을 거쳐 리얼리티를 상정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사진 속 피사체의 형상만으로는 확인 불가능한 민준기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민준기의 작업에서도 아쉬움은 있다. 우선 탈경계의 시대에서 예술은 인문학적 집합소와 같다는 것을 유념하고, 매체의 확장성을 견고히 하여 거시적 관점에서의 의지도 요구된다. 그래야 화자의 말참견이 좌절되는 언어 저편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으며 망막에 호소하는 언어가 아닌 느낌과 감각으로 전유되는 인간 삶이 부여된 장소와 장면으로 스스로를 승화시킬 수 있다. 특히 자전성은 밀도가 높을수록 나와 우리라는 공동체 속 내밀한 역학관계가 희석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개인 내면의 목소리를 넘어 공간의 특성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탐색이 함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적는 생활’에서 도약해 ‘다시 쓰는 예술’을 위해 말이다.■ 홍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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