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티프 Motif
2018.11.28 ▶ 2018.12.30
2018.11.28 ▶ 2018.12.30
로와정
페이지 Page 2018, 나무에 아크릴릭 Acrylic on wood, 53x84x4cm ~ 54x2x41.5cm
로와정
페이지 Page 2018, 알루미늄 모기장, 실 Aluminum mosquito net, thread, 57x64x37cm
로와정
폴딩 스크린 Folding Screen 2018
이은새
눈 비비는 사람 Eye Rubber 2017,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93.9x260.6cm
이은새
다가오는 여자 Come Closer 2018,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16.7x90.9cm
이은새
응시하는 여자 Staring Woman 2018,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40.9x33.3cm
이희준
어 쉐이프 오브 테이스트 No. 12 A Shape of Taste No. 12 2018, 린넨에 유채 Oil on linen, 53x53cm
이희준
어 쉐이프 오브 테이스트 No. 23 A Shape of Taste No. 23 2018, 린넨에 유채 Oil on linen, 53x53cm
이희준
어 쉐이프 오브 테이스트 No. 102 A Shape of Taste No. 102 2018,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82x182cm
우정수
PD_1 2018, 종이에 펜 Pen on paper, 21x14.8cm
우정수
프로타고니스트_로즈핑크 3 Protagonist_Rose Pink 3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잉크 Acrylic, ink on canvas, 200x300cm
우정수
프로타고니스트_스마일 3 Protagonist_Smile 3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잉크 Acrylic, ink on canvas, 72.7x53cm
한계를 절개하는 우로보로스의 산책자들
질문은 간단하다. '왜 예술을 하는가.' 완전한 답이 불가능한 질문은 무게도 책임도 갖지 않는다. 아니, 질문은 불가능한 답을 예비한 가운데 많은 맥락과 정동을 예비한다. 누구라도 위의 질문이 향할 것이고, 정답을 얘기하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육하원칙의 항목을 동반한 설명들이 구구절절 이어질 것이다. '왜'가 아닌 어떻게, 언제와 무엇이 붙은 질문은 정답을 우회한 보다 많은 모티프를 열어둔다. 정답이 부재한 자리엔 셀 수 없는 설명들이 넘친다. 범위를 좁히고 세목을 정해 이야기한다면 서술 가능한 의미들이 타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질문에 당연시된 예술은 어떤 사조와 세계관에 여과된 개념인가. 예술의 모티프를 묻는 대상이 청년작가를 향하는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가. 청년의 당사자성뿐 아니라 시기적 불안정과 가능성 따위의 세속적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청년은 예술에 어떻게 접목되는가. 그 모습은 어떠한가. 청년작가의 호명이 아직 유효하다면, 이들은 어째서 아직도 청년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모티프는 통시적이고 개별적인 동시에 공시적이고 보편적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작업의 동기는 근원적이고 추상적일 테지만, 동시대 작가들로 한정하면 작업의 관점, 사회 맥락과 사건, 이론, 개인사 등 낮은 포복으로 편재해 있던 질문들이 덤벼들 것이다. 모티프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실마리를 던지거나,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동시대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 폭을 확장한다.
1. 회화를 통해 회화의 한계를 관통하는 회화
'왜'로 시작하는 질문은 예술의 기원을 향한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문명의 태동 이전 라스코벽화로 거슬러 올라가 예술의 연원을 파헤쳤다. 그는 예술을 현생인류 시작의 분기점으로 본다. 죽음을 인식하고 의미를 만드는 능력과 반대로 의미와 수식, 관습과 기호체제를 허무는 작업을 시도함으로써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는 과거 다른 인류와 구분된다는 것이다. '예술의 영향력은 실리적인 활동에 대립해 기호들-유혹하고, 감정에서 비롯되고 또 감정에 호소하는 기호들-의 형상화라는 무익한 활동을 내세운다.' 예술은 인간이 자신의 효용성을 진작시키며 노동하고 계산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부정하며 존재 가능성을 찾거나 부정 자체를 견지한다.
그의 치밀한 해석은 서구 근대 이후 예술이라는 강력한 자장에 여과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적어도 '예술'이 주어가 되기 위해서는 종교와 왕권에 복무해온 근대 이전 예술에 주어진 부수적 기능과 역할에 반목하고 도구화를 거부하는 개념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짓'(gesten, gesture)에 천착한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 역시 예술(보다 정확히는 '그리기'(Die Geste des Malens))에 대해 '대상의 교활함에 대한 손의 투쟁'으로 기술하며 비슷한 맥락을 공유한다. 물론 그 방식은 대상을 지배하는 체제로부터도 불화한다. 객체화를 전유하고 부정하는 시도는 예의 목적론적 의미를 폭로하고 벗겨낸다. 예술은 의미를 비워냄으로써 의미의 가능성을 찾고, 형상의 질서를 파열시킴으로써 형상의 도래를 만드는 행위 전반을 향한다. 예술은 관습화된 몸짓을 내려놓고 편견의 목록을 포기하는 작업이기에 자기 분석적이다. 더불어 또 다른 생성과 변화 가능성을, 변화를 위한 관점과 감각을 열어둔다.
부정성의 태도로 대상과 시스템을 전유하는 작업은 서사의 한계를 관통한다. 부정성은 바깥으로 탈구하며 미래를 예비하기보다 차라리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선적 서사관을 파열함으로써 내적 체제의 해체를, 체제와 전복 사이 놓인 간극을 절개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간극은 아무것도 없는 공허를 의미하기보다 의미가 벗겨지는 풍경을, 여과되지 않고 남아있는 얼룩 또는 억압된 채 출몰하는 유령을 출현시킨다. 그것은 목적론적 계산에 온전히 포획되지 않거나 거부하는 동시에, 형식적 프레임으로부터 곧바로 이해될 수 없는 형상에 대한 투쟁과 협상 및 탐구의 과정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섣불리 답을 확신할 수 없다. 바깥으로 탈구하지 못하고 실패와 고착으로 명명되는 시공은 한계로 점철되는가 싶지만, 한계의 한계로 진동하는 역설의 형상을 마주한다. 전시는 그 속에 상이한 궤적을 모색하고 그려나가는 이들의 고전분투를 모아낸다.
그 하나의 면을 배헤윰에게서 찾는다. 작가는 회화의 본질적 딜레마를 회화로 시각화하는 역설에 천착한다. 운동하고 유동하는 형상을 담아낸 그림은 정지된 이미지에 갇혀 있다. 하지만 정지를 통해 포착 가능한 운동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정지화면으로 운동감을 드러내는 회화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모순이 어떻게 시각화되는가를 읽는 것이 관건일 터. 움직임을 평면에 옮긴 시도는 색과 색의 붓질을 조합한 결과물로 나타난다. 붓질의 형상은 특정 대상을 가리키기보다 동세와 무게, 강도로 집약된다. 화면은 물감의 물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운동의 흔적을 감각적으로 펼쳐낸다. 운동감은 색상과 색면의 배치, 붓이 움직이는 방향과 강도에 의해 인지할 수 있다. 정지된 화면 위에 포착 가능한 운동의 차원이란 가상으로 유추되거나 포착된 흔적, 실제로 움직이지 않지만 감각할 수 있는 일종의 운동-이미지이다.
작업 흐름에 따라 이미지로서 운동은 변화를 보여 왔다. 초기 작업이 비교적 구체적인 유기체의 모습을 갖췄다면, 근작은 보다 추상화된 시각적 요소들이 집적된 화면으로 드러난다. 화면에는 구겨진 종이와 잘린 과일, 사방에 뻗은 풀 등의 형질이 산재하여 접히거나 찢어진 자국의 빛과 색의 변화를 담고, 질감의 차이로부터 움직임을 시각화한다. 소재는 추상화되었지만 보다 단단한 모습으로 화면을 구축한다.
그 결과 배헤윰의 회화는 본질적으로 움직이지 않지만 정지한 것 같지도 않은 모습으로 시야에 잡힌다. 입체적 평면, 운동하는 정지화면은 회화의 근본적 역설이기도 하다. 사물은 지속적으로 화면 위를 미끄러지고, 화면은 이를 끊임없이 담아내고자 한다. 사물과 심상은 움직이지만, 붓은 이들을 붙들려 한다. 결국 화면에 남는 것은 운동 자체를 담을 수 없는 붓질의 고집, 끝내 운동을 담아내고자 하는 붓질의 진동으로 남는다. 말인 즉, 배헤윰에게 회화는 회화의 패러독스 자체를 드러내는 유일한 채널이다. 작가는 회화를 견지하지만, 회화를 통해 회화의 한계를 관통하는 회화는 평면 위에 박동한다. 그것은 작가가 일컫는 우로보로스(Ouroboros)로서 회화, 원근법적 공간 재현 규칙과 더불어 입체의 형상을, 심지어 평면성의 한계까지도 지워내는 과정을 회화로 돌파하고자 하는 역설 자체의 형상이다. 입체의 구조를 철저히 평면 위에 제시하는 회화의 한계는, 세계의 구조를 평면 위에 길어 올리고자 했던 세잔으로부터 태동한 모더니즘 회화의 본질적 화두를 반복하고 업데이트한다.
역설이 회화의 본질이라는 명제에 공명하면서 판단유예의 시공을 가르는 산책자적 작업을 우정수에게도 읽어낼 수 있다. 이전부터 산책자(Flâneur)를 작업 소재로 가져온 만큼 그의 선은 수집된 레퍼런스를 가로지른다. 책과 책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를 두루 살피는 작가의 눈이 이미지를 포착하고 필사한 결과물은 일견 선과 여백으로 형상을 새긴 판화의 인상을 준다. 보다 정확히는 판화의 이미지를 빌려 손으로 참조대상을 필사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는 선으로 형상을 구성하지만, 동시에 해체하고 풀어냄으로써 각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성상과 고대 신화의 모티프들이 재현되는가 하면, 다른 편에는 스마일과 해골, 복면 마스크를 얹은 인물이 흐물거리며 튀어나온다. 상이한 소재임에도 둘 사이 공통점이 있다면 기존 공간에 속해있는 대상을 참조하면서 재현 질서를 전유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시각장의 불안정성과 불연속성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배헤윰과 마찬가지로 우정수 역시 세계의 관성을 지움으로써 형상화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관성을 해체한다는 점이다. 관성을 지우고 세계를 담는 수행의 흔적은 엉성하지만 밀도 있는 선의 집적으로 나타난다. 선으로 옮긴 도상은 마치 중세와 고대 필사본 판화의 특정 장면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과 손짓이 진리를 각인하는 상징의 세계, 하지만 이를 화면에 옮긴 모습은 선들의 집적이 만든 불완전한 표층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의 눈을 거친 손끝은 표층 위로 불온하고 불안정한 형상들을 출몰시킨다.
사이-공간을 절개하고 솟아나는 이미지를 끌어올리듯 작가의 손은 형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파괴하고, 파괴적으로 재(再)창안한다. 최근 작업에 이르면 원본 대상의 참조를 생략한 채 심상을 화면 위로 옮겨 즉흥성을 더한다. 예의 즉흥성은 화면 배치에도 드러난다. 선으로 짜임새 있게 구축했던 이전 화면은 조금 느슨해진 모습이다. 작가는 전면의 형상을 화면 일부 영역으로 배치하고 다른 소재들을 뒤섞는가 하면, 내용보다 표현에 집중한다. 반투명한 표층의 붓질 위로 심층의 붉고 푸른 물감 층이 비치며 '얇은 깊이'의 역설적 공간이 생긴다. '스킨'을 유비하는 화면은 핏기어린 피부를 연상시킨다. 표층의 육화된 화면 위를 내달리는 드로잉은 색면에 대비되는 질감으로 흡사 판박이와 타투처럼 스킨 위에 밀착한다. 날렵해진 선들이 그려낸 형상의 동세 역시 강화된다. 스마일과 해골 버튼이 고전 도상의 거친 삽화 위를 굴러가는 가운데 드로잉과 페인팅이 적층(積層)한다. 폭풍 한가운데 배와 크라켄이 뒤엉켜 있고 벽채 같은 파도가 이들을 삼킬 기세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파도 배경에는 홍조 띤 화면이 드로잉의 청색선과 날을 세워 현기증을 유발한다. 도식화된 파도는 기층의 스트라이프 화면에 연동하며 납작한 텍스처로 침습 당한다. 폭풍 속 거대한 파도 앞에 괴물오징어와의 투쟁은 다시 한 번 형상 위로 나뒹구는 스마일 이미지의 농락 속에 사소한 순간의 파편으로 전락한다.
화면 위에 층을 벼려내고 드로잉과 페인팅, 선과 면의 대비를 리드미컬하게 배치한 작업은 작가가 명명한 '프로타고니스트'의 비극을 시각화하는 듯하다. 아니, 그마저 자신의 비극적 운명이 희극적으로 재생됨에 따라 역설적 비극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끝내 버릴 수 없는 평면성과 즉흥적 페인팅을 통해 절체절명의 무게를 증발시킴에 따라 비극적 주인공의 몰골은 전유와 참조의 변주에서 나아가 화면을 덮친 페인팅에 의해 지워지고 생략된다. 그럼에도 폭풍으로부터 출몰하거나 폭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이상한 형상들은 반짝하는 장난처럼 낯선 몸과 얼굴들을 던져놓는다. 기적과 재난으로 쓰인 과거의 기록으로부터 현세의 불안정으로 도약하는 투쟁과 죽음의 얼굴들은 종이와 캔버스, 합판 위에 펜촉과 붓의 흔적으로, 유리벽 위에 가는 테이프로, 피부 위 판박이 스티커처럼 새겨진 타투로 출몰하고 부유한다.
이들의 작업은 드로잉과 페인팅을 구사하고 소재를 운용하는 정도에 있어 매우 상이하지만,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화의 본질에 접근한다. 그것은 재현을 내파하는 부정적 재현으로서 회화, 평면성의 한계를 인지하지만 평면의 논리로 외부 시공간을 담아내는 회화, 한계 자체를 내적으로 재구성하는 회화에 가깝다. 이는 기존 공간의 문법을 절개하고, 절개된 공간을 드러내는 시도이기도 하다. 형상을 드러내는 작업은 기존 형상을 지우는 과정 위에 지속된다. 꼬리를 삼키고 스스로를 파괴하며 불가능한 완결성을 수행하는 우로보로스의 형상이 위의 작가들에게 반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불온한 산책으로서 예술
의식적으로 역설을 실천하는 작업은 항과 반대 항을 끊임없이 순환하고 배회한다. 이는 많은 참여 작가들이 언급했던 '산책'의 키워드와 연결된다. 산책은 한편으로 작업의 궤적을 밟아나가는 작가들의 경로를 가리키지만 표지 없는 배회가 되기도 한다. 산책은 시행착오와 성과를, 참여관찰과 거리두기를 포함한다. 동시대를 거슬러 밟아나가는 시도는 민족지적 기록이 될 수 있다. 규율의 구속으로부터 다소 간 거리를 둔 배회는 주류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하위문화와 사각지대에 눈을 돌린다. 변화를 요구하는 행렬을 따르지만, 끈질기게 불화의 리듬을 찾는 이들은 프로파간다 한복판에서마저 그 연안을 맴돈다. 자리를 찾기 위한 시도는 동시에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찾기를 포기한 상황을 필사적으로 읽고 감각적으로 옮기는 시도로 변주한다. 그 모습은 불완전성을 드러내되, 온전한 의미부여를 거부하고 불완전을 잔여로 남기며 감각적 여운과 첨예한 담론의 틈을 낸다.
이희준은 산책을 문자 그대로 모티프 삼는다. 그는 건축물과 내부 인테리어로부터 도시 풍경의 디테일로 소재를 옮긴다. 사물로부터 시각형식을 변별하는 작업은 수직과 수평, 패턴으로 구성되는 사물의 흔적 속에 사물을 생략한다. 아니, 사물은 물화된 패턴의 공적을 추적하는 과정에 사후 확인된다.
이번에 선보이는 「어 쉐이프 오브 테이스트(A Shape of Taste)」(2018)에서 작가는 홍대, 연남동, 한남동 등 근래 환경개선사업과 도시재개발을 통해 급격히 변화를 겪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메가시티 서울에서 변모하는 주택가의 스킨과 색상을 참조한다. 그가 포착하는 풍경은 전체적 경관보다 도시 건축의 단면들이 집적되고 압축된 표면의 이미지다. 채집한 풍경들을 5*5cm 화면에 드로잉 하는 초기 공정에는 대상 선정과 이미지 수집, 줌업과 커팅, 색채 가공이 포함된다. 이를 53*53cm 화면에 편집하여 옮긴 뒤, 각 프레임들을 격자 모양으로 배치하고, 배치된 이미지들을 다시 182*182cm 대형 화면에 재편집한다. 풍경의 패턴을 찾아 배열하고, 대형 화면으로 반복 구성하는 단계에는 반복적 페인팅을 나란히 배치하는 수평성과 더불어, 공간을 거듭 접어나가면서 유닛을 확대하는 계층적 수직성이 교차한다. 포착한 경관을 정방형 하드엣지로 가공하고, 이를 수열적으로 나열하는 동시에 한 화면에 접합하는 작업은 실제 도시를 사진이미지로, 일러스트로, 회화로 재가공함으로써 도시와 건물의 지표성을 재지표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련의 과정은 구체성을 생략하지만, 소거된 풍경이 사이즈를 달리하며 전시장의 경관을 구성함에 따라 그의 작업은 일종의 유사-풍경을 제안한다. 도시의 인공적 속성을 가공하는 작업은 인공의 실재 장소성을 지우는 동시에 인공성을 재창안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른바 번역된 장소성은 실제 장소와 상이한 화면 위의 패턴이고, 작가를 통해 편집되고 여과된 감각적 표현의 평면이다. 화면은 기호를 삭제한 흔적의 집적물에 가깝다. 여기에 화면을 둘러싼 프레임은 집적된 화면을 견고하게 감싸고 엮고 지탱함으로써 도시의 질서를 전유한다. 규칙이 반영된 작업에 주체의 정동은 숨겨지거나 생략되어 보인다. 무심한 산책자로서 작가는 변해가는 거리의 패턴과 색상을 관찰하고 채집하는 기록자이자, 목적과 기능을 생략하면서도 도시 리듬에 몸을 동화시켜 패턴을 접합하는 편집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도시의 기호를 파괴하고, 추상화하며 다시금 도시 풍경에 이접시킨다. 주목할 점은 일련의 공정에 연상할 수 있는 디지털 가공과 시뮬레이팅을 일절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로그래밍에 이입한 손작업은, 반복적인 작업 단계 속에 생략된 장소성과 대기의 온도를 색과 패턴에, 붓 자국을 통해 음미하도록 한다. 작업은 동시에 휴대에 용이한 디지털 촬영 장치를 경유하여 인스타그램과 같은 전시형 SNS의 격자 프레임으로 배열된다. 일련의 장치들은 그가 개입하는 주관성마저도 매체환경에 철저히 이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가 봉착한 주체성의 모순을 대면한다. 한편으로 작가가 전유하는 도시풍경은 외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기호들의 조합으로 채집된다. 하지만 그 결과물 역시 실내 인테리어로 소비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 보인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장소를 산책하며 맥락을 생략한 작업은, 맥락이 콘텐츠로 납작해지며 하나의 경관으로 소비되는 도시풍경의 변이과정을 작업으로 변주하고 화이트큐브로 수렴시킨다는 해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속물적 전시가치로 도배된 도시와 작업을 속물적으로 읽고 소비하는 태도 사이에 놓인 주체성은 텅 비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위의 물음에는 의식화된 감각적 형상으로서 작업이 배제되어 있다. 외부 풍경을 기호화하고 실내에 스케일 있는 화면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은,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교란하는 공간과 평면 사이 사유가 작동하기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산책과 채집, 가공과 편집을 주관하는 프로그래밍화된 예술가의 몸을, 그로부터 아직 독해되지 않은 감각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예술가는 내용 없는 인간이다. 그는 표현의 무(無) 위로 끝없이 떠오르는 것 외에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의 한계라는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외에 또 다른 일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라는 이론적 설명은 결국 실패와 체념을, 견유(犬儒)와 냉소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함의하지만, 동시에 내용 없음 속에서 아직 시야에 잡히지 않은 대상들을 투영한다.
작업 속에 작가의 동선과 감각을 읽는 것이 과제라면, 이는 중첩과 반복 위에 역설을 품고 있는 작가의 내적 갈등과 협상의 과정을 살피는 시도로 설명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내용 없음'이 강제당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부정된 타자로서 불온한 얼굴을 드러내는 시도는 예술가가 스스로를 비우며 공허한 감각을 펼쳐놓기 이전에, 정체성이 함의하거나 생략하고 있는 사회적 맥락의 독해를 요청한다. 여기에는 동시대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사건의 코드들이 신경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앞서 언급된 작가들 역시 전시적 기호의 집적체로서 도시를 산책하고, 그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던지거나 불평등에 저항하는 집단적 행동들을 본다. 행동에 참여하거나 또는 참여하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예술가는, 풍경 속에서 풍경을 기술하며 풍경의 흐름과 구조를 살피고 풍경 너머를 향하는 손끝의 감각을 실천한다.
예술은 스스로를 거스르고 전유하고 파괴함으로써 존속하지만, 여기서 사회적 맥락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술은 강제당한 침묵에 대한 신호로 나타나거나, 시각을 포함한 감각의 형식을 규정하는 이상이나 체제로부터 뚫린 구멍, 부재를 드러내는 행위로 수행된다. 때로 그것은 기억을 위한 기록으로, 온전히 의미부여할 수 없는 징후적 기록으로 드러난다. 관습과 내성을 거슬러 텍스처를 새로 내는 작업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 재현의 대상과 형식을 시각화한다. 이는 동시에 의식구조와 몸의 의미까지 재편한다. 숨겨진 목소리를 가져오고 낯선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도는 비스듬하고 어정쩡하게 살아 있는 이들의 말하기와 보기로서, 건강하고 진지하게 살아 있는 이들의 말하기나 보기와 다르다. 이는 예술이 애도와 정치, 재현의 윤리에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고민의 궤적 속에 이은새가 그리는 형상들은 두루뭉술한 덩어리로부터 성별이 지정된 얼굴들로 선명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이는 이희준이 풍경의 맥락을 덜어내고 기호화하는 추상화의 감각으로부터 비워낸 주체성의 질문을 던지는 것과 대비된다. 아니, 화면 속 얼굴들은 추상화와 압착의 강제에 맞서 발화하는 저항적 응답인 양 이희준의 작업과 대구를 이루는 모습이다. 인물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폭력과 재난의 상황 속에서도 두 눈을 부릅뜬다. 강렬한 붓질의 동세 자체가 형상을 구현하지만, 그 모습은 해체되고 녹아내릴 듯 불완전하다. 형상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그 모습을 선연히 지켜보는 두 눈은 물감이 질척이며 역동하는 화면 위에 또렷이 박혀있다. 폭력에 노출된 끔찍한 상황 한복판에 관객의 눈을 깜찍하게 받아치는 응시는, 자신의 상처를 보란 듯 드러내는 동시에 몸이 전시되는 상황에 저항한다. 물감 위로 흘깃 지나간 선이 만든 눈의 윤곽은 표층 위에 부유하듯 공허한 응시의 존재감을 뿜는다. 한편 표층의 시선 아래 신체에 뚫려있는 구멍이 선연히 드러나 불안감을 높인다. 강제적으로 뚫리고 열린 구멍, 입과 항문, 질 등의 기관을 가리키는 구멍은 고스란히 폭력에 노출된 몸, 맞고 쏟아내고 비명 지르는 몸인 동시에 현재의 공간을 절개하는 틈을 현시한다.
불안과 균열의 장소로서 구멍과 폭력을 지켜보는 응시 사이 색의 역동이 작동한다. 물감으로 뒤섞인 화면은 구멍과 접합한 응시, 불안한 균열의 렌즈로 투영한 몸의 뒤집어진 모습의 현시처럼 보인다. 여기에 작가는 '잘리지 않는 아이스크림 덩어리', '수면에 던져진 돌이 내는 파동'과 같은 물성을 언급했다. 쉽게 삼켜지지 않고 미끄러지며 스스로 녹아내리는 덩어리, 외부의 충격으로 물질에 가해지는 변화는 감시와 폭력의 순간을, 쾌락과 고통이 교차하는 상황을, 난관에 봉착한 추리의 상황으로 제시한다.
분명한 표정을 갖지만 온전히 판명하고 의미로 쉽게 파쇄할 수 없는 상황들은, 여성의 몸으로 현현함에 따라 동시대 미소지니의 현실에 조응한다. 소재의 구체적 실루엣을 드러내는 변화는 앞의 작가들과는 다른 면모이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몸은 비천한 대상의 프레임에 사로잡히지만,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상황을 지켜본다. 그녀는 대상이자 주체이다. 인물의 동그란 눈은 미간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술 취한 여자와 드센 여자를 그리는 작가는 의식이 떠난 몸, 또는 의식이 과잉된 몸, 그 자체로서 위협이 되고 위협에 노출된 몸을 보인다. 객체처럼 뭉개진 인물들에게 또렷하지만 비어있는 시선은 제 시선이 향한 방향과 욕망을 쉽게 말하지 않기에 불온하며 동시에 취약하고 불안정하다.
하지만 덩어리가 여성 젠더로 인지됨에 따라 공정은 난제에 빠진다. 작가의 붓질은 세계를 뒤섞고자 하지만, 그녀가 그리는 세계는 이미 폭력에 뒤섞여버린 채 던져진 뒤이기 때문이다. 전방위의 여성혐오 속에 무서운 여자의 형상은 찻잔 속 폭풍, 최후엔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여성을 재현하는 것은 대상화된 여성을 재차 대상화하는 것은 아닌가. 위협적인 옷을 입혔을 뿐, 여성으로 소비하는 기호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가. 뒤섞여버린 객체로서 여성을 다시 시선의 폭력에 던져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은 작가로 하여금 선뜻 여성을 외부로부터 이미지로 채집하는 데 윤리적 장벽으로 작동한다. 이에 작가는 외부에서 이미지를 채집해 대상으로 삼던 공정에서 내적 상상을 통한 형상을 창안하는 방식으로 공정상 변화를 택한다. 이는 앞서 우정수가 최근작에서 강화한 지점과도 공명하는데, 우정수가 즉흥적 공간구획과 그리기에 초점을 맞추며 소재를 뒤섞는다면, 이은새는 대상화된 소재를 능동적으로 태세 전환하는 방향을 노정한다. 확장된 동공의 인물은 이제 미간에 힘을 준다. 폭력을 그저 지켜보며 무력해보이기만 했던 커다란 눈이 시선을 조이며 화면 바깥을 노려본다. 색이 휩쓴 화면에 명징해진 형상은 인물을 더 괴팍하게 만든다.
한데, 노출과 대상화가 분열과 탈주가능성의 형상에 접착된 가운데 의식적 행동을 준비하거나 메시지를 발화하기 위해 분주하게 붓을 운용하는 이은새의 시도는, 다시금 평면의 화면으로부터 찢어지고 접힌 사물의 명암을 그려냄으로써 운동 불가능성을 거스르는 운동을 드러내고자 고전하는 배헤윰의 시도와 공명하지 않는가. 이는 또다시 작가들 간 상이한 작업 간의 연결을, 우로보로스의 산책을 복기한다.
3. 불가능한 최종의 표지
섭외된 작가들은 대부분 80년대 생이고, 청년예술가와 신생 공간 담론의 시공을 다소간 거리를 두고 접한 이들로서 작가로서의 경력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과정은 제 작업의 연속성을 살피며, 동시대 시각문화와 문제의식에 비판적으로 조응하는 시도를 포함한다. 동시에 이들은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의존할 수밖에 없는 행정절차를 숙지하고 사업에 걸맞은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제도 종속적 주체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작업의 양식을 변주하고 갱신하며 파괴함으로써 작업을 잇는 공정은, 더불어 변하는 풍경을 체화하면서 그 속의 면면을 절개하고 들여다보며 예술의 모티프를 다시금 길어올리는 것 또한 포함한다. 앞서 작가들의 작업은 일련의 과정을 저마다의 양식으로 구현해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로와정의 작업은 앞서 일별한 상이한 지층을 살피는 듯 보인다. 평면작업을 구사하는 작가들 속에서 이들은 고정된 배치에 리듬을 부여하고 복잡한 전시공간을 활용할 것이라는 기대를 준다. 하지만 형식상의 기대만이 단지 로와정을 본 글의 결론부에 배치한 까닭은 아니다. 듀오로 구성된 이들에게 따라 붙는 이견과 긴장, 협의와 조율의 키워드는 실제로도 그들이 작업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로와정은 다른 작가들과 함께 전시에 참여함과 동시에 전시 내부에서 작가와 작품, 전시장 사이의 긴장 및 협업의 집단적 공정을 함축한다.
이들의 작업은 줄곧 프레임의 질서를 비판적으로 살피는 시도로 설명되어 왔다. 프레임을 주요 소재로 삼는 직접적인 까닭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구부리고 떼었다 붙이고 세우고 번역하는 과정을 전시하는 공정 자체를 작업에 포함하는 취지를 전제한다. 작업 과정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이들은 기존 의미체제와 사물의 기능을 참조하면서도 기능 상실을 추구한다. 더불어 고정된 프레임과 이를 변주하고 일탈하는 놀이를 뒤섞는 가운데 불화와 긴장, 협상을 놓지 않는 자화상의 변주를 꾸준히 이어나간 배경이 자리 잡는다. 이번 전시를 중심에 두고 설명한다면, 로와정의 작업은 화이트큐브와 작가들의 면면을 프레임 삼아 교차하고 시각화한 메타적 작업이라 말할 수 있다.
「폴딩 스크린(Folding Screen)」(2018)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사이즈의 판들이 나란히 접합된 설치물로서 병풍처럼 전시공간에 서 있다. 각각의 프레임은 실크스크린과 테이프 드로잉 처리된 투과성 반투명 막들이 저마다 다른 모양과 크기의 프레임을 채우는가 하면, 거울에는 도돌이표가 프린팅 되어 있다. 이접된 결집체를 통해 관객은 작가의 조형적 감각을 음미할 수 있다. 하지만 오브제 자체로부터 어떤 의미를 도출해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전시장 한복판을 물리적으로 가로지르는 수직적 사물이라는 점에 설치물은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1981)를 연상케 하지만, 뾰족하고 둥글고 앙상하게 속을 투과한 채 어중간하게 서있는 병풍모양 프레임 조합은 위압감은커녕 위태롭게나마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조형이란 완결성을 지양하는 형태,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조화롭게 연출된 경관을 거스르는 모습으로 주어진 장소와 리듬을 맞춘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상이한 질감과 크기와 모양의 판들을 연결시켜 세워놓은 설치는 참여한 작가들의 상이한 면면들을 연결해놓았다고 과감하게 번역할 수 있다. 해석을 좀 더 밀고 나간다면 전시에 참여한 이들의 불안정한 산보가 시각예술이 벼려놓는 부조화와 반목, 불화를 바탕으로 연결되어 지그재그로 겨우 발을 맞추며 아무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겠다. 홀로 설 수 없지만 집단과의 일치에 저항하며 어떻게든 서로에게 기댄 모습은 통일성보다는 임시방편으로 헤쳐모인 사분오열에 가깝다.
접힌 채 서있는 프레임들은 우연적이지만 의식적 계산이 바탕하고, 확정된 모습이지만 임시적이고 가변적이다. 이는 공간뿐 아니라 혼재된 시간의 논리 또한 재구성한다. 가령 판과 판 사이 구부러진 각의 우연한 수치가 특정 순간 고정된 즉흥적 감각의 흔적이라면, 미래는 일시적으로 고정된 현재의 경첩이 바깥 공간에 개입하고 새겨 넣은 영향권 안에 놓인다. 균형을 맞춰나가는 수행으로서 작업은 전시장 풍경과 동선에 변형을 가하고 최종의 기록으로 남는다. 이는 반사하는 거울 위에 프린팅 된 도돌이표처럼 '현재에서 미래로 손을 뻗을 뿐 아니라,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이는 선취이고, 현재를 미래 속으로 재설계' 함으로써 또 다른 우로보로스의 산책을 구현한다. 공간에 시간을 부여하고 언어를 주름으로, 시간의 굴곡으로 만드는 작업의 리듬은 견고하게 구획되지 않음에도 묵직하게 공간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이른바 시각적 리듬의 기예로 부를 수 있는 작업은 긴장과 유머와 역동을 펼친다. 불안정하든 배타적이든 상호의존적으로 기립해 있는 모습은, 시각예술을 관통하는 작가들의 분투가 어떻게든 합을 맞춰나가는 전시의 최종 모티프를, 최종적으로 불가능 자체가 '최종'일 수밖에 없는 모티프가 아닌지 곱씹어볼 만하다. 서기 위해 매끈함을 포기하고 구부러지고 어긋난 스크린은 전시의 선적 시간성에 개입하고 변위할 뿐 아니라, 동시대 작가들의 상이한 분투가 아직 설명되지 않은 공동체, 아직 설명할 수 없는 작업의 실루엣을 예비한다.
대상을 지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의 관성을 거스르는 행위는 의미를 비워내고 의미의 체제를 절개함으로써 중첩되고 혼재된 의미를 다시금 부여한다. 그런 점에 작가들의 작업 궤적은 저마다 작업의 세계관 안에서, 전시에 참가한 작가들 사이에서, 작가와 전시기획 사이에서 긴장과 의미 가능성을 유지한다. 수행 속에서 역설을 발견할 뿐 아니라 역설 자체를 수행하는 내적 파열의 형상은, 작가들의 상이한 공정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태도이다. 전시는 치열하게 목적을 벗겨내며 목적 없음을 지향하는 목적으로서 산책로를 그릴 터, 그 길은 명징하게 남지 않을지라도 길을 잃지 않도록 표지를 남긴다. ■ 남웅
1981년 서울출생
1986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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