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minimal
2018.12.07 ▶ 2019.01.13
2018.12.07 ▶ 2019.01.13
전시 포스터
김도균
still life series 2018, Archival pigment print, each 25x17cm(총 365장 중 red, green, blue, yellow_40장으로 구성)
박남사
서울, 뉴욕, 평양 2018, Inkjet print, each 140x100cm
이주형
lf, Ia-49 20 Pigment print, 120x90cm
이주형
lf, Ca-21 2016, Pigment print, 120x90cm
황규태
pixel; RGB 2016, Pigment print, 35x35cm
황규태
pixel; 말레비치 이후 blue circle/blue cross/blue square 2018, Pigment print, 35x35cm
미니멀한 사진이란 무엇인가
문혜진(미술비평)
대략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정작 그 실체가 무엇이냐를 물으면 명확히 답하기 곤란한 개념들이 있다. 외형적 유사성은 존재하나 기원이 불분명하고 하나의 사조나 흐름으로 묶기에는 공통점이 없을 때, 보통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 미니멀 사진이라는 용어 또한 그러하다. 흔히 모더니즘 건축의 기하학적 파사드나 대상의 일부를 추상적으로 찍은 사진을 지칭하는 이 용어는 ‘미니멀’하다는 용어의 다의성이 ‘사진’이라는 특수한 매체와 결합하면서 그 모호성을 더하는 듯하다. 우선 미니멀이라는 의미부터 살펴보자. 어원적으로 미니멀은 최소화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런 고로 미니멀하다는 표현의 표면적 의미는 재료나 형태, 구성에서 단순화와 최소화를 추구한다는 뜻이고, 그것이 단위 요소의 반복, 몬드리안식 대칭과 리듬, 기하학적 미, 추상성과 규칙성, 직선적이고 명료함 등의 외형으로 표출되며, 나아가 이와 같은 형식적 요소를 배태한 맥락(현대성, 모더니즘적 합리주의, 이상주의)과도 연계되는 확장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미술에서 하나의 사조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미니멀리즘’의 존재다.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주도 하에 1960년대 중후반 태동한 미니멀리즘은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미국식 모더니즘의 계승이자 전복으로 태동했다. 아방가르드를 키치와 구분하기 위해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했던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은 미술적이지 않은 요소를 미술에서 제거하는 부정의 방법론으로 귀결되었고, 이는 캔버스 위에 발린 물감으로 상징되는 이야기와 형상이 제거된 추상 색면 회화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재현을 일으키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그린버그의 엄격한 청교도적 방식은 모노크롬 평면이라는 종착점 이후 나아갈 길을 잃게 된다. 저드가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이라는 회화도 조각도 아닌 제3의 개념을 제시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다. 실제 공간인 3차원의 사물은 환영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반(反)환영주의라는 모더니즘의 기치를 계승하면서도 회화의 사각 틀을 벗어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고 구성의 위계를 없애려는 미니멀리스트들의 의도는 최대한 단일한 형태와 중심이 없는 병치(one after another) 구조라는 미니멀리즘의 외형적 형태를 낳는다. 단순한 큐브가 줄줄이 나열된 저드의 작업은 미술에서 형태적·은유적 환영을 제거하기 위한 이론적이고 논리적 사유의 결과였으므로, 보통 단순히 기하학적인 외형과 결부되는 미니멀이라는 말의 통상적 사용과는 실상 상당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이처럼, 가깝게는 단순성, 규칙성, 추상성, 반복 같은 외형적 특징에서부터 멀게는 사물성, 연극성, 현존성 같은 이론적 개념까지 확장되는 미니멀이라는 단어는 사진과 결부되면서 어떤 효과를 낳는가. 사진의 범주 또한 무한히 넓으니 어떤 사진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photo, minimal»(갤러리 룩스, 서울, 2018)에 참여하는 김도균, 박남사, 이주형, 황규태의 경우 미니멀은 표면적으로는 추상이요 태도에 있어서는 보이는 것 너머의 어떤 근원을 추구함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서 미니멀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사진의 본래적 목적을 넘어선 탐색을 뜻한다. 모든 사진은 원론적으로는 구상이다. 대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taking)’ 사진의 본성상 사진에 찍힌 모든 대상은 실재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비재현을 추구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모순을 동반한다. “모노크롬 사진은 현실의 추상이며, 실재와 추상이라는 모순되는 두 항이 혼재하는 역설의 이미지”1)라는 박남사의 말처럼, 재현 너머를 추구하는 사진은 구상이면서 동시에 추상이기에 자신의 기원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초월의 의지이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진의 경계를 넓히는 매체 탐구가 된다. 이들 사진가들은 모두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육안으로는 불가능한 추상적 이미지를 도출해낸다. 때로는 점, 선, 면이라는 기본적 조형 요소의 구성미를 탐색하기도 하고, 재현과 비재현, 표면과 깊이의 공존을 탐구하기도 하며, 시각성을 넘어 촉각적이고 물질적인 경험을 유발하거나, 아예 21세기 이미지의 기원인 픽셀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때 비재현적인 어떤 속성을 도출하는데 카메라와 사진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가 각 사진가의 작업을 해석하는 핵심이요 «photo, minimal»에서 ‘미니멀한 사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L. 이주형의 사진은 참여 작가 중 구상이라는 사진의 본성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작업일 테다. 가림막 혹은 블라인드의 일부를 확대해서 찍은 그의 사진은 적당한 정도의 클로즈업으로 인해 대상의 형태가 유지되며 피사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는 세부(가림막을 올리고 내리는 볼 체인, 창문 틀)가 포함되어 있어 보는 자로 하여금 이미지의 출처를 알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의 사진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진가가 가림막을 가림막으로 찍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주형이 실체로서 가림막을 재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진의 지향은 블라인드의 표면인가, 흐릿하게 드러나는 그 너머의 풍경인가, 그도 아니면 블라인드 너머로 스며 나오는 빛인가.2) 초기의 사진이 바깥 풍경으로 대변되는 구상과 격자로 대변되는 추상을 비슷한 비중으로 공존시켰다면, 이번 전시에 출품된 근작들은 외부 풍경을 최소화하고 창틀과 블라인드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리듬과 그 사이를 침투하는 빛의 자국에 집중한다. 일차적으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화면을 분할한 격자 구성이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크고 작은 직사각형들이 만들어내는 분할의 리듬은 몬드리안 식의 화면 구성의 묘를 창출한다. 이를 위해 사진가는 화면의 프레이밍, 빛의 점진적 차이에 따른 명암을 섬세하게 조율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격자가 질서와 반재현, 체계를 상징하는 모더니즘의 “침묵에의 의지(will to silence)”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열어젖히는 것이 이 사진들의 독특함이다. 이주형이 찍는 것은 “카메라라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생체 감각의 차원으로 침투시키는 빛의 이미지”3)다. 이주형의 격자들은 기하추상의 차가움이 아니라 마크 로스코(Mark Rothko)나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그림처럼 떨리는 빛의 진동을 전달한다. 창틀의 윤곽을 따라 떠오르는 초록색 십자가의 형상이나 투과되는 빛의 광량에 따라 짙어지는 노란색의 계조는 마음을 가라앉힌 평정의 상태에 도달할 때 얻을 수 있는 고요함과 명상의 느낌을 불러온다. 실제로 작가는 촬영 당시 자신을 고양시킨 신체적 감각과 현존을 일깨우는 광휘를 관객에게 전달하기를 의도한다.4) 공간에 둘러싸여 신체적으로 느낀 감각을 사진이라는 평면적이고 시각적인 매체로 전달하기 위해 작가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명암과 선예도, 채도를 강조한다. “디지털 변용을 통해 증폭된 빛의 질감”(작가)은 시각을 매개로 한 공감각적 환영을 일으킨다. 여기서 사진은 빛의 감각이 관객의 몸을 관통해 스며드는 촉각적이고 현상학적 체험으로 인도하는 초월적인 매체가 된다.
P. 한편, 박남사의 사진은 외견상 출처를 알아챌 수 없는 파란색 모노크롬 이미지다. 각각 ‹뉴욕›(2018), ‹서울›(2018), ‹평양›(2018)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사진들은 구름이 거의 없는 맑은 날 하늘을 촬영한 사진이다. 촬영 대상이 ‘하늘’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는 제목뿐이지만, 그것도 이미지의 정체를 고정시키기엔 불충분하다. 형상이 전무하기에 하늘을 찍은 것인지 파란색 플라스틱을 찍은 것인지 아니면 모니터를 찍은 것인지 보는 이는 알 수가 없다. 결국 관객은 한편으론 푸른색 모노크롬 이미지 자체의 계조 변화를 감상하고, 다른 한편 캡션을 보며 사진의 대상을 유추하는 분열된 감상을 하게 된다. 여기서 관객을 교란시키는 작가의 모노크롬 하늘 사진은 개인전 «뉴 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갤러리 룩스, 서울, 2017)가 표방한 문제의식의 연장이다. 여기서 작가는 보통 초월이나 숭고와 연관되는 모노크롬 회화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사진적 모노크롬을 감행했다. 앞서 말했듯 언제나 구체적인 대상(물질)을 떠날 수 없는 사진의 존재론적 특징은 정신성을 상징하는 고급미술과 대비되는 저급예술(중간예술)의 증거로 간주되곤 한다. 박남사는 통속예술이라는 사진의 근원을 온전히 수용할 뿐 아니라 역으로 이를 이용해 모노크롬 회화의 위선과 한계를 폭로한다. (물감의 물성을 무시하면) 겉보기에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검은 사각형(Black Square)›(1913)과 다를 바 없는 ‹검은 사각형의 비밀›(2017)은 실상 스마트폰의 검정 화면을 그대로 찍은 것이다. ‘절대 정신’이라는 예술의 목표가 사물이 없는 "비대상적 세계(non-objective world)"를 의미하던 말레비치와 달리, 박남사의 모노크롬 사진은 철저히 사물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다. 박평종이 지적하듯, 박남사의 모노크롬 사진은 모노크롬이 ‘저 너머’ 초월적 세계뿐 아니라 ‘저 아래’의 세속적이고 평범한 세계에서도 나올 수 있음을 주장한다.5) 이는 마치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비천한 유물론(base materialism)’의 사진적 재해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역시 하늘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상으로 모노크롬을 구현한 것이다. 여기서 미니멀이라는 감각을 유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모노크롬 이미지요 이차적으로는 비슷한 이미지의 반복이다. 미니멀리즘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인 반복의 연쇄가 사진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지점은 흥미롭다. 구성적 위계를 제거하고 작가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려는 형식적 필요에서 도출된 반복이 여기서는 ‘헛된’ 행위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전 세계를 떠돌며 동일한 하늘을 사진 찍는 행위의 무용함은 ‘어리석은’ 모노크롬의 시작으로 간주된다.6) 이러한 사진의 무의미가 실제와 다른 캡션에도 반영되어 있음은 작가의 짓궂은 농담이겠다. 뉴욕, 서울, 평양이라는 제목과 달리 세 작업은 모두 재직 중이던 학교의 교정에서 촬영한 것이다. 정치적 의미를 자동으로 부여하게 되는 제목의 의미를 실제가 배반하는 상황은 ‘헛수고’라는 개념의 적용이기도 하고 텍스트가 이미지를 규정하는 해석의 일방성을 방지하는 방책이기도 하다.
K. 이주형과 박남사가 구상인 동시에 추상인 사진의 즉물성을 유지했다면, 김도균의 모노크롬은 디지털 추출을 통해 훨씬 추상화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still life›(2018)는 2018년 1월 1일부터 2018년 12월 31일(예정)까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사진 365점의 프린트를 격자 형태로 일괄 배치한 작업이다.7) 이 작업은 작년 개인전 «instagram@kdkkdk»(상업화랑, 서울, 2017)의 연장이자 응용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2011년부터 2017년까지 2456일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1555점의 사진을 폴라로이드 형태로 출력해 전시장 벽면 가득 붙였다. 인스타그램이라는 공유 방식, 일기에 가까운 일상의 기록, 개개가 아니라 복수의 사진 제시, 격자 형식의 배치는 이번 출품작에 그대로 이어진다. ‹still life›는 촬영 대상을 ‘정물’로 한정해 ‘매일’ 해당 일을 기억할 수 있는 사물을 촬영 후, 해당 사진에서 ‘한 가지’ 색을 추출해 하나의 픽셀로 기록한 작업이다. 이때 색 선택 기준은 전체 이미지에서 지배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색이다. 이는 물리적인 분량을 의미할 수도 있고 내용적 장악력을 가리킬 수도 있다. 색을 추출하는 도구는 팬톤 스튜디오 앱(PANTONE Studio App)이다. 추출한 색을 이미지로 사진 앱에 저장하고, 팬톤의 색번호, 원본 사진의 날짜, 찍은 사물을 캡션(예. 116XGC_20180417_민들레)으로 기록 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한다.8) 경우에 따라서는 원본 사물의 이미지와 색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으나(민들레-노란색), 캡션만으로는 해당 색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도저히 추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오른손-갈색). 색의 출처는 색면 사진 프린트 뒷면에 수기로 기록될 뿐 구매자 외에는 원본 사진이 공개되지 않으므로 관객은 색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길이 없다. 결과적으로 작업은 박남사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모노크롬을 전복한다. 표면적으로는 엄격하고 절제된 기하추상의 색면 격자로 보이는 이미지들은 실상 지극히 범속하고 일상적인 스마트폰 사진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도균의 작업은 박남사처럼 이론적이거나 이념적 선언이 아니며 가볍고 경쾌한 유희적 태도의 소산이지만, 이로 인해 내용과 형식의 괴리는 더 벌어진다. 그의 사진은 엄숙한 기하추상의 미니멀을 문자 그대로 ‘가지고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사체의 선정, 촬영 방식, 제작 태도의 모든 측면에서 ‹still life›는 모더니즘의 구도(求道)적 탐색에서 이탈한다.
이때 최종 설치물인 색면 격자의 색 배치를 작가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은 기존작과의 중요한 차이다. 건물의 파사드를 낮에 촬영한 초기 대표작 ‹f›(2002-)나 실내 공간의 일부를 찍은 백색 연작 ‹w›(2007-), 나아가 일상적 포장재를 근접 촬영해 또 다른 기하 추상을 도출한 ‹p›(2015-) 연작에서 드러나듯, 김도균은 언제나 대상의 조형성에 관심이 있었으며 점, 선, 면의 기본 요소들이 경쾌하게 조합되는 표면처럼 피사체에 접근해왔다. 여기서 화면의 조형성은 정교하게 선택한 시점과 프레이밍, 접사에 의해 세심하게 구성되고, 공들인 촬영과 보정, 인화로 완성된다. 반면 ‹still life›의 구성은 원론적으로 작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전날의 색을 고려해 오늘의 색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날의 이미지에 충실해 즉흥적으로 색을 선택하기 때문에 각 이미지는 앞뒤의 이미지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순차적으로 배치하므로 더더욱 이미지 구성에서 작가의 개입은 배제된다. 촬영과 색 선택은 작가가 하더라도 색 추출은 팬톤이라는 앱이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그렇게 추출한 색은 어디서나 동일한 표준화된 색상 값이다.9) 색면의 배치 또한 날짜순으로 기계적으로 할당하니, 이 작업이야말로 사진적 레디메이드의 동시대적 완성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디 사진이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었으니 디지털 프로그램이 가세하며 자동화가 심화된 사진적 장치들은 갈수록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되는 동시대 이미지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H. 황규태의 픽셀 사진은 사진 너머의 사진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실험이다. 사각과 원이라는 기본 조형 단위를 재료 삼아 색면의 조합으로 기하학적 리듬감을 만들어낸 이 추상 이미지가 실상 ‘촬영’이라는 사진의 본령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작가는 1990년대 후반 우연히 브라운관 TV 모니터를 루페(확대경)로 들여다보고 픽셀의 세계를 발견한다. 대형카메라로 이 놀라운 발견을 촬영한 그는 이후 여러 기종의 온갖 모니터들 위의 다양한 이미지를 픽셀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제조사에 따라 선, 원, 사각형 등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픽셀의 모양과 표면 이미지의 색에 따라 다른 배합으로 구성되는 색면의 조합은 황규태에게 파고 파도 새로운 미지의 세계에 입장한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스스로 “컬러의 놀이”라고 칭하는 픽셀과의 유희는 사진의 관점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픽셀 작업이 육안으로 감지할 수 없는 렌즈의 시선에서 출발했고 그것을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결과이므로 일차적으로 이 작업은 사진에 기반한다. 하지만 1차 이미지를 얻는 과정이 종료되면 작업은 포스트프로덕션의 세계로 진입한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포스트프로덕션이 단순 후보정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2차, 3차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생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픽셀은 반복해서 확대가 가능하다. 픽셀을 확대하면 다른 픽셀이 나오고, 그 픽셀을 확대하면 또 픽셀이 나온다. 프랙탈을 연상시키는 입자들의 무한 연쇄는 작가에게 우주를 탐험하는 듯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pixel; 말레비치 이후 blue circle›(2018)이나 ‹pixel; 말레비치 이후 blue cross›(2018)처럼 완벽한 모노크롬이 아니라 다른 색점들이 노이즈처럼 섞여 들어간 이미지는 확대를 덜 한 버전이다. 여기에 반복적인 확대를 가하면 ‹pixel: cross and square›(2017)처럼 완전한 단색조 색면이 나타난다. 이미지의 생산이 실사 촬영이 아니라 기존 이미지의 확대라는 점에서 작업은 카메라와 촬영이라는 사진의 근간에서 벗어나지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취사선택’하는 작가의 행위는 여전히 사진가의 태도다.
하지만 픽셀 작업을 사진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만드는 것은 이 사진이 사진의 기원, 곧 이미지의 출발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듯, 그의 픽셀 작업은 디지털 시대의 말레비치에 대한 재해석이기도 하다. 형상을 제거함으로써 형태와 색채만의 순수한 구성에 도달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처럼, 구상 이미지를 확대하며 도달한 미니멀 추상 색면의 세계는 전자 이미지를 이루는 기본 입자들의 무한 공간이다.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사진은 감광입자 혹은 소자 개개가 빛에 반응한 결과이고, 오늘날 이미지의 다수를 이루는 전자 이미지는 픽셀들이 조합된 종합체다. 그런 점에서 황규태의 픽셀 사진은 사진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을 ‘광학적 무의식’을 통해 발견하게 해주는 작업인 동시에, 현실을 넘어 초현실로 이행하는 비물질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원근법을 벗어난 말레비치의 그림이 물질성을 벗어버린 절대정신의 세계, 무한 시간 속의 무한 공간을 현시하듯10), 황규태의 픽셀도 실재라는 사진의 본성 너머의 추상의 세계를 소환한다. 확대에 확대를 거듭하면서 실재의 지표라는 현실과의 끈은 희미해지고 순수 추상의 조형적 탐색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황규태의 사진은 구상과 추상의 긴장 관계를 쥐고 있는 박남사의 사진과 궤를 달리하며, 색채 앱이라는 시각 장치를 통해 모노크롬에 도달한 김도균과 달리 확대라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전자적 미니멀의 극한에 도달한다. ‹pixel: evolution blue rose›(2018)는 그의 방법론의 요약과도 같은 작업이다. 장미꽃이 단색의 입자에 접근하면서 현실을 지시하는 사진의 기호는 어느 순간 실재의 굴레를 벗은 순수 기표로 이행한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어느 범위를 넘으면 사진이 아니라고 할까. 사진은 사진이어야만 되는 것일까.”11) 어쩌면 황규태의 질문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 모두의 작업에 적용되는 핵심 논제일 것이다. 사진이면서 사진이 아닌 것, 사진 이후의 사진, 사진을 뛰어넘은 무언가는 사진의 전통에 발을 디디고 있되 21세기의 시각 환경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진가들 공통의 화두다. 실재를 내포하면서도 보이는 것 너머로 나아가는 미니멀 사진의 탐색은 그런 점에서 사진의 경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굳이 카메라를 경유할 필요가 없음에도 카메라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다. 구상 이미지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는 이주형을 제외한 세 작가들의 사진은 외견상 비(非)촬영 이미지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특히 기계적으로 할당된 표준적인 색상 값을 출력한 김도균이나 스크린을 계속 확대해 픽셀을 뽑아낸 황규태의 사진은 기존 인터넷 이미지나 스캔한 이미지로도 충분히 제작 가능하다. 황규태의 경우 스캐너로 스캔한 이미지도 이미 작업에 활용하고 있으니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이미지’라는 사진의 전제에서 자유로워진지 오래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카메라라는 시발점을 벗어나지 않으려하는 것은 개념의 측면도 있겠지만 사진 매체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사진이 아닌 ‘이미지’를 이들 사진가들이 어떻게 수용하고 체화하는지가 향후 사진의 미래가 아닐까.
1) 박남사 작가 노트, 『뉴 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 갤러리 룩스, 2017.
2) 손영실, 「이주형 Light Flow」, 『월간미술』, 2016년 10월호, 172쪽.
3) 이주형 작가의 말. (윤규홍, 「집 안에 갇힌 남자」, 『Light Flow』, 갤러리 분도, 2016 재인용)
4) 이주형 작가 노트, 2016.
5) 박평종, 「세속의 세계로 내려온 모노크롬 사진」, 『뉴 모노크롬: 회화에서 사진으로』, 갤러리 룩스, 2017.
6) 박남사 작가 노트, 2018.
7) «photo, minimal»이 시작되는 12월 7일부터 매일 새로운 사진이 한 장 씩 추가되어 전시되며, 12월 31일 365점의 사진으로 ‹still life›는 완결된다.
8) 김도균 작가 노트, 2018.
9) 해당 색 번호를 인쇄하면 누구나 똑같은 색상의 프린트를 얻을 수 있다.
10) 윤난지, 『추상미술과 유토피아』, 한길아트, 2011, 161쪽.
11) 황규태, 『황규태』, 열화당, 200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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