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여기, 지금(Here and Now)
2019.04.10 ▶ 2019.05.12
2019.04.10 ▶ 2019.05.12
전시 포스터
김병기
Mountain East 2018, Oil on canvas, 130.3x162.2cm
김병기
겨울 감나무, Winter Persimmon Tree 2018, Oil on canvas, 130.3x97cm
김병기
성자(聖者)를 위하여, For the saint 2018, Oil on canvas, 130.3x97cm
김병기
다섯개의 감의 공간, Persimmon of Five Spaces 2018, Oil on canvas, 65x100cm
김병기
메타포 Metaphor 2018, Oil on canvas, 162.2x130.3cm
김병기
산의 동쪽-서사시 Mountain East-Epic 2019, Oil on canvas, 162.2x130.3cm
김병기
역삼각형의 나부 Nude of an Inverted Triangle 2018, Oil, gesso and charcoal on canvas, 145.5x112.1cm
가나아트는 김병기 화백의 근작과 대표작을 선보이는 개인전을 개최한다. 오랜 기간 화업(畵業)을 이어온 김병기는 국내외를 오가며 실험한 현대적인 조형성을 기저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주요한 족적을 남긴 원로화가다. 1934년 일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アバンギャルド 洋畵硏究所)에 입소한 작가는 그곳에서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을 접한 후 추상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1939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 화백은 ‘50년미술협회’를 결성하고, 「피카소와의 결별」(1951)이라는 글을 발표, 제 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여하는 등, ‘추상화가 1세대’로서의 전위적인 행보를 이어 나갔다.
추상화가처럼 작품 활동을 했지만 사실 나는 체질적으로 형상성을 떠날 수 없었다. 형상과 비형상은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했다.
-김병기
그에게 있어 추상미술은 ‘정신성‘과 ‘형상성’의 공존이다. 김병기는 회화란, 근본적으로 형상성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회화는 현실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형상만을 그대로 재현한 회화는 모방된 장식품에 불과하다. 비시각적지만 실재하는 것들, 예컨대 인간의 감정이나 관념들과 같은 정신적인 것들 또한 화면에 구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형상과 정신의 교감이 화면에 나타나야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추상화 역시 회화이며, 우리가 존재하는 곳 즉, ‘여기’ 그리고 우리가 실재하는 이 순간인 ‘지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김병기의 추상화는 형상과 대립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신성과의 조화를 통해 현실 세계를 담아내는 방식 중 하나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추상과 구상, 그 틈새에 있으며, 서로 다른 두 가지의 특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이는 것이다.
본 전시명 《여기, 지금(Here and Now)》은 그가 미국에서 접한 장 푸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 1924-1998)의 글 『포스트모던의 조건(La condition postmoderne)』(1979)에서 따온 것이다. 리오타르는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영웅적이고 숭고한 인간(Vir Heroicus Sublimis)>(1950-51)을 예시로, ‘여기, 지금(Here and Now)’이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지금(now)’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시간, 의식적으로는 알 수 없는 시간을 말한다. 화가는 캔버스의 빈 화면을 보면 이와 같은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 시간, ‘지금’을 경험하게 되며 동시에 이 공간을 채워 넣고자 무아경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화가는 리오타르의 말대로, ‘무엇이든 다 되는 세계(anything goes)’ 즉,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다. 김병기는 이러한 리오타르의 ‘여기, 지금’이라는 개념을 동양 사상의 ‘무위(無爲)’라는 개념과 동일하게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빈 캔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담은 ‘무위’이자 ‘지금’이다.
예술에 있어 ‘1+1’의 답은 2가 아니다. 3도 되고, 5도 되는, 모든 게 다 되는 세계다. 복합성의 예술, 그것은 창의적 복합이다. 2는 절충이다. 예술에 있어 제일 나쁜 게 절충이다. 노자의 세계는 0이다. 나는 노자 철학을 존중한다. 시간의 단면이라는 점에서 실존주의도 노자와 비슷하다. 동양의 선불교와 실존주의는 비슷한 점이 있다.
-김병기
이러한 ‘무위’의 개념은 그의 그림에서 분할과 여백이라는 요소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는 김병기 만의 독특한 ‘선묘’로 만들어진다. 그의 작업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조형적인 특성 중에 하나는 전통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붓의 흔적과 직선의 요소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정은영 학예연구관은 ‘촉지적 선묘’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선적인 양식의 촉각성과 회화적인 양식의 시각성을 결합한 ‘촉지적’이라는 특성에 선묘를 붙여 지은 것이다. 김병기는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 내는 방식으로 빈 여백을 만든다. 이는 하나의 선으로 구현되어 조형적이면서도 비조형적인인 화면을 구사한다. 또한 그는 빈 공간과 대조되도록 화면 중앙에 짧고 강렬한 필선을 가득 채워 넣음으로써 선적이면서도 회화적인 추상화를 구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여백과 선에 의한 분할된 공간은 무위의 개념이자 ‘지금’이다. 김병기는 늘 본인의 작업이 ‘무(無), 허(虛), 공(空)과 같다’ 말한다. 그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하는 0의 공간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20세기는 양식을 만든 시대였고, 21세기는 그 양식을 부수기도 한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들 한다. 나는 나대로 동양성을 가지고 포스트모더니즘하려고 한다.
-김병기
본 전시에서도 김병기는 추상과 구상의 틈새, 그리고 ‘여기, 지금’, 즉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캔버스에 담아냈다. 100세를 기념하며 열린 2016년 개인전 이후에 제작된 신작들이 공개된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더욱 의의가 있다.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걸어온 김병기 화백은 그가 오랜 기간 화업을 이어오며 고심한 고뇌의 결과물을 신작들에 담아냈다. 따라서 《여기, 지금(Here and Now)》 전시는 그가 그려내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간, ‘지금’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여기, 지금(Here and Now): 김병기 신작전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
축구경기를 보던 중이었다. 골이 하마하마 터질까 마음 조리며 바라보는데 드디어 골이 터졌다. 그건 계산을 너머선 그 어느 순간이었다. 축구가 계산만 하고 있다면 패스 밖에 할 게 없다. 거기서 골이 터질 리 만무하다. 그걸 너머선 한 순간에 골이 터진다. 그림 또한 그렇다. 계산을 넘어선 경지다.
태경 김병기(台徑 金秉騏, 1916- )화백은 언술(言述)의 고수다. 적확(的確)하면서도 함축 또한 깊다. 말이 곧 도(道)라 했다. 말이 통하니 이 또한 도통(道通)이다. 굳이 구분해서 말하면 ‘일상형 도통’이다.
한편, 당신에겐 자기구원형 도통이 지난 반생의 과제였다. 당신은 프랑스 미술가 뒤샹(Marcel Duchamp)을 롤 모델로 삼았던바, 그가 말하던 뒤샹의 작가정신은 <위대한 유리> 작품 이력에 잘 담겨 있었다 했다.
작품은 두 장 큰 유리 사이에 연박(鉛薄), 휴즈선 등을 끼어 넣은 일종의 구조물이다. 전시를 마친 뒤 소장자에게 돌려주려고 트럭으로 옮기던 중 그만 파손이 났고, 이를 나중에 뒤샹이 꼼꼼하게 수리했다. 금 간 곳은 때워 붙였다. 그리곤 한마디 했다. “이제 겨우 완성되었다!” 일상에서 뜻밖에, 그러나 다반사로 일어나는 불의(不意)의 해프닝도 유의미하게 받아들인 이런 작가정신이야말로 동양 쪽 노자가 말한 “함이 없는” 무위(無爲)의 경지, 그런 예술적 도통이라 받들어왔다.
이번 2019년 신작전은 무위가 낳은 결실로 채웠다. 태경이 만 백세가 되던 2016년 봄에 가졌던 “바람이 일어나다: 백세청풍” 제하의 개인전“ 이후 3년만이다. 그 사이, 화가의 경력을 더욱 알차게 빛내줄 성취가 줄을 이었다.
우선 김병기의 연공(年功)이 가져다준 예단(藝壇)쪽 성취 하나로 2016년 봄 한국 국적 회복을 계기로 2017년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뽑혔다. 그리고 2017년 연초부터『한겨레』신문에 매주 당신의 회고담이 연재되었다.
회고담을 풀어내는 비상한 기억력은 참으로 믿기지 않는다는 세간의 뒷말도 오갔다. 윤범모 미술평론가는 녹취했던 글을 모아 마침내 책을 묶었다(『백년을 그리다』, 한겨레출판, 2018). 2018년 5월, 그 출판기념회에 최종태 조각가와 박서보 화백이 축사를 했다. 특히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커미셔너였던 김병기가 골라낸 출품작가 가운데 한 분이던 박 화백의 축사는 사랑과 존경이 뚝뚝 떨어지는 물맛처럼 섬섬한 인사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화가는 그림 프로답게 미술비평가의 소견을 먼저 듣고 싶어 했다. 이 소망도 올 2019년 연초에 결실을 보았다. 정영목 평론가가 서울 미대 교수 퇴임 기념으로『화가 김병기, 현대회화의 달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을 출간했다.
김병기는 무엇보다 사회성을 앞세우는 화가다. 그림 모티브로 무엇보다 자유를 으뜸 화두를 삼았고 그걸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발언⦁조형해왔다. 발언 방식은 미국 평론가가 말했듯 ‘절충적(eclectic)’이었다.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통합, 곧 세계성과 한국성의 두 평면을 구조적으로 통합해왔다.
구조적인 통합은 ‘반대의 일치’를 설파했던 노자 발상법의 실현이었다.『도덕경』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는 말로 시작한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합리 또는 이성의 세계고, “영원하다 할 수 없는 도”는 불합리 또는 감성의 세계인데 반대 둘이 일치한다는 미학이 태경 자신이 지향해왔던 바다.
그림의 표현방식은 비평가들이 촉지(觸知, haptics)적이라 이름한대로 직선이 수직으로 수평으로 또는 사각(斜角)으로 먼저 포치(布置)한 것을 근거로 삼각, 역삼각, 직사각의 평면이 생겨난다. 그 사이로 한없이 자유로운 무수한 붓질이 사선을 이루면서 그림의 역학 구조를 만들어낸다. 사선들은 대나무 그림의 고수였던 조선시대 이정(李霆)이나 명말(明末)의 서위(徐渭) 등이 핍진하게 그려낸 “댓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죽(風竹)같고 거기선 댓바람 소리마저 들리는 듯싶다.
바로 그 경지에서 자연과 합일하는 당신을 스스로 바라보고 있다. 당신이 미국에 갓 도착했던 1965년에 서울 남산이 상징하는 대한민국 국체(國體)의 보전을 희구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나머지 그린 그림 제목이 바로 도연명(陶淵明)의 <음주>에서 나오는 유명시구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을 따고서) 멀거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였다. 여기서 남산은 대한민국 서울의 안산(案山)이자 애국가에 나오는 그 남산이면서, 한편으로 자연합일을 지향하려는 당신 마음쓰임의 산이기도 했을 것이다.
헌데 백 살이 넘어서고부터는 “어진 사람이 산을 즐기는(仁者樂山)” 경지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일상으로 화실 뒤 북한산을 만나고 있다. <정사(精舍)>시에서 주자(朱子)는 “거문고와 책을 가까이한지 사십년, 거의 산중 사람 되었네. 하루는 띠풀 집 지어지자 문득 나의 산수로 서있네(琴書四十年 幾作山中客 一日茅棟成 居然我泉石)”라 읊었다. 여기 ‘훌쩍 또는 뜻밖에’ 뜻인 ‘거연(居然)’이란 시어는, “스위스는 산 속에 도시가 있고 서울은 도시 속에 산이 있다”는 당신 특장(特長)의 수사법대로 당신 자신이 바로 서울 땅에서 훌쩍 산석(山石)이 되었음을 말함일 것이다.
사선을 긋는 그의 붓놀림은 자유로움의 몸짓이다. 소감이 없을 수 없다. “요즈음 그림을 그리는 나 자신을 곰곰이 살피게 된다. 그리는 순간의 순수한 나 자신을 본다. 그 순수는 하느님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 붓놀림은 사회적 발언이기도 하다. 최근의 급변 한반도 지정(地政)에 대해선 당신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요즘 시국을 갖고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북한이 장차 남한식의 자유민주주의 길을 걸을 수 있어도, 그 사이 높은 민도를 쌓아온 남한이 북한식 전제주의로 절대로 전락할 수는 없다. 그건 인류역사의 엄연한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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