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포스터
김정란
평양을 거닐다 53x65cm, 비단에 채색&배면프린팅, 2019
김정란
싱가폴을 거닐다 53x65cm, 비단에 채색&배면프린팅, 2019
김정란
판문점을 거닐다 53x65cm, 비단에 채색&배면프린팅, 2019
전통과 현대, 그 간극과 접점에서의 모색과 분투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 평론)
주지하듯이 한국화는 매우 오랜 역사적 발전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조형체계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문화권의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지만 이를 한국인의 심성과 미감을 통해 다시 해석되고 창출됨으로써 이른바 한국화의 실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통해 축적된 풍부한 조형 경험과 심미관의 발현은 바로 한국화의 전통으로 귀착되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특정한 형식이나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관하고 있는 특정한 정신과 정서, 그리고 심미적 요구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늘 새로운 양태로 표출되고 발현되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생명력을 수혈 받아 그 유장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이 현대라는 새로운 시공에서 맞닥뜨리게 된 서구조형과의 관계를 여하히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른바 현대는 그간 한국화가 배태되고 숙성되며 그 내용을 풍부히 해 온 전통시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명의 양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의 고수는 한국화를 ‘낡고 진부한 오래된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또 맹목적인 서구지향의 변신은 ‘근본 없는 형식추종’이라는 엄혹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화는 바로 전통과 현대라는 상충적이고 모순적인 가치의 충돌 속에서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미감을 수용함으로써 전통을 더욱 풍부히 해야 한다는 명제와, 특유의 정체성을 여하히 지켜내어 그 특수성을 보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작가 김정란의 작업 역시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과 그 가치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여하히 자신이 속한 현대라는 시공을 표출해 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전통적인 인물화에서 특장을 보이는 작가의 작업은 유려한 선묘를 통해 표출되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의 묘사가 단연 빼어나다. 인물의 표정은 물론 그 이면의 정신까지도 표현하겠다는 이른바 전신(傳神)에 대한 집요함은 그의 작업이 지니는 특징일 것이다. 사실 전신은 매우 오래된 동양화론의 요체이다. 육안에 의한 형상의 표현에 앞서 내면의 정신을 포착하고 이를 표출함을 우선하는 전신의 요구는 객관의 가치보다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인물이라는 표현 대신 사진(寫眞)이나 진영(眞影), 초상(肖像) 등으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후 전신은 기운생동(氣韻生動)으로 발전하며 전통적인 동양회화 창작과 품평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작가가 전신에 주목하고 인물화에 천착함은 바로 전통에 접근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인물의 세밀한 근육의 구조를 표현하는 육리문의 운용이나 적절한 음영의 구사를 통해 대상의 객관적 상태 표출에 천착함은 올바른 형상표현을 통해 전신을 구현한다라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구체적 실천인 셈이다. 엄정한 형태미를 바탕으로 한 군더더기 없는 인물의 표현은 작가의 작업이 이미 일정한 수준과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유려한 필선의 거침없는 구사와 정치한 색채의 운용은 단연 빼어나다. 그것은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이 여실하지만 작가의 해석을 통해 현대적인 가치를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해부학적인 형태의 객관성과 음영을 통한 입체적인 효과를 통해 인물의 합리성을 확보하고 거침없는 필선의 운용을 통해 전통 인물화의 오묘한 심미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여백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한 공간의 운용이다. 이는 대상이 되는 인물을 강조하는 조형적 수단인 동시에 함축과 절제를 통해 보는 이의 공감과 참여를 유도하는 일종의 적극적인 조형적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의 여백은 인물 표현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공명(共鳴)의 공간으로, 극히 정적인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을 통해 특유의 정치하고 섬세한 표현을 한껏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전통에 대한 충분한 학습과 이해, 그리고 이의 재해석과 주관화의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역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는 바로 전통과 현대라는 해묵은 화두이다. 작가의 경우 역시 예외는 아니라 여겨진다. 전통적인 한국화의 이미지가 갖는 상징성에 주목하고 이를 차용하거나 민화에서 비롯된 요소들을 화면에 도입하여 변화를 꾀하는 것은 바로 작가가 일관되게 주목하고 있는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라 이해된다. 이에 더하여 근작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진을 도입한 새로운 작업들은 여하히 현대라는 가치를 수용하여 발현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실험과 모색이라 할 것이다. 동일한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배경의 공간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공간들을 섭렵하며 시공을 초월한 환상적인 화면으로 표출된다., 작가 스스로 경험한 공간들을 재구성하며 전통과 현대를 충돌시키는 이러한 작업들은 인물, 혹은 초상이라는 평면성을 바탕으로 사진의 입체성을 더하는 것이며, 그린다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행위에 디지털의 기술을 융합함으로써 현대라는 시공의 가치를 수용하고자 함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이질적이고 새로운 시도임에 분명하나 그것이 생경하거나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이해와 장악력이 전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작으로 선보이는 12지신의 도입 역시 이러한 일련의 변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전통의 한 전형으로 자리하고 있는 12지신의 도상들을 특유의 섬세하고 정치한 인물표현과 병치함으로써 전통에 대한 존중과 현대라는 가치의 수용이라는 작가의 일관된 작업의 정체성은 견지하되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을 통해 현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모색, 실험과 추구는 모두 일정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전통과 현대라는 접점에 대한 반복적인 고민이자 실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물론 이는 일거에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은 작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전통의 깊이와 무게는 심중하며 현대라는 시공 역시 대단히 복잡다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변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며 현대라는 가치를 수용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분투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천착에 긍정하며 작가의 향후 작업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이미 작가가 작업을 통해 담보한 수준과 지향을 통해 볼 때 충분히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작가 노트
지금 한국화를 이야기 한다는 것
‘왜 지금 한국화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지금 예술을 말하는가?’와 같은 차원의 질문이다. 미술이 장르를 뛰어넘고 통합을 시도하는 이 때에 한국화라는 작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 국수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물리학을 연구할 때 거시적으로는 우주 전체를 말하지만 미시적으로는 원자 또는 그보다 작은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 까지도 관찰한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이 천문학의 하위 개념이 아니듯 한국화도 예술의 하위 개념은 아닌 것이다. 한국화를 생각한다는 것은 예술이라는 거시적 관점과 같은 또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미시적 관점이 결코 그른 것이 아니듯 한국화라는 아주 작은 부분을 생각한다는 것은 예술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뿐이다. 예술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부터 거대 담론을 끌어내기도 하고 전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자기만의 고유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미술은 과거 중국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과거 중국의 문화가 동양세계에 크게 지배적이었고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배제하고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중국의 상당한 영향 아래서도 중국과는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취하고 버림의 과정 속에서 한국의 문화는 형성되었다. 서양의 기독교문화 역시 한국의 샤머니즘과 불교와 접화 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한국의 문화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토착의 것과 섞여 정착되었다. 그 가장 근원에는 ‘복(福)’과 ‘소원성취(所願成就)’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한국의 미술문화는 이 ‘복’과 ‘소원성취’의 염원 아래 발전되었다.
그것은 위로는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는 서민들까지 같은 마음이어서 왕을 위한 그림으로는 일월오봉도와 십장생 등이 그렇고 궁중회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그림들이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기록의 의무를 가지고 그려졌던 행차도 등은 예외로 하겠다. 그러나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던 초상화 역시 조상 숭상하는 마음이지만 그 저변에는 조상들이 자손들이 무탈하도록 돌봐줄 것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사대부와 문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선과 같은 삶을 추구했던 선비들은 산수 좋은 곳에 유유자적하는 그들의 이상을 표현하였는가 하면 서민들의 민화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사방위신을 그려 악귀를 물리치려 하고, 열 가지 장생하는 동식물들을 그려 무병장수를 염원하였으며, 혼인한 신부의 방에 어린아이 그림을 장식하여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기도 했다. 새벽녘 정안수(井華水), 집안마다 신주단지, 마을의 당산나무 등 역시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한국 민족 저변에 흐르고 있는 복의 염원이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한국의 미술은 이러한 염원을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스펙트럼 이었던 것이다.
<꿈, 이다>는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십이지신은 본래 『약사경』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상으로 열두 방위에 맞추어 쥐·소·호랑이·토끼·용·뱀·말·양·원숭이·닭·개·돼지 등의 얼굴 모습을 가지며 몸은 사람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도교의 방위신(方位神)에서 강한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십이지신은 약사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사 『약사경』을 읽어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조형예술로서 십이지신상은 경주 원원사지(遠願寺地) 삼층석탑이 효시가 되었는데” 1) 방위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꿈, 이다>에서 이러한 십이지신상을 작품으로 차용하면서 한국미술에 대해 다시 한 번 조명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미 너무나 진부해져 버린 한국미술의 정체성 화두를 꺼낸 놓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으나, 한국화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담론을 그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답도 없는 이 과정을 계속 해 나아가고 있다.
■ 김정란
1971년 서울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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